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비공개 회의, 시기·장소·참가자 등 영화와 다른 점 상당해

영화 '국가부도의 날'에서 한국과 IMF 측 관계자들 간 구제금융 협상 비공개 회의 장면. (사진=다음 영화 국가부도의날 페이지)

한민철 기자 kawskhan@hankooki.com

영화 ‘국가부도의 날’이 개봉되면서 실존인물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특히 영화의 주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는 IMF 구제금융 협상을 위한 비공개 회의에서의 한국과 IMF 측 실무 담당자들에 대한 정보는 관람객들의 주요 리뷰 소재다. <주간한국>은 당시 비공개 회의에 참석해 실무 역할을 담당했던 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 간부 A씨가 회의 상황에 대해 증언한 내용을 지난해 11월 취재한 바 있다. 본지는 당시 A씨의 증언을 복기해보며 영화 ‘국가부도의 날’에서 그려진 IMF와의 비공개 회의와 실제와의 상당한 차이점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의 배경인 1997년 말, 당시 외국 투자자들은 한국 투자에 발을 빼는 동시에 국내 단기외채에 대한 만기연장을 일제히 거부하면서 국내 경제 불안이 급증했다.

영화에서 배우 김혜수씨가 열연한 한시현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은 이런 상황을 미리 파악했고, 국가 경제 위기상황에 관한 리포트를 작성해 관계 부처에 보고했지만 매번 묵살당했다.

뒤늦게 한국은행 총장(권해효씨)은 한시현 팀장과 당시 당면한 사태에 대해 청와대 경제수석(업효섭씨)에게 알렸다.

이에 재정국 차관(조우진씨)과 금융실장(김형묵씨)와 함께 비공개 대책팀이 꾸려졌지만, 한시현 팀장과 재정국 차관 사이 의견이 엇갈리며 갈등이 생기기 시작한다.

특히 재정국 차관이 IMF 구제금융을 대책으로 내놓자, 한시현 팀장이 이를 반대하며 자산유동화증권(ABS)을 발행하거나 일본 정부로부터 달러를 빌려오는 등의 대책을 제안하자 두 사람의 갈등은 정점에 이른다.

영화에서 한시현 팀장(김혜수씨)과 재정국 차관 사이 의견이 엇갈리며 첨예한 대립을 보인다. (사진=다음 영화 국가부도의날 페이지)

청와대 경제수석이 IMF 구제금융에 신중한 입장을 보이자, 갑작스럽게 청와대 경제수석이 교체됐고 이 새 경제수석(김홍파씨)은 IMF 구제금융에 당장 찬성하는 결정을 내놨다.

물론 새 경제수석은 재정국 차관과 함께 언론에는 IMF 구제금융을 부정하는 한편, 뒤에서는 IMF 총재(뱅상 카셀씨) 등 IMF 관계자들과 서울 그랜드 힐튼호텔에서 첫 번째 비공개 협상을 나눈다.

이 협상에서 IMF 측은 구제금융에 나서는 대신 한국 측에 무리한 요구를 해왔고, 한시현 팀장과 한국은행 팀원들이 이를 격렬히 반대했지만 결국 그해 12월 3일 새 경제수석과 IMF 총재는 기자들 앞에서 악수를 나누며 한국에 550억 달러를 지원하는 내용의 구제금융 합의서에 사인했다.

비공개 회의, 날짜ㆍ장소ㆍ참석자 등 영화와 실제 매우 달라

영화가 그려낸 당시 금융위기의 원인과 상황은 사실과 부합한다. 1997년 초 한보그룹의 부도와 지속적 환율 상승, 10월 기아자동차의 법정관리 신청, 11월 해태그룹·뉴코아·미도파 등 기업들의 줄도산, 환율 방어 위한 외환보유고 바닥 등 영화와 실제가 대부분 맞아떨어진다.

