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호지나루터

대호지아리랑 표제.
[대전=데일리한국 이광희 기자] 대호지면은 당진시의 북서부에 위치한 작은 면이다. 대호방조제가 막히면서 삼면이 호수로 둘러싸였다. 방조제가 막히기 전에는 대호만이 그곳을 막고 있었다. 사면 가운데 3면이 만으로 막힌 오지였다.

1919년 그곳에서 독립만세운동이 벌어졌다. 하지만 관심을 기울인 사람은 많지 않았다. 당시에는 전국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독립만세운동이 벌어졌다. 그 형태도 대동소이했다. 이야기도 비슷했다. 이런 탓에 그 지역의 만세운동이 눈에 뜨이기가 쉽지 않았다. 지난해 3.1독립만세운동 101주년을 맞아 충남지역 만세운동 자료를 접할 기회가 있었다. 각 지역의 자료를 파악해 보았다. 그러다 눈에 뜨인 게 4.4 대호지 천의장터 독립만세운동이었다. 이 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4월 4일 대호지면과 정미면 천의장터에서 발생한 독립만세운동이다.

대호지 면사무소 앞에 집결한 주민들이 8㎞정도 떨어진 정미년 천의장터까지 걸어가면서 시위를 벌였다. 외형으로 보면 한 공간에서 시위를 벌인 것이 아니라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면서 시위를 벌인 것이 특이했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남다르다. 먼저 지극히 체계적이고 조직적이었다는 점이다. 다른 지역의 만세운동은 다소 우발적이거나 일부 체계적이라 할지라도 기획되어서 움직인 경우는 흔치 않다. 하지만 대호지 독립만세운동은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되고 대단히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연락책이 만들어지고 선봉행동대가 짜여졌다. 그들을 통해 시위에 대한 정보가 사전에 유포되고 선동되어서 만세운동이 구성되었다.

또 면사무소 직원들이 중요 구성요소로 독립만세운동을 기획했다. 당시 면사무소는 조선총독부의 최 말단 행정조직이었다. 따라서 독립만세운동이 발발하지 않도록 감시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했다. 이에 따르지 않는 주민들을 경찰에 고발하는 역할도 서슴지 않았다. 심지어 일부지역 면장은 일본경찰에 주민들을 향해 총을 난사하라고 주문했다.

그런 마당에 대호지면사무소는 직원들이 앞장서서 주민을 동원하고 그것을 전파했다. 그것도 모자라 선동했다.

면사무소 소사였던 송재만은 행동대장으로 가장 앞장서서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조직을 짜고 전파하며 거사의 길목마다 항일의 기치를 높이 쳐들었다. 총질을 하는 일본 순사를 향해 짱돌을 던지며 대들었다.

여기에 당시 면책임자였던 이인정 면장은 말을 타고 앞장서서 시위군중을 이끌었다. 다른 지역 면장들이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한데 반해 그는 도리어 가장 앞장서서 조선독립의 필요성을 주창하고 주민들에게 적극적으로 동참할 것을 몸소 보여주었다.

지역의 부호인 남주원은 독지가로서 만세운동에 선도적으로 참여했다. 동시에 거사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하는 등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다.

일제의 감시가 엄중한 시절에 대부호로서 만세운동에 나서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재산을 풀어 그 일을 뒷받침하기는 결코 쉽지 않았다. 또 그 많던 전답을 팔아 이들의 변호사비용을 댄 것으로 전하고 있다. 그는 스스로 그 가시밭길을 걸었다.

여기에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주민들은 스스로 선서했던 만큼 집회 시위의 비밀을 지키려 노력했다. 거사가 발생하고서야 상황이 파악될 정도로 주민들의 보안의식이 탁월했다. 또 거사에 동참해서도 보다 적극적으로 시위에 가담했다. 지도부의 지휘에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주었다. 시위를 가로막는 일본 순사들을 군중의 힘으로 무력화 시켰다. 또 정미면 천의주재소를 파괴했다.

