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전 대통령 소개로 결혼해 64년 간 '동고동락'

JP, 마지막 입맞춤과 목걸이 걸어주기로 부인과 '굿바이'

지난해 9월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서울 용산구 한남동 순천향대학교 서울병원에 입원해 있던 박영옥 여사를 간병하는 모습./정진석 전 국회사무총장 페이스북
[데일리한국 김종민 기자] "아내가 몸이 좋지 않은데, 사람들로부터 새해 인사를 받으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김종필(90) 전 총리는 정치 입문 이후 매년 1월1일 서울 신당동 자택을 개방해 손님들을 맞아왔으나, 올해는 공개적으로 자택 문을 개방하지는 않았다. 부인 박영옥(86)여사가 투병 중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현대정치사에서 누구보다 긴 '2인자' 생활로 유명한 김종필 전 총리와 21일 숙환으로 숨진 부인 박씨는 1951년 결혼해 64년 동안 동고동락하면서 잉꼬부부로 살아왔다.

김 전 총리는 지난달 7일 서울 시내 한 음식점에서 자신의 구순(九旬·90세)을 기념해 가벼운 만찬 모임을 가졌다. 주변 사람들이 '구순 잔치'를 갖자고 제안했으나 김 전 총리는 부인의 투병을 이유로 정중히 거절하고 간단한 저녁 자리만 가졌다.

김 전 총리는 병원에 입원한 부인의 간병을 위해서 이날 오후 8시쯤 저녁 모임을 빨리 끝냈다. 이 자리에는 강창희 전 국회의장, 한갑수 전 농림부 장관, 이용만 전 재무부 장관 등 4, 5명만 참석했다.

당시 만찬 참석자는 "김 전 총리가 저녁 식사를 하면서도 여러 차례 사모님이 걱정된다고 말했다"며 "저녁 모임을 서둘러 끝낸 뒤 '아내가 좋아하는 빵을 사서 가야겠다'면서 인근 제과점으로 갔었다"고 전했다.

이에 앞서 지난해 9월에는 김 전 총리가 박 여사를 간호하는 장면이 공개돼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휠체어에 앉은 등 굽은 할아버지가 침상에 기대어 있는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는 한 장의 사진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퍼져나갔다. 정진석 전 의원이 페이스북에 올린 이 사진은 김 전 총리가 부인 박 여사를 극진히 간병하는 모습이었다.

박 여사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형인 박상희 씨의 딸로, 박근혜 대통령의 사촌 언니이다. 따라서 김 전 총재는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조카사위이자 박근혜 대통령의 사촌형부가 되는 셈이다. JP는 박 전 대통령과 함께 5·16을 일으킨 뒤 35세에 초대 중앙정보부장, 45세에 국무총리를 지낸 ‘권력의 2인자’이자 풍운아였다. 1980년대 이후에는 김영삼(YS)·김대중(DJ) 전 대통령과 함께 ‘3김 시대'를 이끌었다. 그가 과거 공화당 정권 시절 권력의 견제에 밀려 잠시 외유를 떠나면서 “자의반 타의반”이라고 한 말은 세간에 회자됐었다.

김 전 총리는 결혼 60주년인 2011년 조선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1951년 당시 1·4 후퇴 전선에서 박 전 대통령의 조카딸인 박 여사와 인연을 맺게 된 뒷얘기를 소개했다. 김 전 총리는 "박정희 (당시) 중령은 강원도에서 싸우느라 (결혼식에) 오지 못하고, 대신 황소 한 마리를 보냈다"며 박 전 대통령의 결혼 선물을 회고했다.

김 전 총리는 "당시 박정희 소령이 국수를 좋아했다. 1950년 6·25 전쟁 직전의 어느날 박 소령의 관사에서 국수를 먹는데 못 보던 여자가 왔다갔다했다"며 박 여사와의 첫 만남을 소개했다. 전쟁이 터진 후 말라리아로 앓던 박 여사에게 김 전 총리가 의사를 구해주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박 여사가 비스킷, 빵 등 미국 야전식을 대접하며 인연이 이어졌다.

