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대통령 “4·19혁명의 정신으로 정의롭고 공정한 나라를 만들 것”

19일 오전 서울 강북구 국립 4·19 민주묘지에서 열린 제58주년 4·19혁명기념식에서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 김성태 원내대표가 모두 불참한 가운데 이낙연 국무총리(왼쪽)와 여야대표 등이 참석하고 있다. 오른쪽 부터 정의당 이정미 대표, 민주평화당 조배숙 대표, 바른미래당 박주선 공동대표,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대표. 사진=연합뉴스
[데일리한국 김동용 기자] 19일 4·19혁명의 의미와 숭고한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제58주년 4·19혁명 기념식’이 국가보훈처 주관으로 거행됐다.

이날 오전 10시 국립 4·19민주묘지에서 ‘민주주의! 우리가 함께 가는 길, 국민이 함께 걷는 길’을 주제로 열린 이번 기념식에는 각계대표·4·19혁명 유공자 및 유족·일반 시민·학생 등 2500여명이 참석했다.

정치권에서는 정세균 국회의장을 비롯해 더불어민주당의 추미애 대표·박원순 서울시장·이재명 경기도지사 후보, 자유한국당의 홍문표 사무총장·김문수 서울시장 후보, 바른미래당의 박주선 공동대표·안철수 인재영입위원장 겸 서울시장 후보, 민주평화당의 조배숙 대표·장병원 원내대표, 정의당의 이정미 대표·노회찬 원내대표 등이 참석했다.

한국당의 홍준표 대표와 김성태 원내대표의 기념식 불참은 최근 ‘前민주당원 댓글조작 사건’으로 한국당의 대정부투쟁이 탄력을 받고 있는 가운데, 이슈전환의 빌미를 주지 않으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앞서 문재인 대통령은 기념식 전 임종석 비서실장·장하성 정책실장·정의용 안보실장 등 청와대 참모진들과 민주묘지를 방문, 4·19기념탑에서 헌화와 참배했다. 방명록에는 “4·19혁명의 정신으로 정의롭고 공정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적었다.

문 대통령은 참배 후 유가족들을 만나 일일이 악수하며 인사를 나눈 뒤, 오는 4월 27일 열릴 남북정상회담에 관심을 가져줄 것도 당부했다.

이번 기념식에 불참한 문 대통령은 유족들의 참석 요청에 오는 2020년 4·19혁명 60주년 기념식 참석을 약속하기도 했다.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19일 브리핑을 통해 이 같은 내용을 전하며 “문 대통령이 오늘 이른 아침에 참배만 하고 돌아왔으나, 유족들로부터 4.19 기념식에 자주 참석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이렇게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19일 오전 서울 국립 4.19민주묘지를 방문, 4.19 기념탑을 참배한 뒤 혁명 당시 희생당한 유가족을 위로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번 기념식은 헌화분향과 경과보고를 시작으로 국민의례→기념공연→기념사→‘내일의 4·19’→4·19의 노래 제창 순으로 진행됐다.

기념식에 참석한 이낙연 총리는 “4·19혁명으로 대통령 직선제 등 절차적 민주주의를 끌어낼 수 있었다”고 소회를 밝혔다.

이 총리는 “혁명은 국민열망과 현실질서의 괴리가 극대화됐을 때 일어난다”며 “1960년이 그러했다. 부패하고 탐욕스러운 집권세력은 국민의 고조된 민주의식과 동떨어진 장기집권을 위한 부정선거를 자행했다”고 비판했다.

이 총리는 “4·19혁명은 이 땅에서 처음으로 민중에 의해 절대권력을 무너뜨리고 신생독립국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싹틔웠다”며 “아시아 최초의 성공한 시민혁명이라는 세계사적 위업이 됐다”고 평가했다.

이 총리는 특히 “4·19는 1979년 부마항쟁으로,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으로,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되살아났고, 2016년에는 촛불혁명으로 장엄하게 타올랐다”며 “앞으로도 4·19는 대한민국 민주주의와 함께 영원히 살아 숨 쉴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낙연 국무총리가 19일 오전 서울 강북구 국립4·19 민주묘지에서 열린 제58주년 4·19혁명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정치권은 4·19혁명 58주년을 맞아 한 목소리로 ‘민주주의 수호’를 다짐하면서도, 민주주의 수호의 쟁점에 대해서는 ‘촛불혁명 정신 계승’과 ‘댓글조작 진실규명’으로 입장이 엇갈렸다.

제윤경 민주당 원내대변인은 이날 브리핑을 통해 4·19혁명과 촛불혁명의 연관성을 강조하며 “촛불혁명은 실질적 민주주의가 여전히 확보되지 않았다는 국민의 절박한 외침”이라고 평가했다.

제 원내대변인은 “정치권력 뿐 아니라, 사회경제적인 민주주의를 위한 노력도 계속돼야 한다”며 “경제적 양극화를 극복하고 계속되고 있는 적폐청산의 노력도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경환 민평당 대변인은 “4·19정신은 부마항쟁·5·18광주민주화운동·6월민주항쟁으로 이어졌고, 촛불혁명으로 되살아났다”고 평가했으며, 최석 정의당 대변인은 “정의당은 개헌안을 통해 4·19 정신을 계승하고 혁명을 완수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반면 ‘前민주당원 댓글조작 사건’을 항의하며 사흘째 대정부 장외투쟁을 이어가고 있는 한국당은 전희경 대변인의 논평을 통해 “우리는 국민들의 열망과 희생을 통해 지켜낸 자유민주주의가 훼손되고 왜곡되는 시대에 직면해 있다”고 지적했다.

