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와의 경쟁으로 노태우정부 탄생·지역감정 심화에 책임 통감…통합 주문"

"YS, 전광석화같이 밀어붙이는 결단력·솔선수범·따뜻한 포용 리더십 지녀"

"정권재창출 못해 민주화 공이 DJ쪽으로만…그간 過에 비해 功이 저평가"

김덕룡 민주화추진협의회 이사장은 24일 "김영삼 전 대통령께서 최근 후배 정치인들에게 가장 많이 하셨던 말씀은 '통합과 화합'이었다"면서 고인의 유지를 받들어 의회민주주의 발전을 이끌어낼 수 있는 리더십을 현역 정치인들에게 주문했다. 사진=이혜영 기자 lhy@hankooki.com

[인터뷰= 데일리한국 김광덕 뉴스본부장 / 정리= 김종민 기자] 한나라당 원내대표를 지낸 김덕룡(74) 민주화추진협의회 이사장은 24일 "김영삼(YS) 전 대통령께서 최근 후배 정치인들에게 가장 많이 하셨던 말씀은 '통합과 화합'이었다"면서 고인의 유지를 받들어 의회민주주의 발전을 이끌어낼 수 있는 리더십을 현역 정치인들에게 주문했다.

10년 이상 김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지내며 'YS 분신'으로 통했던 김 이사장은 이날 상도동계를 대표해 서울시청 앞에 마련된 합동분향소를 찾아 동교동계 인사들과 함께 조문객들을 맞이하다가 <데일리한국>과 인터뷰를 갖고 YS의 파란만장했던 정치 역정을 회고하면서 이같이 밝혔다.

김 이사장은 YS가 '통합과 화합'이라는 마지막 메시지를 남긴 이유에 대해 "김영삼 전 대통령은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경쟁 과정에서 생긴 지역분할 구도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고 계셨다"면서 "이로 인해 노태우정부가 탄생한 것, 영·호남 지역감정이 불거진 것이 우리 과오라는 생각을 많이 하셨다"고 설명했다.

그는 YS의 리더십에 대해 "한번 결심하면 전광석화같이 밀어붙이는 결단력이 있었고, 솔선수범과 포용의 리더십을 지닌 지도자였다"면서 "투쟁적인 분처럼 보였지만 속은 누구보다 따뜻했다"고 말했다.

김 이사장은 YS의 공과와 관련, 먼저 금융실명제 실시와 공직자 재산 공개로 부정부패 척결, 하나회 해체로 군부 통치·쿠데타 종식, 실질적 지방자치 실시, 5·18특별법 제정으로 역사 바로세우기 등을 열거했다. 그는 이어 "YS가 정권을 재창출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후 정권에서 민주화의 공이 DJ쪽으로만 갔던 경향이 있었다"면서 "IMF(국제통화기금) 환란과 측근들의 국정 개입이라는 과(過)가 거론되지만 공(功)이 지나치게 저평가돼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정치학자나 역사가들이 냉철하게 중립적 입장에서 YS의 공과에 대해 재평가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다음은 문답.

- 22일 새벽 김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처음 들었을때 어떤 생각을 했는가.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것이라며 각오하고 있었는데 막상 서거 소식을 듣고 나니 비통한 심정과 애석한 마음을 금치 못했다. 올해 들어 말씀을 제대로 못하시는 상태였다. 건강에 기복이 있긴 했었는데 좀 호전되어 돌아가시기 전에 말씀이라도 하고 가셨으면 하는 생각을 쭉해왔다. 말씀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돌아가셔서 아쉬움과 비통함이 너무 컸다."

- YS를 최근에 언제 만났고, 그 때의 건강 상태는.

"올해 2번 찾아뵈었다. 정월 초하루 세배를 갔었을 때는 그래도 '잘해, 잘해' 이정도 말씀은 하셨는데, 2월에 갔을 때는 알아보고 계시긴 하는데 '응, 응' 정도의 말씀을 하셨다. 혹시 감기라도 옮으면 치명적일 수 있으니 이후에는 면회를 전부 사절하라고 측근들에게 내가 당부했다. 그래서 저도 또 찾아뵙고 싶었지만 참았다."

