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경자 화백 차녀 "위작 논란은 작가들에게 인격적 모욕이자 비극"

미술품감정평가원, "10년 간 감정의뢰 들어온 작품 중 26% 위작"

여러 작품 섞어 새로운 작품 만들기도…미공개작으로 둔갑해 유통

고(故) 천경자 화백의 추도식이 열린 지난달 30일 오전 서울시립미술관에는 300여 명의 추도객들이 찾아 영정에 헌화하고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사진=황혜진 기자

[데일리한국 황혜진 기자] 지난달 30일 국화꽃 향기가 서울시립미술관 로비를 가득 메웠다. 꽃과 여인의 화가이자 한국 채색화의 선구자라고 불렸던 고(故) 천경자(향년 91세) 화백의 추도식이 열린 이날 미술 관계자와 시민 등 300여 명이 그녀의 영정과 작품 앞에 헌화했다.

천 화백은 생전 숱한 화제 속의 주인공이 된 바 있다. 그 중에서도 '위작'(僞作)이란 단어가 천 화백을 연상케 하는 가장 중요한 포인트다. 1991년 천 화백은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된 ‘미인도’(원제: 나비와 여인, 29Ⅹ26㎝)라는 그림이 자신이 그린 작품이 아닌 위작이라는 의혹을 제기해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하지만 국립현대미술관과 한국화랑협회감정위원회가 진품이라는 감정 결과를 내놓자 “내가 낳은 자식을 내가 몰라보는 일은 절대 없다"며 절필을 선언하고 한국을 떠났었다.

천 화백의 차녀 김정희(61·미국 메릴랜드 주 몽고메리 칼리지 미술과 교수) 씨는 추도식에서 기자와 만나 “작가들에게 위작 논란은 인격적인 모욕이자 비극”이라며 “위작은 작가는 물론이고 위작이 위작인 줄 모르고 수집하는 사람들에게도 커다란 악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추도위원장을 맡은 김종규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도 “미인도 위작 사건은 미술계의 비극”이라고 말했다. 천 화백이 세상을 뜨면서 위작에 대한 세인의 관심도 더욱 증폭되고 있다.


10년 간 감정의뢰 작품 중 26%가 위작…위작은 사기 범죄

일반적으로 화가나 화가 지망생이 훈련을 위해 다른 작가의 그림을 따라 그리는 것은 모방작이라고 한다. 또 저작권자의 허가에 따라 진품을 본 떠 만드는 것은 복제작이라고 한다. 위작(僞作)은 ‘다른 사람의 작품을 흉내내 비슷하게 만든 작품’이라는 의미에서 모방작이나 복제작과 그 의미가 같다. 하지만 위작은 저작권자의 승낙을 얻지 않고 몰래 만들어 진작(眞作)인 것처럼 거짓으로 유통하므로 명백한 범죄 행위다.

한국미술품감정평가원에 따르면 2003부터 2012년까지 작가 562명의 작품으로 알려진 5,130점 중 26%인 1,330점이 위작으로 감정됐다. 감정 의뢰가 많이 들어온 작가는 천경자(327점), 김환기(262점), 박수근(247점), 이중섭(187점), 이대원(186점), 이우환(171점) 등이었다. 감정 결과 위작으로 판명된 경우가 가장 많았던 작가는 이중섭이 108점으로 가장 많았으며 천경자(99점), 박수근(94점), 김환기(63점), 이인성(54점), 오지호(47점), 장욱진(43점), 김기창(35점), 도상봉·윤중식(32점) 순이었다.

작품이 활발하게 거래되면서 가격이 비싼 작가의 작품이 위작으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화가 겸 예술대학 교수로 활동 중인 이모 씨는 “작품이 어느 정도 가치가 있어야 위작도 생기는 것”이라면서 “위작은 굉장히 비밀리에 만들어지기 때문에 작가들도 풍문으로만 들을 뿐”이라고 말했다.


고(故) 천경자 화백이 자신이 그린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던 ‘미인도(나비와 여인, 1977)’(가운데)는 천 화백의 ‘장미와 여인(1981)’(왼쪽)과 ‘孤(1974)’(오른쪽) 등의 부분을 조합해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위작, 누가 만들고 어떻게 유통되는가

위작은 은밀하게 제작돼 음성적인 시장을 통해 유통된다. 때문에 위작 스캔들이 터지고, 또 위작 작가가 세간에 얼굴을 드러내고 난 뒤에야 그 제작 과정을 엿볼 수 있다. 천경자의 위작을 만들었다고 주장한 권춘식(68) 씨는 지인과 화랑의 부탁으로 위작을 그렸다고 했다. 의뢰한 쪽에서 자신에게 천 화백의 그림이 그려진 달력을 제공했다고도 진술한 바 있다.

위작은 개인 1명이 만들기도 하고, 집단이 조직적으로 만들기도 한다. 미술품 중개상이라고도 할 수 있는 화랑이 계획적으로 위작 제작과 판매를 기획하는 경우도 있고, 개인이 위작 작가를 고용해 한 작가의 그림만을 지속적으로 그리게 한 뒤 시장에 진품이라 내놓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는 화가의 친인척들이 위작을 제작하기도 한다. 화가가 사망하면 작품의 희소성이 커지기 때문에 미공개작을 소장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은 주변인들이 위작을 높은 가격에 팔아넘기기도 하는 것이다.

보통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작가들에게 위작 의뢰가 들어가며 처음에는 자신의 그림이 위작으로 유통되는지 모르는 채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 경우도 있다. 위작은 한 그림을 그대로 똑같이 베끼는 방식과 해당 작가의 그림 여러 장을 섞어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내는 방식이 있다. 권 씨는 ‘미인도’를 천 화백의 여러 작품에서 나비와 화관 등을 따와 섞어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또 시대가 변함에 따라 작가의 작품 스타일이 달라지는데, 스타일이 혼재된 위작이 작품 속에 섞여 버젓이 유통된 경우도 있다.

천경자 화백의 둘째 사위인 문범강 조지타운대 미술과 교수는 “문화나 미술 유형물이 생겨난 이후부터 위작은 항상 있어 왔다”며 “예술품에 현물 가치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문 씨는 “위작은 사회악적인 요소이지만 한 쪽에서는 계속 만들어질 것이고 작가는 그저 자신의 작품 활동을 열심히 할 뿐”이라며 “위작이 없는 세상은 오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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