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 소득과 취향 다양화·유커 등장으로 화장품 유통채널 경계 무너져

패션 명품, '작은 사치' 바람에 화장품 시장 진출…'저렴이' 제품도 성장

대기업 '매출 쏠림'으로 양극화되는 중저가 시장…일부 중소업체 부진

분리되어있던 명품·중저가 화장품의 판매영역이 허물어지고 있다. 사진=아모레퍼시픽 제공

[데일리한국 이서진 기자] 서울 삼성동에 위치한 복합 쇼핑몰 코엑스몰에는 현재 다양한 화장품 브랜드들이 입점해 있다. 지난 2014년 리모델링 공사를 마친 코엑스몰은 개편 이후 저가 브랜드에서부터 고가의 명품 브랜드까지 한 번에 살펴볼 수 있는 공간으로 바뀌었다. 이곳에는 영국 명품 브랜드 버버리 뷰티박스, 니치향수 브랜드 딥디크 매장이 입점해 있다. 바닐라코, 라네즈 등 중저가 브랜드와 함께 더페이스샵, 아리따움 등 저가 로드숍 브랜드들도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복합 쇼핑몰뿐 아니라 백화점, 면세점 등의 화장품 매장 지형도에도 변화가 생기는 중이다. 명품 일색이던 면세점에는 중저가 국산 화장품의 점유율이 높아지고 있다. 지난해 12월 개점한 서울 용산 HDC신라면세점은 전체 150여개 화장품 중 국산 중저가 브랜드가 총 70여개로 절반 가까이를 차지한다. 최근 새로 단장한 롯데백화점 소공동 본점의 지하1층에는 다비, VDL, 한스킨 등 명동에서 인기를 얻은 중저가 브랜드가 대거 입점했다. 반면 1층에는 입생로랑, 조말론, 나스 등 명품 매장이 새로 들어섰다. 분리돼 있던 명품·중저가 화장품의 판매 영역이 허물어지고 있다.

명품과 중저가 화장품이 한 유통채널에 공존하는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은 소비자들의 소득과 취향, 우선시하는 가치가 엇갈리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화장품 시장의 주요 고객으로 부상한 중국인 관광객(유커)들은 값싸고 질이 좋은 'K-뷰티'(한국 화장품)에 열광하고 있다. 장기간 지속되는 불황으로 인해 지갑이 얇아진 사람들도 중저가 브랜드로 눈을 돌렸다. 이런 가운데 여전히 명품 화장품의 높은 인지도와 고급스러움을 선호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백화점 관계자는 "중저가 브랜드들이 가격경쟁력과 품질을 기반으로 주도권 다툼을 벌이고 있다면 명품 브랜드들은 전통적인 베스트셀러를 발전시켜 세련된 용기 디자인과 추가된 기능으로 고객을 끌어들이고 있다"면서 “최근 고객들은 희소가치가 있을 정도로 비싼 ‘귀족’ 브랜드를 찾는 사람들과 저렴하면서 성능이 좋은 제품을 원하는 부류로 나뉘고 있다”고 밝혔다.

지금까지 고가의 가방·신발 등을 팔아온 명품업체들은 소비자들의 욕구를 반영해 화장품 시장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사진=LG생활건강 제공

패션 명품, ‘작은 사치’ 바람에 화장품 시장 진출

국내 명품 시장은 실속을 중시하는 트렌드에 밀려 2~3년 전부터 위축돼왔다. 불황기가 지속되자 비교적 부담이 없는 금액으로 ‘작은 사치'(Small Luxury)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작은 사치를 원하는 소비자들은 주로 일상적인 소비여력 안에서 스스로에게 만족감을 선사하는 품목을 구매한다.

지금까지 고가의 가방·신발 등을 팔아온 명품업체들은 소비자들의 욕구를 반영해 화장품 시장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업계 관계자는 “경기가 좋지 않을 때 명품업체들이 화장품 사업에 진출하는 것은 세계적인 추세”라며 “명품 브랜드들은 패션으로 굳힌 고급 이미지를 화장품에 적용할 수 있고 소비자는 비싼 가방 등을 대신해 명품 로고가 찍힌 화장품으로 대리만족을 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톰포드는 화장품 브랜드인 ‘톰포드 뷰티’를 현대백화점 판교점에 입점시켰다. 앞서 톰포드는 갤러리아백화점 압구정점과 현대백화점 압구정점에서 각각 매장을 운영하며 하이엔드(최고급) 이미지를 형성했다. 메이크업 제품 9만, 스킨케어 15만~26만, 립스틱 6만 원대 등으로 가격대는 다소 높지만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에르메스 또한 작년에 '에르메스 퍼퓸 부티크'를 신세계백화점 본점 1층에 선보였다. 에르메스 뷰티라인의 대표 품목은 향수로 주요 가격대는 20만~40만 원선이다.

구찌도 지난해 구찌 코스메틱을 통해 국내 화장품 시장에 나왔으며, 마크 제이콥스, 돌체엔 가바나도 도전장을 던졌다. 패션브랜드 토리버치도 2014년 신세계백화점과 손잡고 토리버치 뷰티를 론칭했다. 이후 스킨케어·향수·향초 등으로 꾸준히 제품군을 넓혀가는 중이다.

