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률형 아이템, 제도적인 장치 없이 고삐 풀려

문체부, 결제한도 증액 검토…확률형 아이템 더욱 양산 우려

[데일리한국 황대영 기자] 대한민국 게임 산업에 위기의 그림자가 점점 짙게 드리워지고 있다. 한 때 전세계를 호령하던 대한민국 게임 산업은 최대 게임시장인 중국에서 비관세 장벽인 판호에 가로 막히는 바람에 갈곳을 잃고 방황하고 있다. 안방 시장은 점차 해외산 게임에 잠식돼 가는 모습이 역력하다. 이런 와중에 모범을 보여야할 일부 게임 업체들은 법망을 교묘히 빠져나가는 편법적 행태로 사용자들의 신뢰까지 잃어가고 있다. 이에 본지는 현재의 어려움을 딛고, 발전적 계기를 마련해주자는 취지에서 국내 게임사들의 현주소를 가감없이 총체적으로 진단하고자 한다. <편집자주>

확률형 아이템은 글로벌 게임업계에서 여전히 뜨거운 감자로 통한다. 일명 랜덤박스(Random-Box)라고 불리는 확률형 아이템은 사용 시 일정한 확률로 무작위 아이템이 등장한다. 이 과정에서 구매 가격보다 높은 아이템을 확률적으로 얻을 수 있어 마치 '뽑기'와 같은 '사행성'을 애초부터 내포하고 있다.

수년간 누적된 확률형 아이템은 게이머들에게 과금 규모에 따라 승패가 갈린다는 '페이투윈(Paytowin)'을 일으킨다고 지탄의 대상이 돼왔다. 국내 역시 마찬가지다. 확률형 아이템은 과거 PC온라인 게임에서는 간혹 볼 수 있었지만, 모바일 게임에서는 주요 비즈니스모델(BM)로 자리 잡아 국내 소비자들에게는 비난의 대상이 되기 일쑤였다.

"인터넷 방송 진행자(BJ)가 불과 3시간 만에 5000만원을 결제해 확률형 아이템을 사용하는 게 정상인가요? 소수점 8자리 아래까지 내려오는 확률을 보면 새로운 인터넷판 도박이라고 봐도 무관합니다"

확률형 아이템에 관한 포털 뉴스에 달린 댓글로, 국내 소비자들의 게임사에 대한 인식을 제대로 짚은 것으로 평가된다. 일 최고 매출 100억원, 연간 매출 1조4000억원 등 최근 구글플레이 최고매출 상위권 모바일 게임 대부분이 확률형 아이템을 주요 매출원으로 삼고 있다. 단기 매출을 위해 게임사들 입장에서는 별다른 대안도 없기 때문인지 빅3 대형 게임사부터 중소 게임사까지 확률형 아이템 판매에온통 혈안인 이상국면이 이어지고 있다.

◇ 지나친 확률형 아이템 남발, 소비자들 불만 증가

주사위. 사진=픽사베이
확률형 아이템의 등장 초기에는 적은 비용으로도 고가의 아이템을 얻을 수 있어 게이머들에게 새로운 재미를 주는 요소로 작용했다. 굳이 확률형 아이템을 사지 않더라도 게임 플레이에 크게 영향을 주지 않아 소비자인 게이머들의 부담도 적었다.

하지만 확률형 아이템이 주요 BM으로 등장한 이후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경쟁심리를 부추기는 모바일 게임들은 확률형 아이템을 남발했고, 결제를 유도하기 위해 게임 플레이로 쉽게 얻을 수 없는 아이템까지 확률형 아이템으로 등장하게 만들었다.

대표적인 예가 엔씨소프트의 모바일 게임 '리니지M'과 PC온라인 게임 '리니지'다. 이 게임들은 확률형 아이템에 이어 확률성 콘텐츠를 전면에 내세워 소비자들의 원성이 끊이지 않고 있다. 소비자보호원에 따르면 엔씨소프트는 지난해 6월 21일 리니지M이 출시한 이후 불만 상담이 월평균 10건 내외에서 200건으로 급증했다. 드러난 불만만 이 정도면 드러내지 않은 항변의 목소리는 더욱 많을 것이라는 게 업계의 진단이다.

리니지M의 주요 콘텐츠 중 하나인 '변신'은 소수점 아래로 내려오는 영웅 등급 변신 카드를 또다시 '확률'로 조합해 전설 카드로 만드는 형태로 구성됐다. 이 때문에 수억원을 사용하고도 최종 아이템을 갖지 못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으며, 인터넷 개인방송에서는 수천만원치 변신카드를 조합하는 방송이 진행됐을 정도다.

