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좌 임대 땐 600만원 입금?… 먹튀 후 납치 스미싱 등 범죄 이용
금감원 관계자 "처벌 못하는 사례 너무 많아… 법 조항 문제 있다"

최근 C(38)씨는 한 통의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XXX투자회사에 근무하는 세무팀 담당 이민호 팀장이라고 합니다. 투자회사를 운영하다보니 세금이 45% 이상입니다. 사용 안 하는 계좌를 임대해주시면 450만~600만원을 드립니다. 정상적인 계좌로 확인되면 바로 입금해드리겠습니다." 카드빚에 허덕이던 C씨는 통장만 주면 최대 600만원을 준다는 메시지를 읽고 솔깃했다. '정말 통장을 빌려주면 돈을 주는 걸까?'

C씨가 문자에 찍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이민호 팀장'에게 속아 자신의 통장을 넘겨줬을 가능성이 높다. 범죄조직은 C씨 통장을 '대포통장'으로 삼아 순진한 누군가에게 마수를 뻗칠 것이다. 이를테면 "당신 아들이 납치됐으니 돈을 보내시오"라고 부모들을 전화로 협박할 때 C씨 통장을 이용하는 식이다. 경찰은 통장을 넘긴 C씨를 불러 범죄조직과 연루됐는지 캘 것이다.

포털사이트를 검색하면 타인에게 계좌를 빌려주고 땅을 치며 후회하는 이들의 사연을 손쉽게 찾을 수 있다. 일반인뿐 아니라 미성년자에게까지 범죄의 손길이 뻗치고 있다. 고등학생인 A군은 포털 사이트에 계좌 임대 사기를 당했다는 글을 올려 도움을 청했다. "휴대폰을 하다 계좌임대를 해주면 매달 돈을 부쳐주겠다는 글을 읽고 혹해서 계좌를 양도했다. 은행계좌와 체크카드를 만들어 보냈고 돈이 들어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자 계좌를 임대해 간 사람과 연락이 끊겼다. 뒤늦게 후회를 하고 은행에 가보니 사기 계좌로 등록이 됐다. 경찰서에 자수를 해야 할지 고민이 된다. 너무 무섭다."

서울지방경찰청 국제범죄수사대는 최근 수백여 개의 유령법인을 세운 뒤 1만여 개의 대포통장을 범죄조직에 팔아 100억원 가량의 이득을 챙긴 국내 최대 대포통장 유통조직을 구속한 바 있다. 이 조직은 임대받은 통장을 도박사이트 등 범죄조직에 개당 100만원에 판매한 것으로 드러났다. 판매총책, 모집책, 공급책, 운반책 등 역할을 세분화하는 등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춘 이들은 오토바이로 대포통장을 배송하고 판매 대금을 현금으로 거래하는 수법으로 오랫동안 경찰 추적을 따돌렸다. 이들은 비밀번호 입력오류 등으로 대포통장 사용에 문제가 발생할 경우 비밀번호를 재설정해주는 등 사후관리까지 한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 추적을 오랫동안 따돌릴 만큼 조직적으로 활동할 뿐만 아니라 성인과 미성년자를 가리지 않고 서민을 등치는 대포통장 사기는 우리 사회에 얼마나 뿌리 깊게 박혀 있을까.

금융감독원이 발표한 '대포통장 현황 및 발급 실태'에 따르면 연간 약 5만개 이상의 대포통장이 피싱ㆍ대출사기에 이용된다. 특히 대포통장 발급 및 유통은 2012년 4만3,539건에서 지난해 5만660건으로 대폭 증가했다. 더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은행권을 통한 대포통장 발급 비중이 계속해서 줄고 있다는 점이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제1금융권 대포통장은 줄고 있지만 새마을금고 및 우체국 등 제2금융권 대포통장은 큰 폭으로 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지도ㆍ감독이 상대적으로 소홀한 타 권역(제2금융권)으로 대포통장이 이동하는 풍선효과가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보도자료 등을 통해 꾸준히 '통장 임대'의 위험성을 알려 온 금융감독원은 대포통장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금융감독원 서민금융사기대응팀 관계자는 "계좌 임대를 했다면 전자금융거래법 위반"이라면서 "범죄에 이용되지 않았더라도 통장을 양도ㆍ대여하면 3년 이하의 징역이나 2,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관계자는 현재 법 조항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대포통장을 넘긴 사람이나 넘겨받은 사람이 처벌받지 않는 사례가 많다는 것이다. 그는 "거의 처벌을 받지 않는다"는 표현까지 썼다.

"대포통장 피해 사례가 엄청나게 많습니다. 지금까지 몇십만 건이 발생했어요. 대포통장은 모든 범죄에 이용될 수 있어요. 단순한 법 위반으로 생각해선 안 돼요. 모든 범죄의 매개체로 간주해야 합니다. 그런데 현재 법 조항으론 대포통장을 처벌하기 힘들어요. 수 년 전의 한 판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통장을 넘겨받은 사람은 '고의성이 없었다'고 주장했고 넘겨준 사람은 '나도 속았다'고 주장했죠. 결국 둘 다 무혐의 처분을 받았습니다. 현재 마련돼 있는 법 조항이 실효성이 없다는 걸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죠. 법은 금융위원회 소관이기 때문에 금감원이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금융위에 실질적인 법 조항이 필요하다고 계속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금융위원회는 어떤 대책을 마련하고 있을까. 금융위원회 전자금융과 관계자는 "전자금융거래법의 실효성 문제를 파악하고 있다"면서 "지난해 12월 '신변종 금융사기 종합 대책'을 내놨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통장을 양도 및 대여하면서) 실제로 대가가 오가지 않았더라도 모두 처벌할 수 있도록 법 개정을 준비하고 있다. 조만간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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