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훈 산업2부 기자.
[데일리한국 이창훈 기자] 지난 4월8일 국내 항공산업을 환히 비추던 큰 별이 졌다. 전 세계 항공사들의 줄도산 위기 속에서도 탁월한 리더십과 전문성으로 대한항공을 명실상부한 글로벌 항공사로 키워낸 거목(巨木)이 갑자기 쓰러지면서 정·재계 모두 큰 충격에 빠졌다. 향년 70세를 일기(一期)로 세상을 떠난 고(故) 조양호 한진그룹 전 회장의 이야기다.

조양호 전 회장의 별세는 한진그룹 내부에서도 전혀 예기치 못했던 청천벽력 같은 사건이었다. 조 전 회장은 지난 3월 대한항공 정기 주주총회를 앞두고 “흔들림 없이 한진그룹을 경영하겠다”는 뜻을 주변에 공표하고 다닐 정도로 건재했다. 그랬던 그가 불과 한 달여 만에 “가족과 잘 협력해서 사이좋게 이끌어나가라”는 단 한 문장의 유훈(遺訓)을 남긴 채 홀연 세상을 떠난 것이다.

재계는 고 조양호 전 회장의 죽음을 사정기관의 무차별적 수사와 국민연금의 경영권 압박 등으로 인한 “비극적 죽음”이라고 평가한다. 지난해에만 11개의 사정기관이 한진그룹을 상대로 수사를 벌였고, 관련 압수수색만 18회에 달했다. 고 조양호 전 회장이 포토라인에 선 횟수도 무려 네 차례다. 지난 3월에는 국민연금의 반대로 고 조양호 전 회장이 대한항공 사내이사에서 물러나는 일마저 벌어졌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고인을 쓰러뜨린 외풍은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지난해 한진그룹을 뒤흔든 외풍은 고 조양호 전 회장의 자녀들의 ‘갑질 논란’이 불거지면서 시작됐다. 2014년에도 마찬가지였다.

고 조양호 전 회장은 2014년 장녀인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이른바 ‘땅콩 회항’ 사건 때문에 공개 사과했다. 고인은 2014년 12월12일 서울 공항동 대한항공 본사에서 “내가 (자식) 교육을 잘못시켰다”며 고개를 숙였다. 심경을 묻는 질문에는 “참담하다”는 짧은 답변으로 대신했다.

고 조양호 전 회장이 세상을 떠난 지 8개월 후인 지난 23일 조현아 전 부사장이 법률대리인을 통해 경영권 분쟁을 예고하는 수준의 강도 높은 입장문을 발표했다. 남동생인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이 고 조양호 전 회장의 유훈과 달리, 가족 간의 합의 없이 독단적인 경영을 하고 있다는 것이 골자였다.

조 전 부사장의 법률대리인인 법무법인 원은 한진그룹 지주회사 한진칼의 최대주주인 그레이스홀딩스(KCGI) 등과 협의할 의사가 있다는 입장까지 내놨다. 최악의 경우, 조 전 부사장 측이 KCGI와 협의해 조원태 회장의 경영권을 박탈할 수 있다는 가능성마저 열어둔 셈이다. 공교롭게도 그레이스홀딩스는 조 전 부사장의 입장 발표 날인 23일에 한진칼 지분을 추가 취득해 17.14%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고 공시했다.

재계에서는 조 전 부사장의 입장 발표를 두고 여러 해석이 나왔다. 조원태 회장이 지난달 미국 뉴욕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가족 간의 합의가 됐다는 취지로 언급해 조현아 전 부사장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얘기부터, 조 회장이 한진그룹 연말 인사에서 조 전 부사장의 측근들을 대거 퇴진시킨 것이 화근이 됐다는 말까지 다양한 시나리오가 흘러나왔다.

이유를 불문하고 조원태 회장이 누나인 조현아 전 부사장과 한진그룹 경영에 대해 충분한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조원태 회장이 가족들과 충분히 소통하지 못해 경영권 분쟁 우려가 불거졌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현아 전 부사장이 내년 3월 한진칼 정기 주총을 앞두고 동생인 조원태 회장과의 경영권 분쟁을 암시하는 내용의 입장을 발표한 것이 적절해 보이지는 않는다. 고 조양호 전 회장의 부재로 무너져 내린 한진그룹 총수 일가의 리더십을 재건하고, 그룹을 둘러싼 대내외 위기를 돌파해야 하는 중차대한 시점에, 남매간 경영권 분쟁을 예고하는 입장을 내놨기 때문이다.

더욱이 자신을 포함해 한진그룹 총수 일가의 갑질 논란 등에 대한 비판 여론이 아직도 여전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조 전 부사장의 입장 발표는 ‘한진그룹 재건’에 찬물을 끼얹을 소지가 다분해 보인다.

조현아 전 부사장의 입장 발표 이후 한진그룹 직원들은 벌써부터 고용 불안 등을 호소하는 분위기다. “임직원 모두가 합심해도 그룹 위기 상황을 돌파할 수 있을지 미지수인데, 총수 일가끼리 다투고 있는 게 말이 되느냐”는 볼멘소리마저 터져 나온다. 허희영 한국항공대 경영학과 교수는 “한진그룹 총수 일가의 경영권 다툼 때문에 한진그룹 경영권이 사모펀드로 넘어가면, 국내 항공 산업의 중심축이 무너질 수 있다”고 경고하면서 “조현아 전 부사장의 입장 발표는 한진그룹의 위기 상황을 감안하지 않은 성급한 행동”이라고 지적했다.

조현아 전 부사장은 동생인 조원태 회장이 고인의 유훈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고 작심 비판했다. 하지만 경영권 분쟁을 암시하는 조 전 부사장의 입장 발표가 과연 고 조양호 전 회장의 유훈을 오롯이 지킨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구심이 남는다.

취재 현장에서 수차례 고인을 접했지만 고인이 남긴 유훈의 의미를 정확히 짚어내기는 쉽지 않을 수도 있다. 다만 대내외 악재와 자녀들의 갑질 논란 등 온갖 위기 속에서도, 대한항공의 50년을 흔들림 없이 지켜낸 고인의 유훈이 자녀들의 경영권 분쟁으로 인한 한진그룹의 ‘공중분해’가 아니라는 것은 너무나 명확해 보인다. 고 조양호 전 회장이 지금 살아있다면, 큰딸인 조현아 전 부사장의 행보를 과연 용인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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