물론 인물 설정에 있어 몇 가지 허구가 드러난다. 우선 영화에서 한시현 통화정책팀장은 가상의 인물이다.

또 영화에서는 당시 새로운 청와대 경제수석이 재정국 차관과 함께 IMF 협상을 주도하며 12월 3일 IMF 구제금융 합의서에 서명한 것으로 나오지만 이 역시 사실과 다르다.

당시 11월 19일 김인호 경제수석과 강경식 경제부총리가 전격 경질됐고, 임창렬 재경부 장관이 새로운 부총리로 선임돼 IMF 협상을 주도했다.

이후 12월 3일 미셸 캉드쉬 IMF 총재 옆에 앉아 합의 내용 발표 및 서명에 나선 인물도 임창렬 부총리였고, 그는 새로운 경제수석이 아니었다.

지난 1997년 12월 3일 임창렬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오른쪽)이 세종로 청사에서 미셸 캉드쉬 총재에게 IMF 긴급 자금지원을 받기 위한 의향서에 서명 후 전달하고 있다. (사진=연합)

영화 속 인물들의 직함과 직책에서도 실제와는 차이가 있었다. 재정국 차관은 재정경제원 차관이 올바른 직함이었고, 한국은행 총장 역시 총재라는 직책이 옳았다.

무엇보다 영화에서 IMF 관계자들과 힐튼호텔에서 벌인 비공개 협상 역시 사실과 다른 점이 상당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본지는 당시 비공개 회의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진 전 재경부 금융정책실 간부 A씨의 증언을 취재하며, 그때의 상황과 영화 내용과의 차이를 자세히 파악해 볼 수 있었다.

우선 영화에서 IMF 측과 한국 측 관계자들이 첫 번째 만나는 자리에서 IMF 측은 IMF 총재를 비롯한 약 5인의 관계자들이 한국에 왔다.

한국 측에서는 가상의 인물인 한시현 통화정책팀장과 한국은행 총재 등 한국은행 관계자들과 새로운 경제수석, 재정국 차관과 금융실장 등이 참가했다. 또 영화에서는 비공개 회의의 날짜를 11월 25일경으로 설정했다.

그러나 A씨에 따르면 첫 번째 비공개 회의에 참가한 인물들과 시기, 장소 모두 영화는 실제와 달랐다.

IMF 측과의 첫 번째 비공개 회의는 청와대에서 IMF 구제금융의 가능성에 대해 언급한 직후에 이뤄졌다.

실제로 그해 11월 14일 강경식 경제부총리는 기자간담회에서 김영삼 대통령에 “미국 등 우방으로부터 돈을 빌려보겠으나 여의치 않으면 IMF로 가야 한다”라고 보고했고, 김 대통령 역시 이와 같은 지시를 내렸다는 사실이 밝혀진 바 있다.

이로부터 이틀 뒤 미셸 캉드쉬 IMF 총재가 극비에 방한했다. A씨는 당시 미셸 총재와 동행한 IMF 관계자는 휴버트 나이스 IMF 아시아·태평양국장 등 소수였다고 증언했다.

한국 측에서는 A씨와 강경식 부총리,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 엄낙용 재정경제원 제2차관보 등이었다. 이들의 협상회의 장소는 그랜드 힐튼호텔이 아닌 강남구 삼성동의 인터콘티넨탈호텔이었고, IMF 측 관계자들은 한국에 도착해 저녁을 먹고 다음날 협상회의에 들어간 것으로 전해졌다.

때문에 영화에서는 IMF 측과의 첫 비공개 회의가 11월 25일경 이뤄지는 것으로 묘사됐지만, 실제로는 아직 강경식 부총리가 경질되기도 전인 11월 17일경에 이뤄졌고, 그 역시 회의에 참가했다.

