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패션 대결 ⑯ 남성 구두]

한때 금강·에스콰이아·엘칸토 등 토종 브랜드 전성기… 외환위기 이후 일부 몰락

상품권 남발·수입 브랜드 등장으로 토종 위기… 최근 디자인 혁신으로 젊은층 접근

90% 이상의 재구매율을 자랑하는 리갈. 사진=금강제화 제공
[데일리한국 동효정 기자] 1954년 10월, 작은 구둣방을 운영하던 서른여덟의 김동신씨가 서울 서대문구 적십자병원 맞은편에 ‘금강제화산업사’를 열었다. 전쟁이 끝나고 ‘양복 입은 신사’들이 늘어가던 1960년대, 신사화를 사려면 주문 제작을 해야 했지만 금강제화는 ‘기성화’ 시장을 공략했다. 이후 에스콰이아, 엘칸토 등 국내 토종 업체들이 등장하면서 한국 구두 시장을 이끌어갔다.

없어서 못 팔던 3대 토종 제화 브랜드…외환위기 때부터 일부 몰락

지금은 해외 브랜드와 운동화 등에 밀리고 있는 3대 토종 제화 브랜드 금강제화와 에스콰이아, 엘칸토가 국내 제화 시장을 쥐락펴락하던 때도 있었다. 1980년대 추석, 구두를 사기 위해 기다리던 사람들에 밀려 명동의 금강제화 매장의 유리창이 깨지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당시 3대 토종 브랜드들은 정말 '없어서 못 팔'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1년에 두 번있는 세일 기간에는 영업 시간이 채 끝나기도 전에 셔터 문을 내려야 했다.

수입 브랜드가 넘볼 수 없는 제화시장의 절대강자로 군림했던 토종 브랜드들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신규 브랜드의 도전, 수입 신발의 공세 속에서 '한우물'을 판 기업은 그런데로 실적을 유지했지만 그렇지 않은 곳은 차례로 문을 닫았다.

에스콰이아(기업명 이에프씨)의 창업자인 고 이인표 회장은 1961년 9월 명동의 33㎡(10평) 남짓한 작은 가게에서 사업을 일으켰다. 그는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최고급 수제화 생산에 매달렸고, 에스콰이아는 1970년대 '대통령이 신는 구두'로 이름을 알리면서 대기업 오너가 직접 방문해 주문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하지만 에스콰이아는 의류 사업에 뛰어들면서 위기를 맞았다. 1988년 '비아트'를 통해 의류 사업을 무리하게 확장했고, 상품권 경쟁에서 백화점에 밀리면서 경영이 악화됐다. 2009년 사모펀드 H&Q아시아퍼시픽코리아에 매각된 이후에도 실적은 매년 곤두박질쳤다. 2010년 72억원이던 영업이익은 2012년 53억원의 적자로 돌아섰다. 에스콰이아는 지난해 본사를 다시 서울로 이전하고 다방면의 노력을 했지만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에스콰이아는 결국 지난달 31일 패션그룹형지의 계열사인 교복업체 에리트베이직의 손으로 넘어갔다.

1957년 미진양화라는 상호로 출발한 엘칸토는 1977년 지금의 이름으로 바꾼 후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엘칸토 역시 외환위기 직후 부도 처리된 다음 잠시 살아났다가 2004년 다시 법정관리에 들어가는 등 험난한 세월을 겪었다. 그 사이 대주주는 모나리자(2005년)로, 이랜드(2011년)로 바뀌었지만 현재까지 자본 잠식 상태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엘칸토의 지난해 매출은 310억원으로 10년 전인 2003년 748억원에서 반토막이 났다.

