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되고' 재판은 계속돼야 한다.

법무법인 '민행(民幸)'의 조민행 대표 변호사.
[데일리한국 전문가칼럼=조민행 법무법인 민행 대표변호사] 대한민국 헌정 71년 역사상 처음으로 전직 대법원장이 구속됐다. 수용자 번호 1222호 피의자 양승태가 바로 그 장본인이다. 우리 헌정사 최초는 물론 근대시민국가 성립 이후 혁명이나 전시가 아닌 상태에서 전직 대법원장이 구속 된 것은 세계사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검찰이 청구한 구속영장에 적시된 범죄혐의는 40여 개에 이른다.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민사소송 ‘재판거래’와 옛 통합진보당 의원 지위확인 소송 개입, 그리고 헌법재판소 내부정보 유출, 사법부 블랙리스트 작성 혐의는 재판의 독립이나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과 같은 중대한 헌법적 가치를 훼손하는 범죄다. 법원 공보관실 운영비로 비자금 3억5000만원을 조성했다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법조계 종사자로서 참담하기 그지없다.

양 전 대법원장이 구속 전에 보여준 일련의 행태는 국민들을 더욱 실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듯 했다. 피의자로 검찰에 출석하기 전 대법원 정문 앞에서 자신의 입장과 소회를 밝히는 기자회견을 자처한 것도 국민의 눈높이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는 영장실질심사에서는 "실무진이 한 일이라 알지 못한다.", "대법원장으로서 죄가 되는 일을 하지 않았다"며 혐의를 극구 부인했다.

또한 검찰이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 수첩에 적힌 ‘사법농단 기록’을 제시했을 때도 "자기가 살기 위해 나를 모함한 것”이라거나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는 전언이다. 법조계 수장을 지낸 인물로서 그 어느 대목에서도 멋진 구석이나 당당함을 찾기 어렵다.

이제 대한민국 사법부는 양승태 구속 이전과 이후로 명확히 구분된다. 이 사건으로 지금까지 타인의 잘잘못을 판단하는‘심판의 주재자’였던 법원이 이제는 자신 역시 ‘심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확인했기 때문이다.

사법부의 독립은 절대 보장돼야 한다. 하지만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명제 또한 불변의 사실이다. 통제없는 권력이 바로 절대권력이 아닌가. 행정부나 언론, 여론, 혹은 재벌이나 이익집단 등이 사법부에 대해 부당한 간섭을 하는 것은 배제돼야 마땅하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법원의 재판이 국민과 동떨어진 '진공상태'에서 이뤄져야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여전히 입법부와 행정부 그리고 사법부 사이의 견제와 균형이 필요하다. 또한 일선 법관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법관회의의 제도화나 법원행정처의 기능 축소 등과 같은 제왕적 대법원장을 견제할 수단 확보가 반드시 필요하다. 아울러 주권자인 국민이 적정한 재판권 행사 여부를 감시할 필요성은 더욱 강조돼야 한다. 선출되지 않은 사법권력에 대한 국민들의 참여와 감시는 민주적 정당성의 관점에서 이해돼야 한다.

검찰은 사법행정권 남용을 주도한 혐의로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두 전직 법원행정처장 등을 우선 재판에 넘긴 뒤, 사법농단에 관여한 의혹이 있는 법관들을 다음 달 중 일괄해 기소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범죄에 가담한 법관들에 대해서는 불관용의 원칙에 따라 추가 징계나 국회의 탄핵 소추가 진행돼야 한다. 사법권의 독립을 침해한 자에 대해 단호히 대처하는 것이야말로 재판의 독립을 확보하고, 궁극적으로 우리 정치공동체 최고 규범인 헌법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굳게 믿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토록 만신창이가 된 사법부에 과연 희망이 남아 있을까? 하나의 사례를 짚어보면 해답이 보일 듯 싶다. 이탄희 판사는 지난 2017년 2월 법원행정처 제2심의관 발령을 받았다. 당시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은 이탄희 판사에게 ‘판사 블랙리스트’의 존재를 언급하며 특정 학회를 와해시킬 방안을 마련하고, 판사들 뒷조사를 하라고 지시했다. 30대의 젊은 법관은 이에 항의하고 결연히 사표를 냈다. 당시 국제인권법연구회 간사였던 김형연 부장판사는 3월 ‘대법원장님에게 드리는 청원문’을 코트넷에 올렸다. 그리고 이에 대해 200여 명의 일선 판사들이 과감히 자신의 실명을 걸고 댓글을 올렸다.

이후 김명수 대법원장은 지난해 6월 양승태 사법부의 ‘재판거래’의혹 수사에 적극 협조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 후 검찰은 100여 명의 전·현직 판사 및 관련자들에 대한 조사에 들어갔고, 대법원과 법원행정처를 압수수색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지난 24일 양승태 전 대법원장 구속으로 단막극이 일단 끝났다. 2년이 채 안되는 기간동안 이뤄진 이같은 일들은 사법부 역사에 오점으로 기록될 것이다.

오늘날 사법부가 이처럼 지리멸렬해진 것은 정치권력의 부당한 침해를 받아서가 아니다. 헌법이 부여한 재판권을 국민의 기본권 보장이 아닌 법원의 이익을 위해 정치권력과 담합하다가 파산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사법부가 국민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방안이 과연 있는지 짚어보자. 법원의 희망은 바로 법원 내부에 있다. 문제 해결의 출발점은 바로 그 문제 자체에서 비롯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판사들 뒷조사를 하라는 불법적인 지시를 단호히 거부한 젊은 법관이 없었다면, ‘대법원장님에게 드리는 청원문’을 코트넷에 올린 중견 법관이 없었다면, 이 청원문에 자신의 실명을 걸고 댓글을 단 200여 명의 용기 있는 법관이 없었다면 아마 전 대법원장 구속이라는 드라마는 결코 현실 속으로 튀어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어느 시인의 노래말을 빌릴 것도 없이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된다'. '양승태 구속' 이후에도 재판은 계속돼야 한다. 고려시대 고승인 보조국사 지눌은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를 통해 “땅에서 넘어진 자 그 땅을 딛고 일어선다. 땅을 떠나서 일어나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갈파했다.

이번 양승태 단막극 내내 떠오르는 단어는 바로 '결자해지(結者解之)'다. 법원 구성원들이 분발심을 내서 현재의 난관을 딛고 다시 일어서야 한다. 법원이 뼛속까지 완전히 새롭게 바뀌고 거듭나야 대한민국이 산다.

■ 조민행 법무법인 '민행' 대표변호사

고려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직에 근무했고, 사법시험도 통과해 현재 법무법인 민행(民幸)의 대표 변호사로 재직중이다. 대통령 직속 북방경제협력위원회 위원과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대변인으로 활동하면서 남북 분단시대를 극복하고 한반도의 새로운 세계를 여는데 기여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한반도종단철도(TKR)가 시베리아횡단철도(TSR), 중국횡단철도(TCR)와 연결돼 남북경협과 북방경제협력이 본격화되는 날을 꿈꾸는 '실천적 이상주의자'로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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