만세시위가 끝나고 난 뒤에도 밤에는 산에 올라 횃불로 시위를 계속했다. 애국가사를 자체적으로 만들어 주민들에게 배포하고 민족혼을 불 질렀던 것도 특이하다. 한운석 훈장은 격문형식의 애국가사를 만들어 제공했고 면서기들은 그것을 등사하여 주민들에게 배포했다.

‘살아서는 설 곳이 없고, 죽어서는 묻힐 땅이 없다.’고 일제치하 민족의 처지를 적극적으로 설파했다. 이로써 민중들이 독립 의지를 불태우도록 선동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독립만세운동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했다..

물론 독립만세운동으로 인한 고난은 말할 것도 없다. 작은 면에서 무려 200여명의 선인들이 혹독한 고초를 당했다. 이 가운데는 1명이 참살당하고 3명이 옥에서 순직했다.

또 35명이 많게는 징역 5년에서 적게는 징역 8개월의 실형을 살았다. 70명에 달하는 주민들은 3일에 걸쳐 태형 90대를 맞았다. 말이 태형 90대지 우신매라고 불리는 매로 맨살 볼기를 90대나 맞은 것이었다. 이 때문에 20여명의 주민들이 매독을 이기지 못해 집으로 돌아와 두어 해를 살다 죽어나갔다. 대부분 젊은이들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가담자들은 가혹한 고문에도 끝내 사실을 터놓지 않아 기소유예 됐다. 또 일부는 전국으로 떠돌며 도망을 다니다 기소중지 됐다. 어렵고 힘든 시절 그 고초가 얼마나 컸을 거란 점은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나머지 주민들도 실형은 살지 않았지만 가담자를 이실직고 하지 않는다며 가혹한 고문을 당했다. 이런 저런 일로 면민 전체가 고초를 겪었다.

이런 사실을 접하고 4.4 대호지. 천의장터 독립만세운동을 문학 작품으로 승화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숭고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문학작품으로 만들어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또 더 많은 사람들이 이를 통해 이 나라를 왜 사랑해야 하는지를 각인시키고 싶었다.

오늘 우리가 보내는 이 평범한 일상이 그 누군가에게는 참으로 고통의 시간이었음을 일깨우고 싶었다. 그들을 기억하고 그분들의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싶었다. 이런 저런 바람에 1년여 동안 자료를 발굴하고 작품을 썼다. 자료를 구해 읽고 현지를 취재하면서 눈물지은 날이 여러 날이었다.

대호지나루터에 나가 앉아보고 또 그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맛보았다. 남주원 선생의 집터로 추정되는 곳도 둘러보았다.

의령남씨의 고향인 도이리 남유, 남이흥 장군의 묘소와 그 주변에 기대어 보기도 했다. 대호지나루터에서 남주원 선생의 집터를 지나 조금리로 이어지는 길도 둘러 보았다. 대호지면사무소를 방문하고 그 주변의 기운도 느꼈다.

면사무소에서 정미면 천의장터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찬찬히 바람을 쏘였다. 100여 년 전 그곳을 스쳐갔을 많은 분들의 땀 냄새도 맡아 보았다. 그분들의 눈물과 아픔에 고뇌의 밤을 새면서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이 선인들의 피땀의 결과물이란 사실을 되짚어 보았다.

더욱 안타까운 일은 짧은 생애의 거의 모든 것을 조국에 바친 분들의 후손들이 상상 이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일제에 의해 집안이 몰락하면서 그 후예들은 빈손으로 고향을 지키거나 혹은 그곳을 등졌다. 고향을 지킨 이들도 소작농으로 전락하고 빈민으로 퇴락하면서 기억하기 싫을 만큼 힘든 고난의 역사를 살았다.

또 타향으로 떠난 이들 역시 등 붙일 곳 없는 낯선 곳에서 눈물겨운 삶을 이어왔다. 그렇게 100년의 세월이 지났다. 하지만 많은 후손들은 여전히 그날의 역사를 알지 못했다. 또 기억하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어떤 이들은 한 많은 삶을 물려준 그분들을 원망하기도 했다.

