취임 후 한국을 첫 방문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0일 오후 경기도 평택시 삼성전자 반도체공장 시찰 후 연설을 마친 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악수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취임 후 한국을 첫 방문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0일 오후 경기도 평택시 삼성전자 반도체공장 시찰 후 연설을 마친 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악수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데일리한국 안병용 기자] 국내 재계 총수들이 국가적 비즈니스에서 외국 정상급 인사를 일대일 또는 일대다 형식으로도 대면한 사례는 드뭅니다. 경제부처 장관들을 따라 다니며 옆자리에서 민간 세일즈 강화에 초점을 맞췄던 투자 결정이 과거 정부에서 주로 관찰된 총수들의 위상입니다.

그룹에선 실무적인 이유로 회장 대신 사장이나 전무, 심지어 상무 급을 대통령 경제사절단에 포함시킨 사례가 적잖습니다.

윤석열 정부에서는 변화의 기류가 감지됩니다. 총수들의 외교적 리더십이 새로운 전기를 맞는 모양새입니다. 양국 정상이 만나는 자리에 재계 수장이 안내자로 나서는가 하면 일대일 환담을 마친 뒤 대규모 투자 발표자 역할을 하는 등 적극적인 참여가 눈에 띕니다. 과거엔 그저 ‘민간 외교관’에 그쳤던 역할을 훌쩍 넘어서는 행보입니다.

기존 틀을 깬 ‘사건’의 시작은 지난 20일입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한미정상회담을 위해 전용기 ‘에어포스원’을 타고 2박3일 일정으로 한국을 찾았습니다. 그는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전용차 ‘더 비스트’로 갈아타고 삼성전자 평택 반도체 공장으로 달려가 이재용 부회장을 만났습니다.

바이든 대통령은 왜 대통령실과 숙소가 위치한 용산이 아닌 ‘삼성 반도체의 심장부’ 평택으로 발걸음을 옮겼을까요? 정상회담을 위해 방한한 외국 정상이 첫 일정을 시작하는 곳은 상당한 의미가 담긴 장소라는 점을 감안하면 한국 기업의 위상과 총수의 역할이 급변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과거의 사례를 예로 들어볼까요. 2017년 11월 취임 후 첫 아시아 순방에 나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해 첫 일정을 시작한 곳은 캠프 험프리스 주한미군 기지였습니다.

주한미군 기지가 선택된 까닭에는 당시 한반도 안보 상황과 관련이 있습니다. 2017년은 북한이 제6차 핵실험을 진행하고 대륙간 탄도 미사일(ICBM)을 개발‧발사하는 등 미국과 그 동맹국들에 대한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켰던 시기입니다. 때문에 트럼프 대통령은 한-미 군사동맹의 건재를 과시하고, 북한에 압력을 가하기 위해 캠프 험프리스 방문을 첫 공식 일정으로 택한 바 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현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국가적 ‘과제’와 관련된 장소를 방한 첫 일정으로 선택한다는 얘기입니다.

바이든 대통령의 첫 목적지인 삼성 반도체 공장 방문도 마찬가지로 해석됩니다. 코로나19와 라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불안해진 자국 반도체 공급망을 한국에서 확보하는 움직임이 미국 입장에서 아주 시급한 상황으로 분석됩니다.

전 세계 메모리 반도체의 70%를 공급하면서 반도체 글로벌 공급망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우리나라, 특히 반도체 세계 1위 기업을 이끌고 있는 이 부회장은 바이든 대통령으로선 ‘귀한 몸’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 부회장은 이미 지난해 11월 170억달러(약 20조원)를 투자,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신규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공장을 건설한다고 발표해 재계의 관심을 모은 바 있습니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해부터 최근까지 반도체 회의와 공급망 회의에 삼성전자를 잇달아 초청한 바 있습니다. 한국의 반도체를 아주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근거입니다.