A씨는 과거 IMF에서 근무했던 경험으로 IMF 측 관계자들과 안면이 있었고 당시 비공개 회의에서 실무과장을 담당했다. 그는 IMF 측이 구제금융 제공에 따라 무엇을 요구할지 미리 파악해 놓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A씨는 당시 비공개 회의에서 실무과장으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채 한밤 중 협의과정에서 매우 고생했고, 회의에서 수렴한 사안에 대해 새벽에 청와대에 가서 김인호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에 보고했다고 밝혔다.

물론 당시 협상 사실이 언론에 보도될 것을 우려해 일부러 새벽에 청와대로 이동했다는 사실도 덧붙인 바 있다.

영화에서는 청와대 경제수석이 비공개 대책팀을 직접 지휘한 것으로 나와있지만, 이 역시 사실과 달랐다. (사진=다음 영화 국가부도의날 페이지)

그렇다면 IMF 측과의 회의에서 영화에서는 청와대 경제수석이 참석했다고 그려져 있지만, 이 역시 사실과 달랐다.

영화에서 그린 비공개 회의는 11월 26일 휴버트 나이스 IMF 아시아·태평양국장이 주도한 대표단과의 협상과 시기가 비슷하지만, 이때는 실제 첫 번째 비공개 회의 그리고 영화와는 다르게 미셸 캉드쉬 IMF 총재가 협상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다.

IMF 구제금융 사인 그 이후

영화에서 IMF 측이 한국 측에 요구한 사항은 영화와 실제가 동일했다. IMF 측은 당시 한국에 구제금융 지원을 약속하면서 선결 조건으로 금리를 인상하고 긴축정책을 실시할 것 등을 요구했다.

영화에서는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인물이 한시현 팀장뿐으로 나머지는 쉬쉬한 것으로 그려냈지만, A씨는 이 부분과 관련해 당시 IMF 측과 한국 측 실무진이 상당한 의견 마찰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이유는 IMF 측이 당시 한국이 안고 있던 부채의 본질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A씨는 “당시 IMF 구제금융을 받았던 다른 국가들의 사례에서 라틴아메리카 외채위기나 스칸디나비아 통화위기 등에는 외채가 많았고, 대부분이 정부부채였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정부부채는 거의 없었고 대부분이 민간외채였다”라며 “IMF 측이 긴축정책하고 금리를 올리자고 해서 기업들이 어려운 상황에 구조가 더 나빠지는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우리가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라고 증언했다.

결국 영화에서처럼 IMF 측의 무리한 요구에 따를 수밖에 없었지만, 이것은 엄청난 후폭풍을 몰고 왔고 A씨는 이후 휴버트 나이스 국장으로부터 당시 결정에 대해 사과를 받았다고 증언했다.

영화에서는 IMF 측의 요구대로 종합금융사를 정리하며 외국 금융사들의 국내 진출이 자유로워지는 방안으로 흘러갔는데, 이 부분을 어쩔 수 없이 수긍한 것에도 이유가 있었다.

1997년 12월 IMF로부터 구제금융 지원이 확정된 직후 TV영상. (사진=연합)

사실 당시 국내에는 부실채권이 많아 BIS(자본건전성) 비율이 굉장히 낮았다. IMF를 겪으면서 당시 국내 5대 은행이었던 조흥은행, 제일은행, 한일은행, 한국상업은행, 서울신탁은행 등이 전부 인수합병돼 사라졌다. 그만큼 국내 은행들이 부실하다는 의미였다.

당시 협상에서 이들 금융기관을 살릴 방안으로 공적자금의 규모를 계산해 봤지만, 역부족이었다. 당시 정부가 조성할 수 있는 공적자금은 약 64조원에 불과했고, 이는 당시 국내 금융기관의 부실을 정리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미국의 지난 2008년 리만브라더스 사태 당시 미국 재경부가 TARF 부실자산 구제기금을 만들었고, 당시 공적자금 펀드 규모가 7800억달러, 한화 900조원에 가까웠다.

한민철 기자 kawskhan@hankook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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