확률형 아이템을 다시 확률적으로 조합하는 방식은 일본에서 퇴출된 '컴플리트 가챠(뽑기)'다. 컴플리트 가챠는 일본에서 한 때 유행했지만, 소비자들의 과도한 지출로 원성이 끊이지 않자 일본 소비자청이 급기야 법률위반 유권해석을 내놓기에 이르렀고 결국은 퇴출된 바 있다. 하지만 해외에서 규제의 철퇴를 맞은 콘텐츠도 국내에서는 제도적인 여과장치가 없는 탓에 제멋대로 활개 치는 이상현상이 이어지고 있다.

또 리니지M은 0.0001%와 같은 당첨 확률을 가진 확률형 아이템도 판매해 구설수에 오른 바 있다. 비단 이 같은 확률형 아이템 문제는 엔씨소프트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이는 국내 앱 마켓 매출 순위권 에 올라있는 대부분의 모바일 게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구조다.

게임사들은 한국게임산업협회(K-GAMES)를 통해 확률형 아이템 자율규제를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자율규제는 확률만 고시하고 있을 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서비스에 대한 제재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 때문에 정부의 법적 규제를 회피하기 위한 임시방편이라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위정현 중앙대학교 교수(게임학회장)는 "과도한 확률형 아이템이 사행성 이슈와 맞물리게 되면 결국에는 기업의 브랜드 가치 하락과 업계 전반에 대한 불신이 깊어진다"며 "사회적 우려가 큰 만큼, 게임업체는 확률형 아이템을 놓고 장기적인 가치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 확률형 아이템-결제한도 증액, 국내 가계부실 양산 우려

사진=픽사베이
국내 게임사들은 '게임=문화'라고 주장하며 바다이야기 사태 이후 씌워진 부정적인 테두리를 벗어나려고 노력 중이다. 최근 게임산업의 주무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는 민·관 규제개선협의체를 출범하고 성인 PC온라인 게임 결제한도를 증액하는 규제 개선을 검토 중이다.

문화부는 성인 PC온라인 게임 결제 한도를 50만원에서 100만원으로 상향하는 규제 완화를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연간으로 보면 600만원에서 1200만원으로 결제한도가 늘어난다. 정부부처의 결제한도 상향 추진 배경에는 국내 게임사들이 주장해온 결제 한도가 없는 모바일 게임과의 형평성 문제가 주된 이유다.

하지만 이미 PC온라인 게임 결제 한도는 국내 월 평균 가계지출을 한참 넘어섰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월 평균 가계지출은 331만6000원이다. 그 중 통신비는 월 평균 13만7800원(4.2%), 오락·문화는 월 평균 17만4700원(5.3%)로 집계됐다. 현 게임 결제한도인 50만원은 가계 월 평균 통신, 오락·문화 비용을 합친 것보다 60%나 더 많다.

특히 문화부가 추진 중인 PC온라인 게임 결제한도 상향이 이뤄졌을 때, 가구당 소득대비 차지하는 비중은 25%를 넘어서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는 2018년 1분기 기준 국내 가구당 월 평균 소득이 388만8300원인데, PC온라인 게임 결제한도 100만원 증액과 더불어 최대치까지 결제 시 비중은 25.71%에 달한다.

또한 PC온라인 게임은 중소 게임사보다 대형 게임사 위주로 서비스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 때문에 결제한도 증액은 매출을 끌어올리기 위한 게임사의 확률형 아이템 남발로 이어지고, 최악의 경우에는 PC온라인 게임 결제로 인해 가계부실을 낳을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까지 분출하고 있다.

모바일 게임 역시 마찬가지다. 1일 앱 분석 업체 와이즈앱에 따르면 지난 6월 리니지M의 월간 ARPU(가입자당 결제액)는 20만8000원으로 추정돼, 국내 가계 통신, 오락·문화 비용을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 와중에 PC온라인 게임 결제한도 증액을 추진하는 정부부처의 행태는 '적폐 청산'이라는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문제의 원인을 제대로 찾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위정현 교수는 "결제한도 증액은 게임사에 매출을 위한 확률형 아이템 증가로 사행성을 더욱 부추길 가능성이 있다"며 "한도증액과 확률형 아이템 규제는 이론적으로 모순인 상황이므로, 결제한도 증액 시 게임사의 책임이 더욱 무거워질 것으로 보인다"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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