명품 화장품 시장이 확대되어 가는 동안 명품과 닮은 ‘저렴이 화장품’은 원조와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사진= 온스타일 '겟잇뷰티' 방송 캡처

성장하는 저렴이 화장품

명품 화장품 시장이 확대돼가는 사이에 명품과 닮은 ‘저렴이 화장품’은 원조와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저렴이 화장품이란 고가의 명품 화장품과 성능과 색감이 비슷하면서도 가격은 낮은 상품을 뜻한다. 품목은 기초화장품인 수분크림과 에센스부터 색조화장품인 아이라이너, 마스카라, 립스틱, 아이섀도까지 다양하다.

저렴이 화장품은 합리적인 가격을 앞세워 소비자들 사이에서 인지도를 높여가는 중이다. 명품 모방에 대한 비난과 우려에도 불구하고 특히 젊은 층에서 지지를 얻고 있다. 저렴이 화장품은 주로 명품과 노골적으로 닮은 제품을 만들어 이를 홍보하면서 성장한다. 소비자들이 먼저 명품과 비슷한 제품을 발견해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 정보를 공유하기도 한다.

에스쁘아 퓨어 래디언스 글로우라이저는 윤광 베이스 아이템의 대표주자인 M사 스트롭 크림의 닮은꼴 저렴이 제품이다. 진주 추출물과 화이트 펄 캡슐이 피부색을 환하게 보정해주고 보습 성분을 60% 이상 머금은 젤 타입 수분 에센스가 메이크업 제품의 밀착력을 높인다. 가격은 2만8,000원이다.

네이처리퍼블릭 샤인 블라썸 블러셔 1호 핑크 블라썸은 B사의 베스트셀러 블러셔와 흡사한 색상으로 인기를 모았다. TV프로그램 ‘겟잇뷰티’에서 명품 닮은꼴 저렴이 화장품으로 소개되기도 한 이 제품은 6,900원의 부담 없는 가격을 자랑한다. 자연스러운 컬러와 미세한 펄이 섞여 화사한 피부 연출이 가능하다.

N사의 벨벳 매트 립 펜슬은 여성들 사이에서 세련된 레드를 가장 잘 표현하는 색상으로 사랑받고 있다. 비슷한 발색력을 가진 우드버리 퍼펙트 울트라 립 펜슬 벨벳 레드 누오보는 1만6,800원이다. 한 온라인 게시판을 통해 이 제품에 대한 입소문이 퍼져 공동 구매 붐이 일어나기도 했다.

중저가 화장품 시장에선 대기업 계열사로 매출이 집중되면서 업체 간 ‘빈부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 사진= 코리아나 화장품 제공

양극화되는 중저가 화장품 시장

중저가 화장품 시장은 대기업 계열사로 매출이 집중되면서 업체 간 ‘빈부 격차’가 벌어지는 분위기다. LG생활건강의 더페이스샵과 아모레퍼시픽의 이니스프리는 승승장구하고 있다. 반면 한때 점유율 1위였던 미샤를 비롯한 일부 중소업체들은 부진을 면치 못해 양극화가 심화됐다. 몇 년 간 불어온 K-뷰티 열풍에 호황을 누리던 화장품 업계에는 지각 변동이 일어나고 있다.

지난해 금융감독원 공시에 의하면 더페이스샵의 연간 매출은 2012년 4,381억 원, 2013년 5,472억 원, 2014년 6,106억 원으로 신장세를 보이며 2년 연속 브랜드숍 매출 1위에 올랐다. 이니스프리는 연간 매출에서 2012년 2,294억 원, 2013년 2,328억 원, 2014년 4,567억 원으로 빠른 성장세를 보이며 업계 2위를 기록했다.

하지만 2012년 4,529억 원의 매출을 자랑하던 미샤는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미샤는 2013년 더페이스샵에 1위 자리를 내줬다. 2014년에는 매출이 4,383억 원에 그쳐 이니스프리에 2위 자리까지 빼앗겼다. 중소업체인 스킨푸드 역시 2012년 매출이 1,850억 원으로 오른 후 2013년 1,746억 원, 2014년 1,518억 원으로 연간 100억 원 이상의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

국내 매장 수도 매출 성적을 반영해 조정됐다. 더페이스샵은 2013년 1,076곳에서 이듬해 1,187개로 매장이 늘어난 반면, 미샤는 국내 매장 수를 50여개 줄여 720여 곳만 남았다.

이처럼 업체 간 양극화가 심화되는 이유는 대기업 계열사들이 낮은 판매 원가와 마케팅 측면에서 유리하기 때문이다. 대중국 수출의 주된 경로였던 보따리상 규제가 본격화되고 유력 화장품 업체들이 위탁제조생산(OEM) 사업으로 몰리면서 큰 기업만 살아남게 됐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드럭스토어들의 확산도 영향을 끼쳤다. 하나의 브랜드 상품만을 판매하는 브랜드숍과 달리 드럭스토어에서는 100여개 안팎의 브랜드를 한 번에 접할 수 있다. CJ그룹 계열사인 ‘올리브영’과 GS리테일이 지분을 가진 ‘왓슨스’는 지점을 늘려 현재 각각 443곳, 104곳의 매장을 운영 중이다.

업계 전문가는 "자금력이 든든한 대기업의 다양한 제품군, 유통 채널 확장 능력, 발 빠른 마케팅 등을 감안하면 앞으로 중소 브랜드숍 업체들의 경쟁 상황은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그는 "드럭스토어와 로드숍 브랜드의 성장으로 중가 브랜드의 입지가 좁아졌다"면서 “가격이든 품질이든 소비자를 끌 수 있는 경쟁력을 갖추는 것이 급선무"라고 조언했다.

저작권자 © 데일리한국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