- 김 전 대통령이 돌아가시기 전에 후배 정치인들에게 바라는 점은 무엇이었나.

"건강이 악화되기 전까지 가장 많이 말씀하신 것은 '통합과 화합'이었다. 본인이 DJ와의 경쟁 과정에서 생긴 지역 분할 구도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로 인해 노태우정부가 탄생한 것과 영호남 지역감정이 불거진 점에 대해 우리 과오라는 생각을 많이 하고 계셨다."

- 오늘 서울시청 앞 합동분향소에 김 이사장 등 상도동계 인사뿐 아니라 권노갑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 등 동교동계 인사들도 많이 보이는데, 최근 두 계파의 화합 노력이 눈에 띈다.

"5공 때인 1983년 5월 김영삼 전 대통령의 단식 농성, 같은 해 8월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의 8·15 공동 선언 발표 등을 계기로 야당 세력의 양대 진영이 힘을 합쳐 1984년 5월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결성했다. 민추협은 1985년 총선에서 신한민주당 바람 등을 일으키며 직선제 개헌으로 가는 길을 여는 등 민주화의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으나 당시 활동이 언론에 충분히 보도되지 않아 이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그 뒤 YS와 DJ가 모두 대통령을 지낸 뒤 양 측 사람들은 '두 분이 세상을 뜨시기 전에 화해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며 의견을 모아 DJ 서거 이전에 협력 움직임을 보였다. 상도동에서는 저와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동교동에선 권노갑 고문 등을 중심으로 두 분이 화해하고 협력하는 기회를 만들고자 함께 광주 5·18민주화 묘소와 부산 민주공원을 참배하는 계획을 마련했었다. 그런데 DJ의 건강이 갑자기 악화돼 실행하지 못했다. 대신 김영삼 전 대통령이 DJ 문병을 가는 것으로 화해 노력을 시작했다. 그러다 DJ 서거로 이 같은 화해와 협력 작업은 잠시 중단됐다가 이후 사단법인 민주화추진협의회를 통해 이같은 노력을 가시화하고 있다. 4년 전부터는 이 단체의 이사장을 저와 권노갑 고문이, 회장을 김무성 대표와 박광태 전 광주시장이 각각 맡고 있다."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 이사장을 맡고 있는 김덕룡(왼쪽) 전 새누리당 의원과 권노갑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이 24일 서울시청앞 서울광장에 마련된 고 김영삼 전 대통령 분향소 앞에서 함께 상주 역할을 하고 있다. 김 전 의원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지내 '분신'으로 통했고, 권 고문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핵심 가신으로 동교동계 좌장 역할을 해왔다. 사진=이혜영 기자 lhy@hankooki.com

- 과거 민추협 활동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다고 지적했다. 1983년 YS의 23일 간 단식 투쟁도 당시 언론에 보도되지 않은 것으로 아는데.

"당시 가택연금 상태에 있던 김 전 대통령이 단식한 지 며칠이 지나도록 언론은 이 사실을 전혀 보도하지 못했다. 군부정권의 보도 통제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 때 민주산악회 회원들이 YS의 단식 투쟁 소식 등을 담은 복사물을 만들어 돌리기도 했다. 단식한 지 며칠이 지나서야 그 소식이 세상에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고, 국회에서는 이에 대한 질의가 있었다. 언론들은 '최근 정치 현안에 대해 국회에서 발언이 있었다' '재야 인사의 식사 문제가 거론됐다' 등의 표현으로 이 사실을 간접적으로 짧게 보도했다. 23일 간 단식을 이어가던 김 전 대통령이 결국 병원으로 강제 이송되면서 가택 연금도 해제됐다."

- 'YS의 비서실장' 을 가장 오래 지내 'YS의 분신'으로 통했는데.

