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대만, 일본 등 국제서예교류 통해 한국서예 알리는데 힘쓰다

여초 김응현<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여초 김응현(如初 金膺顯, 1927-2007)은 서울 도봉동 오현(梧峴)의 명문가인 안동 김씨 집안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가학으로 한학 경전과 서예를 배웠는데 서예가의 길을 가기로 결심한 것은 해방 이후부터다.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 ‘국문초서’로 입선한 후 서예계에 등장한다. 그는 실기와 이론에 탁월함을 보였다.

김응현은 국내외의 서예를 폭넓게 탐구하면서 서예를 보는 시야를 넓혔고, 그것을 독창적인 작품세계로 승화시켰다. 그의 학문과 예술사상을 결집한 '서여기인'(書與其人)을 보면, 한국 금석문에 대한 연구물들이 실려 있다.

여초는 조형 연구만을 중시하는 서예를 인정하지 않았고, 이론과 실기를 병용하여 고법을 재해석하는 것이 서예가 나아갈 길이라고 강조했다. 전거(典據)가 없는 글씨법첩에 근거하지 않은 글씨는 서예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국전 초기부터 한국서단에 대해 혹독한 비평을 가했던 이유 역시 서예란 모름지기 ‘서법(書法)’으로부터 출발되어야 한다는 ‘근거우선주의’였기 때문이다.

“김응현은 청대의 비학사상(碑學思想)을 받아들여 한국 서단에 북위서(北魏書)의 유행을 선도했다. 그가 북위의 해서를 연구하고 전파하기 전만 하더라도 한국의 서예는 당나라 중심이었다. 그의 북위서 연구는 한국서예의 흐름을 크게 바꾸어놓았다.” <소도옥(蘇道玉), 중국 하북 지질대학교 교수, ‘이론을 겸비한 신고법(新古法)을 보이다’ 中>

세종어제훈민정음, 136×62.5㎝ 종이에 먹, 1979<여초서예관 소장>
◇자유자재 伸縮의 변화

김응현은 한국의 고대비문을 연구를 했으며 특히 광개토태왕비(廣開土太王碑)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광개토태왕비 임서(臨書)’는 김응현의 대표작이다. 광개토태왕비는 4면비로 높이가 6.39미터 1775자로 되어있으며 크게 다듬지 않은 자연석에 새겨져 있다. 고구려의 세력과 위용을 살필 수 있는 비문이다.

글자는 질박하고 기교를 부리지 않았지만, 글자마다 세부적인 것을 장악하는 작가의 섬세한 면을 엿볼 수 있다. 중봉을 기본으로 글자마다 필획의 굵기가 다르고, 펼치고 오므리는 신축(伸縮)의 변화가 자유자재하다. 광개토태왕비 연구는 김응현의 서예창작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와 함께 한글고체, 예서, 행서를 혼서 한 작품 ‘세종어제훈민정음(世宗御製訓民正音)’은 한글과 한문을 혼용하고 있지만 표현상 괴리감이 없이 하나로 어우러져 있다. 이 중에서 중심이 되는 서체는 한글고체다. 한글고체는 훈민정음의 제작원리를 살려 전서 필법으로 썼다. 여초의 글씨가 갖는 특징인 중봉(中鋒)의 필획은 그가 쓴 고체작품 중에서 쉽게 느낄 수 있다.

간단한 필획이지만 허전해 보이지 않고 오히려 꽉 찬 느낌을 주는 것은 서예에 대한 기본기가 단단하게 다져졌기 때문이다. 김응현의 한글고체는 기본적으로 둥근 원필을 사용하고 있고 붓끝의 중심이 한가운데로 모아져 선질의 밀도가 높고 마치 금석처럼 탄탄하게 느껴진다.

광개토태왕비-임서, 467×109㎝(×4) 종이에 먹<여초서예관 소장>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국제서예교류활동

“김응현은 1990년대 이후 중국이 문호를 개방한 이후 서예인으로는 처음으로 중국에 건너가 교류전의 문호를 넓혔고, 서예의 새로운 방향을 탐구하고 자신의 서예세계를 강화시켰다. 중국에서 새로 발굴된 한대(漢代)의 죽간과 백서 등을 서예에 적극 반영하기도 했다.

김응현의 추진 아래 대규모의 국제서예교류활동이 열리면서 한국의 서예는 국제 서단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서예교류활동을 통해서 국가 상호간에 공동 발전의 계기를 마련한 것은 서예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소도옥(蘇道玉) 교수>

1958년 김충현과 김응현 형제는 한국 서단을 발전시키고 우수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동방연서화(東方硏書會)’를 창립했다. 동방연서회는 서예의 기법적인 전수에만 그치지 않고 한국 서예의 변천사를 통틀어 서예의 문화적 속성에 주목했으며, 서예 교육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여 국민들의 서예교육보급에 앞장섰다.

초대 이사장인 김충현에 이어서 1969년 김응현이 이사장으로 취임하고 1973년 서예전문학술지 ‘서통(書通)’을 창간했다. 이 학술지는 역대 금석과 묵적, 회화, 시가, 문자학, 철학, 인물 탐방 등 풍성한 내용을 다루어 한국 금석문화와 한국서예사를 정리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1991년 동방연서회는 재단법인을 인가받아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를 설립, 2003년에 개교하여 학생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그의 또 다른 공헌은 서예평론이 없던 시절 한국서예의 문제점에 신랄한 비평을 가함으로서 한국서예의 좌표 설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또한 중국, 대만, 일본 등과 국제서예교류활동을 통해 한국서예를 알리는데 힘썼으며 특히 1990년대 중국에서의 개인전은 현지에서도 많은 반향을 일으켜 중국의 중장년층 서예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국립현대미술관 배원정 학예연구사>

한편 여초 김응현은 ‘국립현대미술관(관장 윤범모)덕수궁관에서 4~7월 전시 중인 ‘미술관에 書:한국 근현대 서예전(The Modern and Contemporary Korean Writing)’의 두 번째 주제 ‘글씨가 그 사람이다(書如其人)-한국근현대서예가1세대들’ 12인 중 예술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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