실제로 어떤 독립유공자의 후손은 배운 것이 없어 조상을 찾지 못한다고 하소연했다. 형제가 학교를 다니지 못할 정도로 가정이 어려워 조상을 찾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또 다른 이는 최근에야 먼 조상의 이야기로 흘려들었다는 이도 있었다. 특히 중요 인물로 평가되는 분의 외증손은 “아는 것이 없어 만나고 싶지 않다”고 전해왔다. 그들의 후손을 찾는 것조차 큰 일이 되었다. 이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작가는 그날의 거사를 통해 오늘을 되돌아보고 싶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평화로운 나날이 외침을 받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나라를 잃고 주권을 빼앗긴다면 또 어떠할까. 그런 나날은 영원히 우리에게 없을 것인가. 만에 하나 그렇게 된다면..... 생각조차 하기 싫지만 역사를 보면 그런 날들은 반복을 거듭한다. 가깝게는 일제에 빼앗겼고 거슬러 오르면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또 그 이전도 임진왜란이란 병난으로 7년의 세월을 고난 속에 살았다. 더 거슬러 오르면 숱하다.

그렇게 된다면 1919년 그날의 상황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을 것으로 짐작된다. 집회 시위의 자유는 물론 모든 자유가 속박 될 것이다. 짐작만 해도 끔찍하다.

때문에 그날의 함성과 그분들의 울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잊는 순간 우리도 그와 유사한 경험을 할 수도 있게 된다. 이를 명심해야 기에 아픔을 감내하며 '대호지 아리랑'을 집필하고 연재한다.

이 사실을 크게 알릴 수 있도록 도와주신 4.4 대호지 천의장터 독립만세운동기념사업회 남기찬 회장님, 의령남씨 종가 남주현 종손님, 호서고등학교 김남석 박사님, 그리고 이대하 선생의 손자 이원종 전 대전중구부구청장님, 송재만 선생의 자제 송우석 선생님, 천기영 국장님 등 많은 분들께 감사드린다. 2021.10. 이광희 데일리한국 기자. 소설가

대호지(大湖芝)아리랑 대호지·천의장터 4.4독립만세운동 위대한 영웅들 □ 목 차 1. 대호지나루터
2. 문초
3. 경성에서 분 바람
4. 불이 피어오르다
5. 지산 김복한 선생의 전갈
6. 독립선언서 배포
7. 대호지 남병사 댁
8. 싹이 트다
9. 천도교 거미줄 연락망
10. 명주에 수놓은 태극기
11. 제사 뒤풀이 날
12. 대호지면장 이인정
13. 거사모의
14. 남병사 댁 도련님과 소사
15. 생앓이손가락
16 더 큰 거사를 위해
17. 행동대장 송재만
18. 위대한 동지들
19. D-3 축제준비
20. D-2 4월 2일
21. D-1 4월 3일
22. 고등계형사 김학봉
23. 애국가사를 만들라
24. D-day 드디어 날이 밝았다
25. 행진, 거대한 용의 물결
26 천의장터의 함성
27 걷잡을 수 없는 물결
28. 일제, 무장병력 급파
29. 무기탈취
30. 해산
31. 구울미다리 복구작업
32. 영웅의 죽음
33. 색출
34. 분노에 불타는 산야
35. 모든 것을 내가했다
. 36. 취조실의 울분
37. 송재만, 징역 15년 구형
38. 천추의 한을 남긴 이름 민개현
39. 사람은 한번가면 다시 오지 않는다
40. 만기출소
41. 봄이 왔다


1. 대호지나루터

1933년 9월. 가을이었다. 파란 하늘이 눈부셨다. 보고만 있어도 행복했다.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다. 눈물이 나도록 보고 싶었던 파란 하늘이었다. 길게 숨을 들이켰다. 속이 시원했다. 바람이 달았다.

