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세 데뷔·20세 부소니 우승·50세 라흐마니노프 음반발매

“피아노는 내게 산소같은 존재다” 9월26일 스페셜 콘서트

데뷔 50주년을 맞은 피아니스트 서혜경이 17일 예술의전당 기자간담회에서 “마치 성악가들이 노래하듯이 피아노를 연주하고 싶다”고 밝히고 있다. 사진=리음아트앤컴퍼니
[데일리한국 민병무 기자] #1.데뷔. 열한 살 때다. 1971년 7월 3일, 명동국립극장(현 명동예술극장)에서 국립교향악단(현 KBS교향악단)과 협연해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을 들려줬다. 영화 ‘엘비라 마디간’에 흐르던 가슴 시린 음악으로 세상에 이름 석 자를 알렸다. 5세에 처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해 6년 만에 프로 세계로 들어선 셈이니, 역시 될성부른 떡잎이었다.

#2.부소니콩쿠르. 스무 살 때다. 1980년 세계적 권위를 자랑하는 이탈리아 부소니 국제피아노 콩쿠르에 출전했다. 세계인의 눈에는 아직 대한민국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 모르던 시절이다. 한국인 최초로 1위 없는 2위로 최고상을 받았다. 그의 우승은 동양인이 철저히 무시당하던 세계 클래식 음악계를 뒤흔든 ‘사건’이었다.

#3.라흐마니노프. 2010년 여류 피아니스트 최초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전곡(5곡)을 세계적 클래식 레이블 도이치 그라모폰(DG)에서 발매했다. 쉰 살 때다. 알렉산더 드미트리예프가 지휘봉을 잡고 상트 페테르부르크 아카데믹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연주했다. 폭발하는 에너지와 카리스마, 그리고 다채로운 선율을 앞세워 당당히 ‘노란 딱지’의 주인공이 됐다. 이후 2012년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전곡을, 2016년 네빌 마리너가 지휘하는 아카데미 오브 세인트 마틴 인 더 필즈(ASMF)와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을, 2019년 드뷔시·리버만·무소르그스키의 곡들을 수록한 ‘피아노로 그리는 그림’ 등의 앨범을 잇따라 DG를 통해 선보였다.

데뷔 50주년을 맞은 피아니스트 서혜경이 17일 예술의전당 기자간담회에서 “마치 성악가들이 노래하듯이 피아노를 연주하고 싶다”고 밝히고 있다. 사진=리음아트앤컴퍼니
“56년간 피아노를 쳤습니다. 피아노는 제게 산소와 같아요. 피아노가 없는 인생은 상상이 가지 않아요. 이제 피아노가 바로 제 몸입니다.” “마치 성악가들이 노래하듯이 피아노를 연주하고 싶어요. 로맨틱하게, 오센틱(authentic, 진짜의)하게요.”

이제 예순한 살이다. 산전수전에 공중전까지 겪었으니 이쯤에서 다시 한번 정리를 해줘야 할 시기다. 올해 데뷔 50주년을 맞은 1세대 피아니스트 서혜경이 오는 26일(일) 오후 5시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러시아후기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라흐마니노프의 곡들로 스페셜 콘서트를 연다.

약 2년 만에 국내 무대에 서는 그는 17일 예술의전당 기자간담회에서 “아직 더 배울 게 많은데 데뷔한 지 벌써 반세기가 됐다니 감회가 새롭다”며 “나이가 들면서 음악에 제 인생이 묻어나는 걸 느끼는데 확실히 젊었을 때와는 다른 깊이가 생기는 것 같다”고 소회를 밝혔다.

이번 공연에서는 특히 러시아와 인연이 있는 20대 후배 피아니스트 두 명이 함께한다. 여자경 강남심포니 상임지휘자가 이끄는 유토피안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맞춰 ‘러시아 피아니즘’의 거장으로 불리는 엘리소 비르살라제의 제자인 차세대 피아니스트 윤아인(25)과 열여섯 살에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3위를 차지한 러시아 출신 신예 다니엘 하리토노프(23)도 무대에 오른다. 서혜경은 마지막 순서에 나와 장대한 길이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을 협연한다.

라흐마니노프의 곡들로만 연주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꽃길만 걷는 인생이 어디 있을까. 서혜경은 2006년 유방암 판정을 받았고 오랜 시간 불굴의 의지로 병을 이겨내며 완치했다.

