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생활 10여년 만에 하나의 이정표가 될 만한 연기력 발휘

극협의 <대춘향전> 공연 장면
이해랑이 바라본 해방직후의 병폐는 ‘연극의 정치 이데올로기 도구화’ 와 ‘흥행성만을 추구하는 상업극의 타락’으로 요약되었다. 따라서 그는 좌익연극인들에게는 이론과 완력으로 대항했고, 타락한 흥행극에는 건강한 연극 모델을 제시하는 것으로 임했다.

그가 실질적으로 주도한 극협의 운영체제를 동인제 방식으로 가져갔던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극협은 단장을 두지 않고 동인제의 합의운영방식을 도입했다. 그는 상업 극단들의 폐해를 누구보다도 잘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1인 독재식 단장제는 배격한다는 신념을 끝까지 지켰다.

◇대춘향전

5·10 총선거를 앞두고 유엔사절단이 내한하는데 그들에 대한 대대적인 환영분위기 조성을 위해 미군정의 한국 간부였던 정일형(鄭一亨)박사가 극협에 <대춘향전> 공연을 요청해온 것이었다. 극협의 <대춘향전> 공연은 극단 창단 이래 최고였다. 제작비까지 미군정에서 담당했기 때문에 최선의 무대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김동원(이도령 역), 김선영(춘향 역), 이화삼(변학도 역), 복혜숙(월매 역), 이해랑(방자 역) 등 최고의 배우들이 연기했고, 무대장치 역시 김정환(金貞桓)이 환상적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2월 말 늦겨울의 폭설 속에서도 명동 시공관(市公館)의 유리창이 깨어져 나갈 만큼 폭발적이었다.

그런데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해랑이 이 작품에서 매우 특이한 변신을 하였다는 점이다. 즉 그가 자기 정서와는 전혀 상반되는 우리의 전통 춤과 민요까지 부른 것이다. 그는 대단히 서구적 정서의 소유자여서 우리의 전통적인 예능은 좋아하지 않았고 또 소질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성으로 그것을 극복해낸 것이다.

◇신협

이해랑이 극협을 이끌고 지방 순회공연을 다니는 동안 서울에서는 국립극장 설치령이 공포되었다. 그리하여 서항석, 안석주(安碩柱), 채동선(蔡東鮮), 민병식, 박헌봉(朴憲鳳), 유치진 등으로 운위원회가 구성되고 유치진이 초대 국립극장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해랑은 “지방 공연에서 돌아와 보니 이미 이광래를 대표로 한 신극협의회(新劇協議會)가 조직돼 있었고 극협 멤버 중 기획 담당인 윤방일(尹芳一)이 새 간사로 김동원, 이화삼 등 동지들이 모두 가입돼 있었다. 새로 생긴 신극협의회(新協)는 이름만 바뀌었을 뿐 얼굴은 모두 극협 인사들이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신협은 1950년 1월19일에 발족되었는데 총괄하는 협의체 신극협의회 간사장으로 극작가 이광래가 앉고 예술국과 지방국을 두었으며 그 밑에 극작 분과, 연기 분과, 무대 분과를 설치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연기 분과는 이해랑, 김동원, 박상익, 최삼, 전두영, 송재로, 이화삼, 주선태, 박경주 등 남자 배우 11명과 김선영, 유계선, 황정순, 유해초, 백성희 등 여배우 5명이 초창기 멤버다.

이해랑은 그동안 동고동락한 단원들을 모두 데리고 국립극장으로 들어갔다. 극협을 신협으로 개칭한 것에 해서는 불만이 있었지만 민족극의 수립이라는 명분이 같았기 때문에 그로 순응키로 했다.

극립극장 전속 신협 <원술랑>의 문무왕 역의 이해랑
◇원술랑 그리고 뇌우

단원들의 실질적인 리더였던 그는 창립 공연 준비로 분주했다. 창립 공연작은 유치진의 <원술랑>(허석, 이화삼 공동 연출)으로서 애국심과 박진감 넘치는 스펙터클한 역사극이었다. 이 작품에서 그는 제5막에만 등장하는 문무왕 역이었지만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만 등장하기 때문에 4막까지는 객석에 앉아서 단원들의 연기를 객관화시켜 볼 수가 있었다.

1천 석이 훨씬 넘는 3층짜리의 국립극장(舊) 무대는 연일 밤낮으로 통로까지 메워지는 초만원일 만큼 인기 충천했다. 10일간 공연했음에도 관객의 열기가 식지 않아서 5일 동안 연장 공연까지 함으로써 해방 직후의 최대관객동원이라 할 6만여 명이 구경을 했다.

신협의 두 번째 작품은 그가 실력을 마음껏 발휘해 볼 수 있는 중국 작품 <뇌우>(조우 작, 김광주(金光洲) 역)였다. 그는 이 작품은 해보아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해방 직후 황철과 낙랑극회를 잠시 했을 때 그 작품에 아버지 역으로 출연한 바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치진은 뜻밖에 그에게 작품에서 화려한 각광을 받을 수 있는 젊은 주인공 ‘평’ 역을 맡겼다.

이 작품에서 만년 주인공 김동원이 ‘평’역을 맡으리라 생각한 그로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 그는 고사했으나 유치진의 엄명으로 국립극장 제2회 공연의 주인공으로 무대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었다. 그런데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관객이 몰려들었다. 1만 명만 동원해도 성공작으로 평가되던 당시에 <뇌우>는 보름 동안 7만5천명의 관객을 동원한 것이다. 서울 인구가 고작 40만 명일 때 7만5천명이라는 것은 약 1/6이 보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뇌우>에서는 주역인 이해랑이 뛰어난 연기력을 발휘했고 김선(어머니 역), 신태민(申泰旼, 평(萍) 동생 역), 김동원(아버지 역), 박경주(사해(士海) 역), 박상익(계부 역), 유계선(계모 역), 백성희(계모 역), 황정순(사봉(四鳳) 역) 등 당 최고의 배우들이 환상적 조화를 이루었다.

이해랑은 주역인 아들 평(萍)역을 맡아 그동안의 연기 생활 10여년 만에 하나의 이정표가 될 만한 연기력을 발휘하다. 우선 깡마른 체구에 파리하고 창백한 분장으로 평의 이미지를 너무나 멋지게 풍겨주었고 평의 정서에 가까이 다가감으로써 냉철하고 지성적인 캐릭터를 거의 완벽 하게 표출한 것이다. [정리:권동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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