박 전 대통령은 "데리고 갈 생각이 없는가. 지내보긴 뭘 지내보나. 이 전쟁이 언제 끝날지 모르지 않느냐"며 결혼을 부추겼다고 한다. 1·4 후퇴 직후 대구에 있어야 할 박 여사가 "연락이 끊겨 죽은 줄 알았다. 확인하려 왔다"며 서울 육군본부로 김 전 총리를 찾아오면서 김 전 총리는 결혼을 결심했다고 한다.

김 전 총리는 "부침이 심했던 내 인생 아닌가. 매일 소식을 줄 수 없으니 매일 내 연락만 기다리며 좌불안석하느라 허송세월한 여인이다. 참 고마운 여인이다."며 결혼생활의 공을 아내에게 돌렸다. 그는 몇년 전 박 여사에게 "어이, 평생 한 여인과 잔 멍텅구리 놈이 여기 있어"라고 농담을 던졌다가 "당신만 한 여자랑 잤느냐"며 혼쭐이 났다고 한다.

김 전 총리는 결혼 당시 '한번 단 한번 단 한사람에게'(Once, only once and for one only)라는 영국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의 시 구절을 인용하기도 했다.

고인인 박 여사는 생전 "매스컴에 드러나지 않게 조용히 내조했다고 자부한다"면서 "프랑스 드골 대통령의 부인 이본느 여사처럼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내조할 작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김 전 총리에 대한 평가 요청에는 "남편을 하늘같이 생각하기 때문에 점수를 매긴다는 생각 자체를 할 수 없다"고 언급한 적도 있다.

김 전 총리는 충남 부여에 자신과 부인을 위한 묘지 비석을 미리 준비했다. 60×140cm 규모인 비석 앞면에는 두 줄로 국무총리김해김공위종필(國務總理金海金公偉鍾必)·배총리부인고령박씨영옥(配總理婦人高靈朴氏英玉) 지묘(之墓)라고 쓰였다.

비문에는 "思無邪(사무사)를 인생의 도리로 삼고 일평생 어기지 않았으며…無恒産而無恒心(무항산이무항심)을 치국의 근본으로 삼아 국리민복과 국태민안을 구현하기 위하여 헌신진력 하였거늘…만년에 이르러 年九十而知八十九北(연구십이지팔십구배)라고 嘆(탄)하며 수다한 물음에는 笑而不答(소이부답) 하던 자 내조의 덕을 베풀어준 永世伴侶(영세반려)와 함께 이곳에 누웠노라"고 새겼다. JP는 본인이 직접 지은 비문 글을 통해 그의 애국심과 부인 박씨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김 전 총리가 21일 부인 박영옥 여사에게 지상에서 마지막 키스를 하며 떠나보낸 것으로 알려져 주위 사람들의 눈시울을 적셨다. 지난해 고인이 병원에 입원한 직후 본인도 휠체어에 의지해야 하는 신세이면서도 병상을 지켜온 김 전 총리는 의료진이 임종이 가까워졌음을 알리자, 모두 자리를 비켜달라고 요청한 뒤 마지막까지 부인의 손을 잡고 임종을 지켰다고 조용직 운정회 사무총장이 전했다.

김 전 총리는 부인에게 마지막으로 입맞춤했고 이어 곧바로 고인이 숨을 거둔 것으로 전해졌다. 64년 전 나눠 꼈던 결혼반지로 만든 목걸이를 떠나는 아내의 목에 걸어줬다고 한다. 김 전 총리는 임종을 지킨 후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결혼 선물로 황소 한마리를 보낸 일화 등을 회상하면서 "허무하다"며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고 조 사무총장은 덧붙였다.

김 전 총리는 이날 조문객들을 만나서도 "난 마누라하고 같은 자리에 누워야겠다 싶어서 국립묘지 선택은 안했다. 집사람하고 같이 눕고 싶은데 아직 부부가 같이 현충원에 가는 건 대통령이나 그렇다고 한다. 국립묘지에 가고 싶지도 않다"고 말했다. 이어 "(장지에) 거기 나하고 같이 나란히 눕게 될 것이다. 먼저 저 사람이 가고 (나는) 그 다음에 언제 갈지…. 곧 갈 거에요 난. 외로워서 일찍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라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김 전 총리는 임종 때 아내에게 "나도 머지 않은 장래에 가야 하니까 외로워 말라고 편히 쉬라고 했다"고 소개하며 눈물을 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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