반도체 공장이 외부인에게 제한적으로만 공개되는 1급 보안시설이라는 점에서 바이든 대통령이 이 부회장에게 느낄 협력의 의미는 더욱 큽니다. 방한 첫 일정으로 평택 반도체 공장을 방문한 선택이 단순히 삼성전자의 대미 투자에 대한 감사의 뜻을 전하기 위한 행보라는 분석도 있지만, 그 의미와 목적이 어떻든 대외적으로 이 부회장의 글로벌 리더십이 인정받고 위상은 올라간 결정이라는 사실은 분명해 보입니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22일 오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방한 숙소인 서울 용산구 그랜드 하얏트 호텔에서 열린 면담 자리에서 영어 연설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22일 오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방한 숙소인 서울 용산구 그랜드 하얏트 호텔에서 열린 면담 자리에서 영어 연설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도 재계가 ‘심쿵’한 장면을 여럿 연출했습니다. 정 회장은 바이든 대통령의 방한 기간 동안 모두 105억 달러(약 13조3000억 원)의 대미 투자를 약속했습니다. 특히 정 회장은 바이든 대통령과 단독 회담 뒤 초대형 투자 계획을 단상에 서서 직접 브리핑했습니다. 바이든 대통령은 옆에 서서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이 모습을 지켜봤습니다. 바이든 대통령이 발표장에서 “땡큐”를 연발하는 모습은 백악관 유튜브를 통해 미국 전역에 생생하게 생중계됐습니다.

‘세계 대통령’으로 불리는 미국 대통령과 한국 재계 총수의 단독 회담. 정말 드문 일입니다. 30년 전인 1992년 2월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이뤄진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과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의 면담이 마지막 기록으로 확인됩니다. 정 회장은 바이든 대통령과 별도의 기념촬영을 하는 등 역사적인 ‘투 샷’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 부회장도 바이든 대통령과 흐뭇한 미소로 투 샷을 찍었습니다. 삼성전자와 현대차 그룹의 총수가 미국 대통령과 1대 1 기념촬영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국뽕’에 너무 취할 필요는 없습니다. 국내를 대표하는 ‘거상’이라곤 하지만, 이 부회장과 정 회장도 그저 희희낙락할 때가 아닙니다. 바이든 대통령의 “땡큐”에는 ‘숨은 그림’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이든 대통령의 이번 삼성 반도체 공장 방문은 자신 대신 이 부회장과 정 회장을 전면에 내세운 윤 대통령 못지않은 ‘세일즈 외교’라고 봐야합니다. 오는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있는 바이든 대통령은 이번 방한에서 자국 내 표심을 성공적으로 공략했습니다. 한미 기술동맹을 통해 핵심 안보 물자인 반도체의 안정적인 확보를 꾀해 긍정적인 여론을 얻은 것입니다.

특히 정 부회장으로부터 중간선거 최대 격전지인 조지아주에 55억 달러(약 7조원) 투자 약속을 받아낸 대목은 정치적 실리를 제대로 챙겼단 평가를 들을 만합니다. 바이든 대통령이 정 회장과 함께 연단에 서서 “첨단 자동차 기술에 대한 50억 달러가 넘는 투자와 조지아주 사바나에 55억 달러를 들여 짓는 공장이 내년 1월까지 8000개가 넘는 일자리를 만들 것”이라고 한 말은 미국 유권자들에게 들으라고 한 소리나 다름없습니다.

또 이미 지난해 텍사스주에 170억 달러를 투자하기로 발표한 이 부회장과 올해 굳이 만난 것도 강력한 라이벌로 떠오르고 있는 중국을 견제하고 동맹국 중심으로 반도체 공급망 재편을 추진하는 의도와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바이든 대통령은 이 부회장과 정 회장을 이용만 한 것일까요? 굳이 폄하할 필요는 없겠죠. ‘기브 앤 테이크’(Give and Take‧주고받기)는 외교의 원칙이자, 비즈니스의 상식입니다. 이 부회장과 정 회장이 경제·산업의 국가적 파트너로 올라선 것은 이미 윤 대통령이 ‘민간 주도 성장’이라는 국정철학의 밑그림을 그려가는 과정에서 철저히 사전에 계획하고 준비한 전략적 수단이 만들어낸 결과물입니다.

유창하고 세련된 영어로 삼성전자와 현대차그룹의 이름을 세계 만방에 알리며 막대한 대외적 이미지 제고 효과를 얻은 이재용‧정의선 두 총수는 생각보다 매우 노회했습니다. 미국 대통령과 손익을 따질 계산기를 두들길 만한 위상을 지닌 총수는 앞으로도 많지 않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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