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이 10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앞마당에서 열린 제20대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해 있다. 사진=연합뉴스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이 10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앞마당에서 열린 제20대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해 있다. 사진=연합뉴스

[데일리한국 안병용 기자] 문재인 전 대통령은 임기 종료를 앞두고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한 사면 ‘초읽기’에 돌입한 듯한 모습이었지만, 문득 바둑이 생각났던 모양입니다. 그는 사면 결정을 내리는 문제를 ‘바둑돌’에 비유하며 ‘장고’ 끝에 손에 쥐고 있던 패를 끝내 꺼내지 않았습니다. 사면 찬성 여론에 휩쓸려 자칫 잘못된 결단을 내리면 차기 정권에서 더 잘 풀릴 수 있는 문제를 현 정부가 꼬이게 만들 수도 있다는 ‘악수’를 읽은 겁니다.

문 전 대통령의 입장에선 ‘자충수’를 피한 모양새입니다. 그는 임기 끝까지 ‘만년패’ 형국을 유지했습니다. 이로써 이 부회장 사면 문제를 둘러싼 또 다른 형세가 형성됐습니다. 글로벌 경제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재계에서 뜨거운 감자로 대두된 이 부회장 경영 복귀 문제는 윤석열 대통령의 결정에 맡겨졌습니다. ‘꽃놀이패’를 쥔 윤 대통령은 가석방으로 반쪽 경영 중인 이 부회장에게 사면이라는 선물 보따리를 과연 풀까요?

이를 위해선 먼저 산업 여론을 주도하는 경제단체를 중심으로 한 재계가 이 부회장에게 사면이 필요하다고 대통령에게 요청하는 까닭을 구체적으로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 부회장은 사면을 받지 않은 상황인 현재도 가석방 신분으로 조 단위 5G 통신장비 공급 계약을 성사시키는 등 사회에서 멀쩡하게 총수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석방은 형기가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형기 내 재범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조건 아래 임시로 풀어주는 행정 처분입니다. ‘형 면제’가 아닙니다. 이 부회장은 형기가 종료되는 오는 7월18일까지 국내외 모든 동선에 제한이 따릅니다. 형기가 끝나도 특별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5년간 취업제한을 받아 경영 참여가 불가능합니다. 취업 제한으로 등기 임원을 맡을 수 없어 경영 보폭이 좁으면 삼성의 수많은 경영 현안을 세심히 챙길 여력이 부족해지는 것입니다.

사면은 가석방보다 한 발 더 나아갑니다. 형벌에 대한 선고의 효력 또는 공소권 상실, 형 집행을 면제시킵니다. 국가원수의 고유 권한입니다. 사면에는 그 대상 범위와 성격에 따라 일반적인 사유에 해당하는 일반사면과 특정인을 대상으로 하는 특별사면이 있습니다. 이 부회장을 풀어주는 문제는 특사에 해당합니다.

일반사면은 국회 동의라는 까다로운 요건이 있어 대통령으로선 특사가 정치적으로 활용하기 용이합니다. 특사는 주로 대통령 취임, 석탄‧성탄일, 광복절, 삼일절 등을 기념해 실시합니다. 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 전 대통령이 ‘취임 기념’ 사면을 진행한 전력이 있습니다. 갓 취임한 윤 대통령 역시 지금 당장 사면 결단을 내릴 명분이 있는 것입니다. 취임 초가 아니라면 다음 특사 시기는 8월15일, 광복절이 유력합니다.

문 전 대통령으로부터 사면을 거부당한 재계는 윤 대통령에게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윤 대통령이 동반자로 생각해주길 바라는 재계의 희망은 아직까지는 헛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사면 모양새가 갖춰져 가고 있습니다. 윤 대통령은 취임식에 이 부회장 등 주요 재계 총수들과 경제단체장들을 초청하며 민간주도 성장의 신호탄을 쏜 상태입니다. 이를 이 부회장 사면을 염두에 둔 ‘포석’으로 분석하는 시각이 상당합니다.

윤 대통령은 정말 이 부회장의 사면을 벼르고 있을까요? 우선 두 사람의 관계를 살펴보죠. 사실 윤 대통령과 이 부회장은 어색한 사이입니다. 아니, ‘악연’이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2016년 말 국정농단 사건을 수사한 박영수 특별검사팀은 ‘이재용 특검’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이 부회장의 뇌물 혐의에 대한 수사에 집착했었는데요. 이 부회장에게 뇌물 혐의를 적용해야 한다고 가장 적극적으로 주장한 인물이 바로 당시 윤석열 수사팀장으로 전해집니다.

2020년 6월 이 부회장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도 당시 윤석열 검찰총장의 재가를 받아 이뤄진 일입니다. 이에 따라 차후 윤 대통령이 이 부회장의 사면 문제에 대해 어떤 결단을 내릴지는 ‘친기업’을 표방하는 윤석열 정부의 경제정책을 알 수 있는 풍향계 역할을 할 것으로 관측됩니다.

하지만 이는 윤 대통령의 자기부정과 연결될 수 있다는 점에서 간단한 일은 아닌 듯 싶습니다. 물론 국정농단 사건으로 중형을 받았던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죄송하다”라고 사과했던 일을 이 부회장에게도 되풀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 사과를 하며 개인적인 사안으로 재단하기엔 비선으로 정부 시스템을 무너뜨린 국정농단 사건의 무게는 너무 무거워 보입니다. 윤 대통령의 사과 이후 탄핵을 부정하는 것이냐는 비판의 목소리가 컸습니다. 흔히들 ‘복기’는 유리할 때보다 불리할 때 더욱 필요하다고 합니다.

한때 칼을 겨누고도 필요하면 머리를 조아리고 용서하는 게 정치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나, 넘지 말아야 할 선은 있지 않을까요. 수사 당시 격정에 끓어오르던 검사의 명예는 윤 대통령이 ‘사활’을 걸어야 할 문제가 아닐까요. 윤 대통령이 선택해야 할 ‘악수’와 ‘묘수’는 가까이에 있습니다.

재계는 이 부회장의 손발에 묶인 줄을 풀어달라고 절박하게 외칩니다. 삼성의 경쟁력 악화가 국가 경제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이유입니다. 실제 경쟁사들은 삼성전자의 숨통을 바짝 죄고 있습니다. 대만의 반도체 기업 TSMC는 글로벌 대형 고객사 파운드리 수주를 쓸어 담고 있습니다. 미국의 인텔은 자국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습니다. 이 같은 이유로 재계 일각에선 정부가 삼성전자에 ‘덤’(이재용 사면)을 줘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바둑은 바둑판의 한 부분에서 출발해 전역으로 전투가 확대됩니다. 처음부터 바둑판 전체를 염두에 두고 돌을 놓아야 하는 까닭입니다. 형평성 문제가 제기될 여지가 큰 특사는 윤석열 정부의 국정 과제인 공정‧상식과 밀접한 문제입니다. 윤 대통령은 사면이라는 ‘대마’를 잡기 위해 어떤 첫수를 둘까요. 문 전 대통령의 ‘바둑돌’ 언급이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에 더욱 의미심장하게 다가옵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데일리한국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