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민호, 이화삼, 이백수, 박진, 윤방일, 박상익 등의 추억

연극인들과 함께(유치진, 변기종, 박진 등이 보인다)
◇후배 장민호

이해랑이 후배 중에서 최고의 배우로 생각하고 아꼈던 장민호와 처음 만난 것은 1947년 경성방송국 라디오드라마 연출 때다. 장민호가 당초 성우로 출발했기 때문에 라디오드라마에서 처음 만나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9·28수복 때 신협이 재구성되면서 그가 장민호를 극단에 끌어들여서 평생 함께 연극을 했다.

천성적 배우의 표적 존재로서 이해랑은 장민호를 꼽았다. 이해랑은 장민호와 관련하여 “아무리 극중 인물 속에 파묻혀서 살려고 해도 그의 강한 개성이 드러나 보인다. 군중 속에서도 그렇고 고독에 잠겨 있을 때도 그의 개성은 도드라진다. 그의 강한 억양 때문만은 아니다. 극중 인물과의 이인삼각에서 그가 언제나 앞을 질러서 먼저 달리기 때문이다. 언제나 그가 극중 인물을 앞에 서서 끌고 다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한 번도 극중 인물에 눌려서 쩔쩔맨 일도 없거니와 연극의 중량에 억압을 받고 허덕인 적도 없다”고 높게 평가했다.

◇명배우로 꼽은 이화삼

이해랑이 근대연극사상 명배우로 꼽은 사람으로는 이화삼(李化三)이 있다. 이화삼과는 4살 차이지만 막역한 친구로서 수년간 함께 연극을 했다. 그는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중앙일보)이라는 글에서 “이화삼은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명배우다. 해방 직후 극단 낙랑극회(樂浪劇會)의 황철도 뛰어난 연기자였지만 그러나 이화삼에 비한다면 그는 훨씬 격이 다른 연기자다.

황철은 자유분방하고 통속성이 짙은 연기로 대중이 좋아 하는 연기를 보였지만 이화삼의 연기는 보다 내면적이었고 인간적인 연기로 그 깊이가 달랐다”고 극찬했다.

그러면서 두 사람간의 우정에 대하여도 회고했다. 그는 회고의 글에서 “이화삼은 나보다 4세 연상이었지만 우리 사이는 허물이 없었다. 성격이 호탕하면서도 다감해 누구나 그를 좋아했다. <마의태자> 연출 당시 그는 35세였는데 머리가 홀랑 벗겨져 대머리였다. 대머리를 하고 그는 늘 웃고 다녔다. 그는 술을 좋아했다. 나도 그즈음 상당한 애주가였으므로 잘 어울리는 상대였다”면서 극협이 까다로운 정관을 만들면서도 호주가(豪酒家) 두 사람 때문에 금주 조건만은 넣지 않았다는 에피소드까지 실토했다.

전국연극제 심사위원장으로(광주에서)
◇선배 이백수

이해랑이 선배로서 존경심을 갖고 대한 사람은 동랑 외에 배우 이백수(李白水)와 연출가 박진(朴珍)이었다. 주지하다시피 이백수는 1920년 토월회(土月會) 배우로 시작하여 6·25 전쟁 중 납치당할 때까지 30년 이상을 연극배우로 활동한 원로 배우이다.

그는 「이백수」라는 글에서 “어느 편이냐 하면 선생의 기인 면모 속에서 날카롭게 빛나는 예리한 눈초리와 희랍의 조각을 연상시키는 높은 코는, 선생의 본명 이천(李泉)이란 천의 외자를 두 자로 나누어서 이백수의 예명을 만든 거와 같이 나에게는 잊지 못할 인상적인 선생의 음양 (陰陽)”이라 자신에게까지 깊이 각인되어 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연출가 박진

이해랑이 신파극을 대단히 경멸하고 배타했던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그는 그것이 연극의 격을 떨어뜨리는 저질 상업극이라서 배격한 것이었다. 그러나 신파극을 해온 몇몇 연극인에 대해서만은 호감을 갖고 있었다. 그런 대표적인 연극인이 연출가 박진이었다. 두 사람이 첫 대면한 것은 1938년경이었다. 즉 극연과 학생예술좌가 일경의 탄압을 받을 즈음 박진은 동양극장(東洋劇場)의 전속 연출가로 대중 연극을 주도하고 있었다.

그런 때에 두 사람이 처음 만났고 이해랑에게 박진은 그저 우스운 소리 잘하는 중견 연출가로 비쳤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1957년 종전과 함께 국립극장에 두 개의 전속극단인 민극과 신협 두 단체가 생겨나면서 두 사람이 각각 대표를 맡게 되었다. 그 두 사람이 처음으로 한솥밥을 먹으며 함께 연극을 하게 된 것이다. 이때 그는 “박(朴) 선생을 가까이 모시면서 그분의 풍만한 인간성에 매혹되고 말았다”고 했다.

◇극작가 윤방일과 배우 박상익

이해랑과 극작가 윤방일(尹芳一)과 배우 박상익(朴商翊)과는 비교적 오랜 교분을 가진 동갑내기 연극친구 사이다. 윤방일과 박상익은 그가 학생예술좌 시절에 극연의 연구생을 했으므로 비슷한 시기에 연극에 입문한 셈이다.

그는 이들 두 동료와의 관계를 회고하는 글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에서 “윤방일은 폐가 약했는데도 술을 좋아했다. 그래서 윤방일, 이화삼, 박상익, 그리고 나 등 넷은 잘 어울려 다녔다. 그렇게 잘 어울려 다니고 친했음에도 윤방일과 박상익은 앙숙이었다. 극단에서나 술집에서나 걸핏하면 이놈 저놈하고 싸움질이었다. 너무 가까웠기 때문에 오히려 잘 싸웠는지 모를 일이다”라고 쓴 바 있다.

희극배우로서 독특한 위치를 지키고 있던 박상익의 회계실력 때문에 극협 살림살이를 맡아 한 극작가 윤방일과는 자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개성이 강한 두 동료 간의 의견 충돌일 뿐 우정만은 너무나 돈독했다. 이해랑은 바로 그 점을 아름답게 추억한 것이다. 그는 특히 순수하면서도 소박했던 박상익을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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