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름은 살이 되지 않는다. 짜내야 한다. 고름의 운명이다.

나는 오늘도 법정을 나오며 재판부를 향해 목례를 한다.

법무법인 동안 조민행 대표 변호사.
[데일리한국 전문가칼럼=조민행 법무법인 동안 대표 변호사] 몇 해 전 한 언론인과 관련한 민사소송에서 소송대리인이 된 적이 있다. 그분이 쓴 기사를 문제 삼아 제기된 재판의 변론을 맡은 것이다.

변론을 마치고 법정을 나오며 평소대로 재판부를 향해 고개를 가볍게 숙이며 목례를 했다. 나중에 판결이 확정되고 의뢰인과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그 분이 망설이듯 머뭇거리며 물었다. “조 변호사, 이상한게 하나 있는데..."라며 그 분이 운을 뗐다. "판사가 후배이고 나이도 훨씬 어려보이는데 왜 머리 숙여 인사를 했나요?”

아마도 그분은 재판정에 들어가고 나오면서 자신의 변론을 맡은 변호사가 판사를 향해 머리를 숙이는 것이 비굴하게 보였나 보다. 목례(目禮)란 눈으로 하는 가벼운 인사를 말한다. 변호사가 법정에 들어가거나 나갈 때 재판부를 향해 가볍게 목례를 하는 것은 오랜 관행이다. 재판을 진행하는 법관 개인에 대한 존경심의 표현이라기보다는 법정에 대한 경외감의 표시이기 때문이다.

1948년 제헌 헌법은 권력분립주의를 채택해 국가권력을 입법·사법·행정의 삼권으로 분립시켜 별개의 국가기관이 담당케 했다. 권력기관 사이의 상호 견제와 균형을 통해 국가권력 행사의 남용을 방지한다는 취지였다. 이에 따라 ‘사법부 독립’은 우리 헌정사에서 아홉 차례나 헌법개정을 거치는 와중에도 지금까지 일관되게 유지되고 살아남은 훼손할 수 없는 하나의 원칙으로 자리매김되기에 이르렀다.

최근 사법부를 바라보는 국민의 시선은 싸늘하기만 하다. 현재 사법부는 만신창이고 지리멸렬해 보인다. 그 누구의 탓도 아니다. 사법부가 스스로 독립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기는 커녕 헌법이 부여한 ‘사법부 독립’ 이라는 전가의 보도로 스스로를 자해한 매우 이례적인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최근 언론은 ‘사법농단’이라는 주제아래 상고법원 도입을 위해 청와대와 재판거래 시도, 법조계에 대한 사찰, 법원 내부의 비판적 판사들을 대상으로 한 이른바 ‘블랙리스트’ 작성 등 일련의 기사들을 쏟아내고 있다.

또한 검찰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인 2015년 대법원이 만든 각급 공보관실 운영비가 현금화 돼 비자금처럼 사용됐다고 판단해 수사에 열을 올리고 있다.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에 대한 공소장에 의하면,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에 연루된 전·현직 법관이 무려 93명에 달한다고 한다. 이미 전직 대법관 3명이 검찰 청사 앞에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또 다른 전직 대법관은 비공개 소환 통보에 두 차례 불응해 검찰은 구속영장 청구, 압수수색 등 강제수사를 검토하고 있다. 법원으로서 수치스러운 일은 이게 전부가 아니다. 검찰의 칼끝은 이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향하고 있다.

근대 시민국가 성립 이후 사법부 수장이 전쟁이나 혁명기를 제외하고 정치범이 아닌 일반 형사범으로 검찰의 수사를 받았다는 것은 필자로서는 금시초문, 미증유의 사건이다. 우리는 이제 사법부 수장이 수사를 받게 되는 뉴스를 접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럴 경우, 문명국가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역사적인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렇게 만신창이가 된 사법부에 정녕 아무런 희망이 없는 것일까? 이탄희 판사는 2017년 2월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 제2심의관으로 발령 난 이후 “행정처 컴퓨터에 판사를 뒷조사하는 파일이 있다” 는 말을 듣고 이에 반발해 사표를 제출했다. 이 일이 발단이 되어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이 언론에 폭로됐고, 대법원 구중심처(九重深處)의 비밀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됐다.

최근에는 서울고등법원 판사가 유명을 달리하는 사건도 불거졌다. 일요일 야근을 마치고 다음날 새벽 귀가했다가 쓰러진 채 발견돼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결국 사망했다는 것이다. 한 판사는 이에 대해 “가정사와 업무를 모두 꼼꼼하고 성실하게 챙기려다 너무 과로한 탓에 이런 일을 당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너무 안타깝다”는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다. 2016년 기준 법원에 접수된 본안사건은 총 152만3108건으로, 2,842명 판사 1인당 연간 535건의 사건을 처리한 셈이다. 본안 외 사건과 비송사건을 포함하면 실제 처리 건수는 더욱 많을 것이다. 실로 살인적인 업무량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사법부에는 불법에 단호하게 ‘NO' 라고 말하는 소신 있는 법관, 살인적인 업무량에도 불구하고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피로 판결문을 쓰는 법관들이 있기에 대한민국 사법부의 미래는 밝다.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에 출현한 이후 인류가 지금까지 찾아낸 최선의 분쟁 해결절차는‘독립된 법원에 의한 재판’이라고 믿는다. 우리 헌법의 기본 원칙인 ‘권력분립’ 이나 ‘사법부 독립’ 은 그 자체가 지고지순한 목적은 아니고,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최대한 보장하기 위한 수단적 가치에 불과하다. 최근 사법농단 사태의 근본 원인은 사법부가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조직이익을 위해 사법권을 행사했기에 빚어진 일종의 참사다.

최근 법원과 국회에서 사법농단에 관여한 법관들에 대한 탄핵 논의가 활발하다. 찬반 양론이 있지만 무엇이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최대한 보장할 수 있는지가 판단의 기준이 돼야만 한다. 필자는 어려서 비둘기를 잡는다고 지붕에 오르다가 다친 적이 있다. 할머니께서 내 다리에 난 종기를 보며 말씀하셨다. “고름은 살이 되지 않는다. 고름은 짜내야 한다!”

국민은 자신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오늘도 경향 각지의 법원 문을 두드린다. 작금의 사법농단 사태에도 불구하고 재판은 계속돼야만 한다. 고름을 짜내야만 새살이 돋는다는 평범한 진실도 새삼 떠올려본다. 나는 오늘도 법정을 나오며 재판부를 향해 목례를 한다. 법정에 대한 존경과 경외심을 끝내 지키겠다는 결연한 마음으로...

■ 조민행 법무법인 동안 대표변호사

고려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직에 근무했고, 사법시험도 통과해 현재 법무법인 동안의 대표 변호사로 재직중이다. 대통령 직속 북방경제협력위원회 위원과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대변인으로 활동하면서 남북 분단시대를 극복하고 한반도의 새로운 세계를 여는데 기여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한반도종단철도(TKR)가 시베리아횡단철도(TSR), 중국횡단철도(TCR)와 연결돼 남북경협과 북방경제협력이 본격화되는 날을 꿈꾸는 '실천적 이상주의자'로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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