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알'이 아니라 '느티나무' 리더십으로
영·미처럼 100년 정당 뿌리내려야
대신에 바꿀 것은 확실히 바꿔야

김광덕 인터넷한국일보 뉴스본부장
[김광덕 뉴스본부장 칼럼] “당이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했다. 60년 전통의 뿌리만 빼고 끊임없이 혁신해서 바꿔야 한다. 집권을 꿈꾼다면 환골탈태를 말 그대로 실천해야 한다.”

17일 오후 TV에서 그럴듯한 메시지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박영선 새정치민주연합 국민공감혁신위원장 겸 원내대표였다. 며칠 동안 잠적하면서 탈당설까지 흘렸다가 회군한 박 원내대표의 기자회견이었다. 구구절절 맞는 말이다. 반드시 당이 실천해야 하는 메시지이다.

박 원내대표는 “그동안 저의 잘못에 분노하신 분들은 저에에 돌을 던지라”는 말까지 했다. 비장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진정성은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특히 방송 앵커식으로 또박또박 끊어 액센트를 주면서 원고를 읽는 모습에서 더욱 그랬다.

박 원내대표는 18일 국민공감혁신위원장(비대위원장)직을 내놓았다. 새 비대위원장으로는 무난한 카드인 문희상 의원이 선출됐다. 박 원내대표는 머지않아 원내대표직에서도 떠나야 한다. 박 원내대표는 취임 이후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기 때문에 언젠가는 지도부에서 떠나야 할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비대위원장에 취임한 지 한 달 보름도 안돼 중도하차하는 풍경은 분명히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새로 뽑히는 야당 대표는 27번째, 세계 신기록?

필자는 지난해 4월 민주통합당의 대표 경선을 앞두고 ‘24번째 대표 뽑는 민주당이 살 길은’이란 제목으로 칼럼을 썼다. 필자는 당 지도부의 잦은 교체가 민주당 위기의 주요 요인이라고 진단한 뒤 “몇 달 안 돼 25번째 선장을 뽑는 촌극은 이제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고 썼다. 이같은 우려에도 불구하고 김한길 대표가 선출된 뒤 새정치민주연합이 창당되고 김한길-안철수 공동대표에 이어 박영선 비대위원장까지 지도부 교체가 이어졌다. 이제 새로 뽑힌 문희상 새정치민주연합 비대위원장은 27번째 대표인 셈이다. 결국 최근 10여년 동안 당 대표의 평균 임기는 채 6개월도 안된다.

새정치민주연합의 지도부는 왜 이렇게 자주 바뀌었을까. 이부영 새정치연합 상임고문은 최근 필자와의 통화에서 "2003년 이래 당 지도부가 26번이나 바뀌다 보니 당 리더로서 제대로 일을 해 보지도 못하고 낡은 얼굴이 된 사람이 많다"며 "계파로 쪼개져 있는데다 숙성된 리더를 만들어 내지 못해 야당의 중심이 계속 흔들렸다“고 진단했다.

강경파의 지도부 흔들기, 모래알 리더십 악순환

결국 야당 지도부의 잦은 교체는 '큰바위 얼굴'과 같은 리더의 부재와 끊임없는 계파 싸움에서 비롯됐다. 실제로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당에서 손을 뗀 뒤 춘추전국시대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새정치연합은 선의의 경쟁을 통해 동네의 느티나무처럼 웬만한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리더를 만들어냈어야 했다. 하지만 결과는 바람이 불거나 파도가 밀려오면 흩어지는 '모래알' 지도부를 만들었을 뿐이다. 또 상대 계파 출신의 지도부를 무조건 흔들어대는 강경파 득세의 악순환이 새정치연합을 모래알과 콩가루 집안으로 만들었다. 칼로 일어난 자가 칼로 망한다는 말이 있다. 마찬가지로 강경 투쟁으로 지도부를 흔든 사람이나 세력들은 결국 강경파의 공격으로 밀려나게 된다. 이같은 사례는 동서고금에서 무수히 찾을 수 있다.

박 원내대표도 이번에 강경파들의 시위에 밀려나면서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박 원내대표가 “당을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는 깊은 고민”을 거론하면서 당내 강경파를 겨냥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가 과거에 ‘전사’처럼 강경한 행태를 보였던 모습이 오버랩됐다.

야당 지도부의 잦은 교체는 야권뿐 아니라 국민 전체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야당 지도부의 리더십이 굳건하지 않으면 대화와 타협의 정치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새정치연합은 바꿔야 할 것은 바꾸지 않고, 자주 바꾸지 말아야 할 것은 너무 자주 바꿨다. 그야말로 거꾸로 행태였다. 새정치연합은 당권을 겨냥한 계파 싸움을 끝장내야 한다. 또 서민과 중산층을 위한 구체적 정책을 제시하는 대안 정당, 실력 정당으로 거듭나야 한다. 이를 위해 끊임 없이 바꾸고, 혁신하고, 환골탈태해야 한다.

야당 당명도 10년 사이 7번… 영·미의 100년 정당과 대비

대신에 자주 바꾸지 말아야 할 것은 지도부와 당명이다. 새정치연합은 그동안 당명도 너무 자주 바꿔 왔다. 2003년 이후에도 야당 본류의 명칭은 새천년민주당-열린우리당--대통합민주신당-통합민주당-민주당--민주통합당-새정치민주연합 등으로 변화해 왔다. 한 정치학자는 “아마도 세계 정치사에서 우리 야당만큼 당명과 지도부가 자주 바뀐 사례는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당의 옷을 자주 갈아입은 게 세계 신기록이란 얘기다.

민주당의 잦은 당면 변경사를 보면서 영국과 미국의 ‘100년, 200년 전통의 정당’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영국에서 보수당은 1834년, 노동당은 1900년에 창당됐다. 미국에서도 민주당은 1828년, 공화당은 1854년에 만들어졌다. 우리나라의 여야 정당들도 100년 정당으로 나아가야 ‘정당 책임정치’ ‘의회민주주의’가 제대로 뿌리내릴 수 있는 것이다.

새정치연합도 알기 쉽게 ‘민주당’으로 당명을 정해 수십년 동안 이어졌으면 한다. 그게 정체성에도 어울린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일부 정치인이 21일 군소정당인 ‘민주당’을 창당한다는 뉴스를 접했다. 새로 출범하는 새정치연합 비대위는 당명에 대한 논의를 잘해서 수명이 오래가는 정당을 만들었으면 한다. 정당 책임정치를 위해 여야에 주문하고 싶은 점은 두 가지다. 모래알 리더십이 아니라 느티나무 리더십, 큰바위얼굴 리더십을 만들어내야 한다. 또 100년 가는 정당으로 뿌리내리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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