“오른쪽에 암이 두 덩어리가 있었습니다. 영영 오른손을 못 쓰는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 아닌지 무서웠습니다. 우울증이 왔어요. 연습도 제대로 못한 채 1년 6개월을 투병하다 ‘그동안 연습 저축한 게 있는데 못할게 뭐야’하면서 무대에 섰는데 생각보다 잘해 냈어요. 그때 연주한 레퍼토리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과 3번’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였어요.”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힘을 준 고마운 곡이니 당연히 ‘아이 러브 라흐마니노프’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라흐마니노프 콘체르토는 피아니스트들에게 에베레스트산 같은 누구나 오르고 싶은 곡이다. 러시아에선 연주하기 너무 어렵고 까다로워 ‘코끼리 협주곡’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다. 그만큼 가장 도전적인 곡이기 때문에 (이번에도) 트라이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데뷔 50주년을 맞은 피아니스트 서혜경이 17일 예술의전당에서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사진=리음아트앤컴퍼니
유독 러시아 작곡가를 좋아하는 이유를 묻자 “러시아 노래엔 민요가 섞여 있다. 라흐마니노프의 곡에는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향수와 아픔이 들어있다. 화려하면서도 슬프다. 그게 우리 한민족의 한과 닮았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스트라빈스키, 쇼스타코비치, 차이콥스키 등도 너무 좋다”고 덧붙였다. 그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한명만 꼽아 달라고 요청하자 “저는 한 남자만 사랑하지 못해요. 그 때는 그 분이 좋고, 이 때는 이분이 좋다”고 재치 있게 답변해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후배 칭찬도 빠뜨리지 않았다. 얼마 전 열린 부소니 콩쿠르에서 박재현과 김도현이 1위와 2위를 차지한 것에 대해 “너무 자랑스럽다. (내가 수상했던) 그 시절에는 아시아인이 굉장히 무시당하던 때였다. 설움이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많은 사람들의 노력 덕분에 인식이 많이 바뀌었다”라며 “세계적인 콩쿠르에서 순위권에 든다면 사실상 모두 우승자나 다름없다. 국제 콩쿠르가 디딤돌이 돼 세계로 뻗어나가길 바란다. 두 사람에게 박수를 보내며 앞으로 큰 역할을 기대한다”고 격려했다.

서혜경은 다음달 16일에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개최하는 한러수교 30주년 기념음악회에 참가해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3번과 파가니니 주제 랩소디를 협연한다.

사실상 ‘한국 대표’로 참여하는 것인데, 오랫동안 러시아 음악계와 끈끈한 관계를 이어왔기 때문에 러브콜을 받은 것이다. 첫 인연은 198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울올림픽 문화축전 기간 중 처음 내한한 모스크바필하모닉오케스트라와 프로코피예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을 협연했다. 이 공연은 냉전 이후 굳게 닫혔던 러시아와 최초로 펼친 문화예술 교류다.

열렬한 반응에 힘입어 이듬해 내한공연에서 모스크바필하모닉은 다시 서혜경을 불러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3번을 함께 연주했다. 1990년 한러 수교 이전에도 이처럼 러시아 예술인들과 꾸준히 교류해 그야말로 한국과 러시아 문화예술을 잇는 메신저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서혜경은 코로나19 때문에 음악회가 취소되는 상황에서도 음반 발매활동을 쉬지 않았다. 올 1월 ‘Rachmaninoff Sonata No. 2, Preludes, Etude Tableaux’를 유니버설뮤직을 통해 선보였다.

오는 23일에는 멘델스존의 ‘Rondo Capriccioso Op.14’, 파데레프스키의 ‘Menuet in G, Op.14 No.1’, 라흐마니노프의 ‘Rhapsody on a Theme by Paganini Op.43 Var.18’ 등이 담긴 앨범 ‘My Favorite Works’(소품들)를 발매한다.

서혜경은 데뷔 50주년을 맞아 콘서트, 음반발매 등으로 자신의 음악인생을 다시 뒤돌아보고 앞으로 한발짝 더 나아가기 위해 도약하고 있다. 그는 “성악가처럼 노래하듯이 연주해 관객의 마음을 울리고 아픈 곳을 치료해 주는 피아니스트로 남고 싶다”며 “건강만 유지 된다면 50년은 더 피아노를 치고 싶다”는 속내를 밝혔다. 앞으로 그의 멋진 연주를 50년 더 들을 수 있다니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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