"1970년 비서로 출발해서 1980년에 비서실장을 맡았다. 김 전 대통령께서 통일민주당 총재를 맡으셨을 때뿐 아니라 그 이후 3당 합당 직후인 1991년 초까지 비서실장을 지냈다. "

- 10여년 비서실장을 맡는 등 20~30년 동안 YS를 보좌한 참모로서 'YS 리더십'의 특징을 압축해 얘기한다면.

"우선 결단의 리더십이었다. 한번 결심하면 전광석화같이 밀어붙이는 결단력이 있었다. 또 솔선수범의 리더십이었고, 따뜻하게 포용하는 리더십이었다. 투쟁적인 분처럼 보이지만 속은 누구보다 따뜻했다. 의회민주주의에 바탕을 둔 비폭력 투쟁 리더십을 늘 지향했다."

- YS가 대통령이 되기 전에는 주변 사람들의 말을 잘 경청하는 장점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는데, 대통령 취임 이후에는 남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는 지적도 있는데.

"김 전 대통령은 늘 남의 이야기를 잘 경청했다. 이같은 장점 덕분에 YS를 만난 많은 사람들은 그를 따르고 좋아하게 됐다. 당시 YS를 만났던 재야 인사들도 '오늘 할 말 다했다, YS가 잘 들어줬다'고 흐뭇해 하곤 했다. 그런데 대통령이 되시고 2년쯤 지나니 자기 말씀을 많이 하셨다. 아마도 대통령이 하는 일에 대해 남이 잘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해 그랬을 것이다. 또 대통령이 가장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바깥 사람들의 얘기가 답답해 보였을 수도 있다. "

- YS에게는 공과가 모두 있었는데, 이를 나누어 설명해달라.

"금융실명제와 공직자 재산 공개를 통해 부정부패 척결 기반을 마련했다. 또 '하나회'란 군의 사조직을 척결함으로써 군부 쿠데타와 군부 통치의 가능성을 종식시켰다. 오늘날의 본격적인 지방자치도 김 전 대통령이 시작했다. 민주주의 기초와 틀을 만드는 작업을 김 전 대통령이 다했다. 또 5·18특별법을 만들어 역사 바로세우기를 했다. 대통령이라고 하더라도 부패하거나 민주주의를 파기한 사람은 용납되지 않는다는 취지였다. 과(過)가 있다면 크게 두 가지가 거론된다. IMF(국제통화기금) 외환 위기를 맞은 것과 측근의 국정 개입 논란이다. 국정 개입 논란과 관련해 문제가 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차남인 김현철씨의 의혹이 지나치게 과장된 측면도 있다. 또 외환 위기 문제의 경우 위기 관리를 잘못한 것은 책임이라고 볼 수 있지만, 당시 강대국들이 자국 이익만을 염두에 둔 외환 정책을 추진하면서 경제적인 약소국들이 희생양이 된 측면도 있다. 또 과거 정권부터 오랫동안 누적된 경제 문제들이 김 전 대통령의 임기 말에 터져나온 점도 있다. YS가 정권을 재창출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후 정권에서 민주화의 공이 DJ쪽으로만 갔던 경향이 있었다. 정치학자나 역사가들이 냉철하게 중립적인 입장에서 YS의 공과에 대해 재평가해야 한다."

- 향후 YS 기념 사업은 어떻게 진행되는가.

"김영삼 민주센터를 중심으로 김 전 대통령의 기록을 남기고 재평가하는 작업을 진행해 나갈 것이다. 그러면서 민주주의 가치를 시민들에게 교육시키고, 전문성을 지닌 정치인들을 양성하는 역할도 병행할 것이다."

■김덕룡 민추협 이사장 프로필
전북 익산 출생 - 서울대 문리대 사회학과 - 제13∼17대 국회의원 - 정무제1장관 - 민자당 사무총장 - 한나라당 부총재·원내대표·18대 총선 중앙선대위 공동위원장 - 청와대 국민통합특별보좌관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대표 상임의장-민주화추진협의회 이사장(현) 세계한민족공동체재단 총재(현) 세계한인상공인총연합회 이사장(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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