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호권의 이해랑 인물평‥“탐구정신이 가슴속에서 소용돌이치는 젊은이”

학생예술좌의 <축지좌> 찬조출연직후
이해랑은 연기에는 두 가지 유형, 즉 피상적인 연기라 할 설명적 연기와 내면적 연기가 있다면서 내면적 연기야말로 가장 극예술적이란 것을 강조하고 있다. ‘배우예술의 재료는 그의 생활’이라는 코크란의 말을 인용하면서 “사생활이 신통치 않은, 교양이 없는 배우에게 인격자의 복잡한 감정이 표현될 리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고 했다.

적어도 명배우가 되려면 정서적 두께가 두터 워야 되고 평소 풍부한 소양을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는 배우의 창조적 정서를 강조하면서 “현실 생활에서 섭취하는 것이 아니요, 공상(空想)에서 배우의 예술적 판타지에서 창조해 내는 것”이라 했다. 그는 이미 학생 때 철두철미한 리얼리스트가 되어 있었고 그러한 기조 위에서 연극을 보고 또 연기를 했으며 글도 썼다.

그는 배우지상주의를 설명하면서 연극본질을 희곡 문학에 두고 있던 일본 연극이론가 키시다 쿠니오(岸田國士, 1890~1954)에 반론을 편다. 키시다는 일찍이 “문학으로서의 희곡의 언어가 곧 소리가 되며 또 동작이 되고 연극이 말이 된다-말하는 언어의 매력에 연극의 제1의적 미(美)가 있다”고 주장한 바 있었다.

이에 해서 이해랑은 “첫째 연극의 본질을 희곡에서 구하려고 하는데 씨(氏)의 큰 실책이 있고, 둘째로 연극이기보다 예술이기를 바라는 씨의 말은 그 반면에 레제드라마를 주장하는 위험이 숨어 있다”고 비판했다.

도쿄학생예술좌원의 동지 임호권 등의 인물평에서도 지적되었던 것처럼 이해랑은 “탐구정신이 가슴속에서 여울물같이 소용돌이치는” 젊은이답게 용감하게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또 그런 연극이론을 자기화하는 데 적극적이었던 것이다.

학생예술좌 JODC 방송출연직후
◇도쿄영화인협회(東京映畵人協會)

이해랑은 끝없는 지적욕구 속에서 영화에도 관심을 가졌었다. 함께 도쿄학생예술좌를 이끌던 주영섭이 영화분야로 방향을 돌리면서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이다. 대단히 감각적이면서도 진보적이었던 주영섭은 장차 한국에서는 연극 못지않게 영화도 중요한 분야로서 개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주영섭의 주도하에 도쿄영화인협회(東京映畵人協會)라는 단체 조직에 앞장서게 된다.

이 모임에는 매우 다양한 사람들이 가담했다. 우선 연장자로서 선구적인 무용가 조택원이 가담했는데 그는 도쿄에서 무용을 공부하고 활동도 하고 있었다. 그와 함께 닛카쓰(日活)에서 조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던 이명일(李炳逸)과 신흥 키네마에서 촬영기사로 활동하고 있던 김학성[金學成, 영화배우 최은희(崔銀姬)의 첫 남편], 무용 수업을 받고 있던 박외선[朴外仙, 아동문학가 마해송(馬海松)의 부인] 그리고 김동원과 이진순 등이 주축을 이루었다.

이처럼 영화감독과 촬영기사 등 전문가와 함께 무용가, 연극인 등 다양한 전공의 청년들 10여 명이 조직체를 구성한 것이었다. 그런데 조직체가 도쿄영화인협회라고해서 그럴듯해 보였지만 실제 한 일은 대단한 것이 못 되었다. 이들이 의욕도 대단하고 어느 정도 전문지식도 갖추고 있었다고는 해도 큰 자본이 드는 영화를 직접 만들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런데 주영섭만은 영화에 대한 열정이 연극 못지않았기 때문에 영화제작의 실제를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서 쇼치쿠(松竹)의 교토 촬영소를 찾아갔었다. 이해랑은 사실 주영섭을 형처럼 따를 만큼 좋아했다. 평안도 출신의 주영섭은 보성전문을 나와서 일본에 갔기 때문에 동료학생 들 보다는 여러 면에서 성숙해 있었다.

회고의 글에서 “주영섭(朱永涉)이 그 나이에 그래도 무난하게 <춘향전> 같은 대작을 연출한 것에 대해 나는 또한 경탄을 금치 못했고 존경하는 마음이 말할 수 없이 솟아났다. 나는 그가 한두 살 위였지만 형처럼 따르고 좋아한 것”이라고 했다. 그가 그런 선배를 가졌다는 것은 젊은 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주영섭을 통해서 연극 영화에만 재미를 붙인 게 아니라 민족의식도 강해진 것이 사실이었다. [정리: 권동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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