신도림 디큐브시티의 엘칸토 매장. 사진=엘칸토

부동의 업계 1위 자리를 지켜온 금강제화는 그나마 사정이 좀 나았지만 실적이 10년 사이 눈에 띄게 나빠진 것은 마찬가지다. 2003년 4493억원에서 지난해 3485억원으로 매출이 감소했다. 이 과정에서 국내 최초의 기성화 매장이었던 3층 규모의 금강제화 광화문점은 2006년에 사라졌다. 지난 60년 동안 '신발'과 '가죽'이라는 한 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보수적 경영이 성장을 가로막긴 했지만 장수의 원동력이 됐다.

외환위기만 문제였을까. 60년 금강제화 역사만큼 브랜드도 '올드하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소비자와 전문가들은 토종 제화 브랜드가 최근 10여년 간 급변한 국내 소비문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것이 화근이었다고 지적한다. 20대 패션 블로거는 “요즘 트렌드를 선도하는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조금만 더 시간과 비용을 투자하면 인터넷에서 해외 직구(직접구매)로 ‘처치스’나 ‘크로켓앤존스’ 같은 고품질 수제화를 얻을 수 있는데 굳이 ‘노티’가 나는 토종 브랜드를 고집할 필요가 없다는 인식이 강해졌다”고 말했다.

2000년대 들어 외국산 유명 브랜드들이 온라인에서 입소문을 타고 인기를 모으면서 주요 백화점들이 잇따라 외국산 구두를 취급하는 편집숍을 내세우는 것도 토종 브랜드 부진의 원인이다. 소비자들이 이전까지 구두를 단지 ‘발 보호용’ 정도로 인식했다면 지금은 '패션의 완성'으로 인식하고 있다. 소비자들이 그만큼 우수한 품질과 끌리는 디자인을 갖춘 외국산 브랜드로 눈을 돌렸다는 이야기다.

수입 브랜드가 틈새를 공략하자 토종 제화 브랜드는 구두상품권을 남발하고 할인율을 높이는 데 급급하다가 정작 중요한 제품 가치를 끌어올리는 데는 실패했다. 품질과 디자인 개선이 근본적 해결책임에도 눈앞의 손익에 현혹돼 이를 소홀히 했다는 것이다.

제화업계 관계자는 “1994년 백화점상품권 등장 이후 각 업체들이 구두상품권을 헐값에 판매하면서 할인율이 높아지고 제품 가치는 떨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됐다”며 “1980년대 때처럼 구두상품권에나 의존하려고 한 안일한 대응이 위기를 키운 것”이라고 분석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소비자들이 뭘 원하는지 근본적으로 고민해야 할 때”라며 “비단 제화 브랜드뿐 아니라 자동차·식음료 등 소비재 산업 전반에서 해외직구로 넘어간 소비자들의 발길을 되돌릴 만큼 제품과 가격면에서 혁신을 이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꼬집었다.

'노티 난다' 외면 받던 남성구두, 20대 잡기 위해 안간힘

600만 관객 돌파를 앞둔 영화 ‘킹스맨’의 해리 하트(콜린 퍼스)는 임무 수행 중 죽은 동료의 가족을 찾아 전화번호가 적힌 메달 하나를 건네며 “위급한 일이 생겼을 때 이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어 ‘브로그 없는 옥스퍼드’라고 하면 우리가 도와줄 것이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주목해야 할 부분은 브로그 없는 옥스퍼드다. 정장 구두의 가장 기본이자 정석이 바로 브로그 없는 옥스퍼드 구두이기 때문이다. 앞코에 아무 무늬가 없는 끈 있는 구두는 정장을 위해 기본적으로 갖춰야 하는 구두다.

클래식 구두 열풍을 몰고 온 영화 '킹스맨' 스틸컷.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는 영화 속 대사와 함께 유행이 된 '브로그 없는 옥스퍼드'는 클래식 구두 시장에도 새 바람을 몰고 왔다. 더블 브레스티드 슈트에 빳빳하게 다린 셔츠, 매듭의 볼륨감이 돋보이는 고전적인 넥타이, 깨끗한 구두, 포마드를 발라 정갈하게 빗어 넘긴 머리. 완벽한 ‘신사’의 모습의 재조명 받자 젊은이들도 '클래식 구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6일 금강제화에 따르면 리갈의 대표 모델 MMT0001은 지난해 총 3만 6000 켤레가 판매된 가운데 20~30대 고객이 1만 1000 켤레(31%)를 구입해, 1954년 리갈이 첫 선을 보인 이후 처음으로 20~30대의 구매 비율이 30%를 넘었다.

