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부 안병용 기자

[데일리한국 안병용 기자] 차창(車窓)밖으론 형형색색의 꽃들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생명의 경이로움을 노래한다. 그 너머에는 녹슨 가시 철조망이 군데군데 빈 초소와 함께 이어지며 금단(禁斷)의 땅임을 보여준다. 가야 할 곳과 갈 수 없는 곳이 극명하게 엇갈리는 이 길의 끝엔 ‘통일의 관문’이 자리잡고 있다.

영화 제목으로 친숙한 공동경비구역(JSA) 경비대대에 들러 보안서약을 한뒤 황량한 대지가 펼쳐진 비무장지대(DMZ)를 또다시 달린다. 남북이 서로를 가장 가까이서 마주한다는 그곳이 눈에 들어왔다. 가슴이 '쿵쾅'거린다. “아! 이곳이 판문점이구나!”

2018년 4월을 관통하는 시대정신은 무엇일까. 불과 5개월 전 북한 병사 오청성은 판문점에서 총성에 쓰러지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2018 남북정상회담’을 아흐레 앞둔 지난 18일, 지구상 마지막 냉전지인 한반도 ‘분단의 상징’ 판문점을 찾으며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맴돈다.

판문점에는 공기부터 다른 긴장감이 감돌았다. 군사분계선(MDL)을 기준으로 최신식 외양을 갖춘 남측 자유의집·평화의집과 상대적으로 높낮이가 낮고 낡아 보이는 외관의 북측 판문각·통일각이 묘하게 '대치'하는 느낌이 들었다.

영화에서처럼 남북한 군인들이 마주선 채 뚫어져라 서로를 감시하는 모습은 눈에 띄지 않았다. "평상시엔 카메라를 통해 상호 돌발상황의 발생을 억제하고 있다"는 김영규 유엔군사령부 공보관의 설명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유엔사령부 소속 및 남북의 군인들이 MDL 앞에서 삼엄한 경비를 펴는 경우는 서로의 판문점 관람객을 보호하는 업무를 수행할 때라는 설명도 곁들여졌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는 생각이 잠시 스쳐갔다.

남북 경계선에 자리잡은 3개(T1·T2·T3)의 유엔사 회담장 건물은 중립지대다. 이 가운데 T(Temporary)2로 발걸음을 옮기니 다양한 크기의 탁자와 의자들이 빽빽히 나열돼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중 길다란 탁자 하나는 군사분계선에 의해 정치적으로 갈린 ‘분단의 테이블’이었다. 테이블 반은 남측, 반은 북측 땅에 걸치고 있는 모습이 씁쓸함과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주로 회담 장소로 쓰이는 우리측 '평화의 집'은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공사가 한창이었다. 근접 취재는 전혀 허용되지 않았다. 20년전 1001마리의 소떼를 이끌고 방북한 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가 문득 떠올랐다. “길이 없으면 길을 찾고, 찾아도 없으면 만들면 된다”는 아산의 어록처럼 27일 남북정상회담이 없던 길을 새로 만드는 돌파구가 될 수 있을까.

김대중 대통령은 지난 2000년 당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만나 ‘6·15 남북공동선언’을 통해 처음으로 자주적인 평화 통일의 방안을 제시했다. 2007년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도보로 군사분계선을 넘어 평양에 도착해 김정일 당시 위원장과 ‘10·4 남북공동선언’을 통해 종전 선언을 처음으로 언급했다. 김대중· 노무현 · 김정일 등 남북정상회담을 만들어낸 역사의 주역 3인은 모두 고인이 됐다.

이제 문재인 대통령이 오는 27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만나 두 전직 대통령이 못 다 이룬 역사의 실마리를 풀기 위한 거보를 내딛는다. 종전 선언을 통해 궁극적인 평화협정 체결, 한반도 비핵화 등 굵직한 현안이 논의될 평화의 집에는 지금 전세계인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가시적인 결과물이 도출된다면 내달 북미정상회담에 이어 남북미 또는 중국까지 포함한 남북중미 정상회담을 거쳐 ‘종전 선언’이라는 궁극적인 평화체제 구축도 논의될 것이다.

물론 말처럼 쉽지는 않을 터이다. 완전히 새로운 역사가 그처럼 술술 풀릴수는 없다는 것이야말로 준엄한 역사의 교훈이 아니던가. 다만 미국과 중국 등 정전 당사국들이 모두 평화협정 체결에 참여한다는 것은 한반도 비핵화가 ‘최종 단계’에 진입하고 있음을 시사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매우 크다.

본래 널판지를 이어 만든 '문짝'과 '다리'가 있다는 뜻의 순우리말인 ‘널문리’가 판문점(板門店)으로 불린지 어언 65년이 넘었다. 역사의 현장을 둘러보면서 수발의 총상을 입고도 기적적으로 판문점을 넘어 대한민국 땅을 밟은 북한 군인 오청성의 모습이 아른거리는듯 했다. 이국종 교수의 집도로 기적적으로 회생한 그는 남북한 분단의 산물인 동시에 우리가 보듬고 잘 키워내야 할 상징적 존재로 여겨졌다.

4·27 남북정상회담이 남북간 진정한 화해·협력의 길로 들어설 수 있는 믿음직한 '다리'가 되기를 기대한다. 그래야 '갈 수 없는 곳'도 거리낌없이 건널 수 있을테니까.
 

저작권자 © 데일리한국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