대호지나루터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짠맛 뒤로 단맛이 받쳤다. 매일 이곳에 나오는 사람만이 알 수 있었다. 천일염을 혀끝에 묻혀 오물거려보면 짠맛 끝에 단맛이 비치는 것과 흡사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화륜선이 오겠지.’

송재만은 그날도 화륜선에서 내리는 사람을 찬찬히 살펴볼 요량이었다. 무슨 색의 옷을 입었는지 머리모양은 어떤지 걸음걸이는 또 어떤지, 손에 무슨 가방을 들고 있는지… 사람을 기다리는 재미로 사는 사람처럼 늘 나루터에 앉아 있었다.

벌써 많은 시간이 흘렀다. 얼굴에 잔주름이 늘고 짧게 깎은 머리털에도 새치가 돋았다. 참나무로 깎아 만든 장대를 잡은 손마디가 굵어져 스스로가 생각해도 많은 시간이 지났음이 느껴졌다. 그는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지는 모르지만 오늘도 기다리고 있었다. “오겠지. 올 거야.”

혼자 말을 물고 중얼거렸다.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었다. 그의 소원은 그게 전부였다. 꿈에도 그리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늘 다시 올 거라고 스스로에게 주문처럼 뇌리에 각인시키고 있었다. 아니 뇌뿐만 아니라 살점을 촘촘히 누비고도 모자라 뼈마디 마디마다에 새겼다. 이제는 모든 몸의 골각이 기다림으로 물들어 있었다. 죽기 전에 꼭 한번은 보고 싶었다.

푸른 갈대가 스쳐 울었다. 바람이 불때마다 스락스락 소리를 냈다. 애잔한 그리움을 그렇게 표현하는 걸까. 그 사이로 대호지만의 잔물결이 둑 아래 철썩거렸다. 부드러운 어루만짐 같기도 하고 세월을 일깨우는 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송재만은 대호지만의 바람을 느낄 때 살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매일 이곳에 일처럼 나왔다. 몸도 많이 상했다. 옛날 같지 않았다. 참나무 장대에 기대어 서있는 자체가 고단했다. 나루터 구석자리에 앉아서 멀뚱하게 기다리는 것이 하루 일과가 되었다. 누군가 끌어다놓은 낡은 판자조각이 그의 자리였다. 옷깃을 여몄다. 바람 끝에 한기가 느껴졌다. 계절은 그렇게 지나고 있었다.

바다만큼 너른 만이지만 눈에는 손에 잡힐 듯 가까웠다. 마음뿐이지만 저 건너 운산나루까지 헤엄쳐 건너는 건 식은 죽 먹기 란 생각이 들었다.

대호나루터에서 송재만의 집까지는 오리쯤 되었다. 몸이 성치 않은 그에게 결코 짧은 거리가 아니었지만 살살 걸으면 걸을만했다. 뙤약볕이 쏟아지는 한 여름이나 태풍이 몰려오는 날, 지루한 장마가 이어지는 날, 그리고 매서운 한파가 살을 찢는 겨울이 아니면 나올만했다.

요즈음처럼 선들선들 바람이 부는 날에는 더없이 좋았다. 답답한 집에서 웅크리고 앉아 하루를 보내는 이보다는 훨씬 나은 선택이었다. 집 가까이에 대호지나루터가 있음은 송재만에게 행복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경성을 드나드는 포구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에게는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다름 아닌 기다리는 희망이었다. 누군가를 간절히 기다리는 곳이었다.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을 만들어 주는 곳이었다. 애틋한 그리움을 바람결에 날려 보내며 속을 달래는 그런 곳이었다. 힘겨운 일상을 사는데 큰 도움을 주는 곳이기도 했다.

인천에서 들어오는 화륜선은 하루에 딱 한번 이었다. 가는 편도 물론 딱 한번뿐이었다. 오는 배는 한나절이 지난 뒤였고 떠나가는 배편은 늦은 오후였다. 하루해가 중천을 지나면 어김없이 화륜선이 들어왔다.