이는 2010년 리갈 MMT0001 전체 구매층의 20% 초반에 불과했던 20~30대 구매 비율이 지난해에는 주 고객인 40대(34%), 50대(32%)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성장한 것이다. 특히 20~30대 사이에서 불고 있는 리갈 MMT0001의 인기는 리갈의 전체 판매량(17만 2000 켤레)을 2013년(16만4000 켤레)에 비해 5% 증가시키는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금강제화는 리갈 MMT0001의 인기를 바탕으로 리갈의 고객층을 더욱 확대하기 위해 캐쥬얼 감성을 담은 ‘리갈 스트리트’ 라인을 속속 출시해 젊은 층 공략에 나서고 있다.

금강제화 관계자는 “리갈은 한국 대표 신사화로서의 정통성은 유지해오면서 시대의 흐름에 맞는 고객의 요구를 읽어가며 디자인에서 혁신해왔기 때문에 최신 트렌드를 선호하는 20~30대부터 정통 신사화를 선호하는 중·장년층까지 전 세대를 아우르는 남성화로 사랑 받게 된 것”이라며 "앞으로도 리갈의 영속성을 더욱 키워가기 위한 마케팅 활동과 다양한 라인으로 제품을 출시하며 소비층을 늘려가겠다”고 말했다.

금강제화뿐 아니라 남성 정장 구두 산업은 전반적으로 소비자의 입맛에 맞춰 혁신을 거듭하고 있다. 한국 생산성본부가 시행한 국가브랜드 지수인 NBCI 조사에 따르면 2014년 구두 시장의 평균은 71점이다. 지난해 2점 상승의 추세를 이어 올해에도 2점 올랐다. 금강제화가 2점 상승한 76점으로 1위를 차지했다. 에스콰이아(71점), 소다(68점), 탠디(68점)가 그 뒤를 이었다. 1위 금강제화는 2위 에스콰이아와 점수 차이를 5점으로 벌렸다. 소다와 공동 3위를 기록한 탠디는 지난해 소다와의 1점 차이를 0점으로 좁히는데 성공했다.

소모품 무상 A/S를 통해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는 탠디. 사진=탠디 제공

남성 정장구두 산업은 브랜드 간 경쟁력 차이가 점차 줄어들고 있다. 이는 침체된 시장을 살리기 위해 모든 브랜드가 품질 향상과 상품 다양화를 시도하면서 소비자에게 다가간 결과로 판단된다.

탠디는 업계 최초로 뒷굽 등 소모되는 부속품에 대해 무상 A/S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제품 구매 연도, 수선 횟수에 관계없이 평생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또 탠디는 연령대별로 취향을 고려한 다양한 라인으로도 사랑받고 있다. 특히 탠디옴므의 블랙라벨은 40~50대를 주 소비층으로 보고 유럽식 디자인과 트렌드를 반영해 독점 계약된 이태리 수입 피혁으로 맞춤 제작하고 있다. 소다는 2014년 드라마 ‘미생’에서 배우 임시완이 신은 남성 정장구두 브랜드로 알려지면서 많은 남성들의 주목을 받았다.

업계 관계자는 "편하고 실용적인 것을 추구하는 현대사회의 분위기에 따라 정장구두가 운동화나 로퍼 등에 밀렸던 것은 사실이지만 남성들이 새로운 '반란'을 시도하고 있다"면서 "개성을 표출하면서도 다시 격식을 차리고 규격화된 형식을 따르는 고전미에 눈을 뜬 고객들이 많아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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