전 대변인은 “우리 국민은 권력을 이용해 국민을 속이고, 민주주의를 훼손하려는 그 어떤 시도도 용납하지 않았고, 그러한 시도는 언제나 국민의 엄중한 심판을 받아왔다”며 “이제 4·19 정신으로 다시금 일어서 무너져 가는 자유, 민주, 법치의 가치를 되살려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신용현 바른미래당 수석대변인도 “4·19혁명 정신을 퇴색시키는 민주주의 훼손행위에 대해 절대 좌시하지 않겠다”며 “민주주의에 도전한 불법 댓글조작 사건에 대해 끝까지 진실규명하겠다”고 강조했다.

각 지방자치단체에서도 이날 일제히 4·19혁명 정신을 되새기는 시간을 가졌다.

부산시는 민주공원에서, 대구시는 시청 별관 대강당에서, 광주시는 빛고을시민회관에서, 전북 남원시는 김주열 열사 묘역 광장에서, 대전에서는 4·19혁명 진원지 표지석에서 기념행사를 열었다.

특히 대전에서는 지난 14일 ‘3.8민주의거 국가기념일 지정 촉구 범시민추진위원회’가 3.8민주의거의 국가기념일 지정을 촉구하는 행사를 열기도 했다.

3·8민주의거는 1960년 대전지역 고등학생들이 자유당 독재정권의 불의에 항거했던 의거로 마산 3·15의거와 함께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의거로 평가받는다.

4.19 혁명 기념일을 하루 앞둔 18일 서울 안암동 고려대학교에서 열린 4.18 구국대장정에 참여하는 학생들이 정문을 뛰어나오고 있다. 이 행사는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고려대 학생들의 4.18 의거를 기리기 위해 매년 열린다. 사진=연합뉴스
매년 국가보훈처 주관으로 열리는 4·19 기념식은 민주주의의 의미와 미래를 되새기는 행사로 자리매김 했다. 특히 대한민국 최초로 국민의 힘에 의해 독재정권이 종식됐다는 점에서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 1987년 6·10민주항쟁과 지난해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을 이끌어낸 ‘광화문 촛불혁명’으로 이어지는 시민혁명의 시초로 평가받는다.

4·19혁명의 불씨는 1960년 3월 15일 대한민국의 제4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피어올랐다. 당시 대통령 후보로 출마한 이승만 대통령과 자유당 정권은 부정 선거를 통해 정권을 유지했고, 민주주의를 갈망하던 국민들의 불만은 점점 쌓여만 가고 있었다.

당시 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민주당 조병옥 박사가 2월 15일 사망하자, 이승만 대통령의 재선이 유력해졌고, 자유당은 자당의 이기붕 부통령 후보까지 당선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학생들의 야당 유세 참여를 막기 위해 ‘일요일 강제 등교 조치’를 취했으며, 3.15선거에서는 투표함을 바꿔치기 하는 등의 부정을 저질렀다. 이에 이승만·이기붕 후보는 각각 대통령과 부통령에 당선됐다.

시위의 시작은 앞서 3·15부정선거를 예견하고 야당 유세 참여를 막기 위한 정부의 ‘강제 등교 조치’에 반발해 대구 지역 고등학생들로부터 전개된 2·28민주운동이었다. 정부는 이를 공산당 사주에 의해 벌어진 일이라며, 경찰을 동원해 학생들의 시위를 강제 해산시켰다. 하지만 이 시위를 시작으로 전국 각지의 학생들이 들고 일어났다.

이후 3·15선거 당일 부정선거가 이뤄지자, 경남 마산을 중심으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3·15의거가 일어났다. 마산 시민들은 이날 저녁 마산시청앞에 집결했고, 시위 인원은 점점 불어났다. 당시 시위대를 향한 경찰의 발포로 8명이 사망하고, 8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전 국민이 충격에 빠진 사건이었다.

3·15의거에서 시위에 참가했다가 실종된 당시 16세의 김주열 학생의 시신이 4월 11일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로 발견되자, 시위는 전국으로 번졌다. 정부는 2·28민주운동에 이어 4월 11일 마산 시위도 공산당의 사주로 발생한 폭동이라는 내용의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이른바 ‘피의 화요일’로도 불리는 4월 19일엔 전국에서 이승만 정권의 퇴진 시위가 전개됐다. 특히 그간 고등학생들과 일반시민들에 비해 미온적이었던 대학생들까지 들고 일어났다. 시위대가 대통령 집무실인 경무대(현 청와대)까지 진출하자, 경찰은 시민들을 향해 발포했고, 이에 100여명의 사망자와 70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정부는 19일 오후 3시 서울지역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했으며, 25일엔 대학교수들이 모여 시국선언문을 채택하고 시위에 동참했다. 교수단의 시가행진이 끝난 뒤에도 시민들은 시위를 이어나갔으며, 시위 진압에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않던 계엄군에 시민들이 환호하면서 계엄군조차 시민들과 함께하게 됐다.

결국 4월 26일 10시 20분경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下野)를 발표했다. 총 180여명의 사망자 및 6000여명의 부상자를 내는 등 큰 희생이 있었지만, 국민들이 끝까지 민주주의를 포기하지 않았기에 얻을 수 있었던 귀중한 승리였다.

한편 정부는 올해 4·19혁명 유공자를 추가로 선정해 2019년 포상할 계획이다.

4.19 혁명 기념일을 이틀 앞둔 17일 서울 강북구 국립4.19민주묘지의 한 열사의 무덤 앞에 누군가가 준비한 꽃다발이 놓여 있다.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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