‘오늘은 올런가.’ 이런 생각이 들 때쯤에 저 멀리 대호지만 어귀 쪽에서 검푸른 연기가 올라왔다. 그리고 좀 더 기다리면 화륜선이 거대한 몸을 띄우고 천천히 모습을 나타냈다. 연기가 몽실몽실 피어올랐다. 느릿느릿하게 잔잔한 대호지만을 헤엄쳐오는 모습은 그 자체로 장관이었다.

송재만의 예측은 정확했다. 마음속으로 올 때가 됐다고 생각할 즈음 저 멀리에서 검푸른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큰 굴뚝을 세운 화륜선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배는 저 멀리에서 점점 더 크게 미끄러져 왔다. 움직임이 보이지도 않았다. 그냥 너른 만 위에 가만히 떠 있는 듯이 보였다. 그래도 검푸른 연기가 옆으로 날리는 걸 보면 다가오고 있다는 증거였다.

멀리서 굵은 경적을 울렸다. “뚜, 뚜.” 사람이나 화륜선이나 나타날 때는 스스로 존재를 알렸다. 초등학교 교실만한 화륜선이 미끄러지며 선착장에 선수를 내려놓았다. 퉁퉁거리는 발동기 엔진소리에 가슴이 벌렁거렸다.

괜한 허세를 부리듯 화륜선은 나루터에 발을 묶고 불불 거렸다. 한동안 멀리 뒤꽁무니에서 물이 세차게 밀려갔다. 넙적하게 생긴 선수를 들이밀고 눈을 끔벅거렸다. 엉덩이가 넉넉한 녀석이 품세가 좋았다.

사람들은 갑판 뱃전에 계단을 내리고 그곳으로 걸어 나왔다. 잠시라도 빨리 내려오고 싶은 마음에 모두들 얼굴이 들떠 있었다. 손에 손에 짐들이 하나가득이었다.

송재만의 가슴이 널뛰듯 뛰었다. 고개를 빼고 혹시나 하는 생각에 자세를 바로잡았다. ‘어디…….’ 송재만은 침침한 눈을 들어 뱃전에 놓인 계단을 뚫어지게 올려다보았다. 그래도 아는 사람은 한눈에 알아보는 법이다. 내리는 사람들을 꼼꼼히 따져보았다. 큰 가방을 들고 내리는 사람. 머리에 보자기를 이고 내리는 아녀자. 잘 차려입은 학생, 중절모를 쓰고 흰 두루마기를 걸친 사내. 철없이 호호거리며 뛰어다니는 아이들, 인천을 다녀오는 장꾼까지…….

대호지나루터 마당이 갑자기 장마당처럼 부산스러웠다. 언제 왔던지 마중을 나온 사람들도 하나둘이 아니었다. 서로 반색하며 오랜 세월의 그리움을 나누고 있었다. 서로 부둥켜안고 코를 훌쩍거리며 우는 이들도 더러 보였다.

서둘러 나루를 떠나는 사람도 있었다. 조잘거리며 앞을 지나는 학생들도 눈에 띄었다. 송재만도 이들 가운데 아는 이가 오지나 않았나 했다. 그는 다시 보고 또 보았다. 뒷모습이 닮은 듯도 하고 옆모습이 비슷하기도 했다. 목을 빼고 이리 저리로 살펴보았다. 오늘도 없었다. 보이지 않았다. 송재만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렇다고 실망하지는 않았다. 늘 그랬으므로……. 언젠가는 올 거라고 믿을 뿐이었다.

‘내일은 오겠지.’ 돌아올 거란 희망은 송재만이 사는 의미였다. 나루터지기가 닻줄을 올리고 손을 흔들었다. 화륜선이 몸을 뒤로 뺐다.

그는 화륜선이 몸을 돌려 출포로 향할 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나루터가 빈병처럼 텅 비고 허한 바람이 불어올 즈음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북적거리던 나루터 마당에 썰물이 빠진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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