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기 대선후보들은 '의회주의자'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선거 영향력부터 우선 배워야

소통과 개혁 능력, 청렴성도 적극 수용해야… 임기 초 강력한 개혁으로 지지율 정점

경제관리 능력·통일 준비 분야에선 YS의 빛과 그림자 모두 배워서 비전 제시해야

배종찬 리서치앤리서치 본부장

[데일리한국= 배종찬 리서치앤리서치 본부장 칼럼] '나는 1927년 12월 20일 남해의 한 섬에서 태어났다. 1남 5녀 중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때부터 어업으로 꽤 크게 집안을 일구었고, 아버지도 멸치 어장을 운영했다. 돌이켜보면 나중에 정치권에서 활동할 때 고향집에서 보내준 멸치를 안 먹어본 선후배·동료들이 없었을 것이다. 풍파가 심한 정치권에서 그래도 집안이 어느 정도 살 만해 곁눈질하지 않을 수 있었다. 어릴 때 나는 할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나를 무척이나 예뻐해주시는 할아버지의 정신 세계를 쫓아 지금의 모습으로 성장했다. 특히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발을 들인 기독교는 평생 나의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중학교는 집에서 멀지 않은 통영으로 진학했다. 일제 시대 학교 생활은 고달팠다. 1945년엔 부산에 있는 경남중학교로 전학했다.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대통령의 꿈을 이 때부터 가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누군가 장래의 희망이 무엇인지를 물어오면 거의 반사적으로 ‘미래의 대통령은 김영삼’이라고 답했다. 책상 머리맡에도 같은 글귀를 붙여놓았다. 나는 대학 재학 중에 장택상의 비서관이 되었다. 첫 정치 입문이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에 마산 규수를 만나 결혼했다. 첫 눈에 반했고 평생 나의 동반자가 되어준 사람이다. 54년에 고향에서 자유당 후보로 출마했다. 만 26세 전국 최연소로 국회의원이 되었다. 최다선인 9선까지 하게 되는 국회에 발을 들여놓은 역사적 순간이었다. 의정 활동을 시작한 직후 나는 당시 대통령이던 이승만에 3선 개헌은 불가하다는 입장을 전했다. 그러나 사사오입 원칙을 내세워 개헌이 통과되자 나는 동지들과 함께 탈당했다. 이 때부터 파란만장한 야당 국회의원 생활이 시작되었다. 이후 나의 정치역정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 독재와의 투쟁사(鬪爭史)였다. 민주당 구파로 분류되는 나는 1964년 한일 굴욕외교에 반대했고 69년 '40대 기수론'을 주장했다.

1971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섰으며 평생의 라이벌이 된 김대중과 겨루었다. 승자는 그였으며 패자는 나였다. 많은 사람들은 우리 두 사람이 평생 반목한 것으로 기억하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두 사람은 친구 관계를 넘어 동지였다. 그가 신민당 대선후보가 되었을 때 나는 ‘그의 승리가 곧 나의 승리’라고 외치며 남해에서 한강까지 그의 지원 유세를 마다하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 하에서 초산테러도 당했고 당사로 피신해온 YH여공들을 강제 진압한 군사정권과 맞섰다. 미국 유수의 신문 인터뷰에서 박정희정권을 강하게 부정한 죄목으로 헌정 사상 유례가 없는 현직 국회의원 제명을 당했다. 나는 ‘잠시 살기 위해 영원히 죽는 길을 좇지 않을 것이며 일순간 죽더라도 영원히 사는 길을 선택한다’는 심정으로 이겨냈고 결국 승리했다. 내가 수십년 간 살았던 상도동 이웃들이 가장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내 모습은 전두환 정권에서 가택연금된 시절이었다. 나는 집을 둘러싼 경찰대에 외쳤었다. "내 몸은 가둘수 있을지 몰라도 민주화를 향한 내 마음은 그리고 양심은 (전두환이가) 가두지 못해." 가장 힘들었던 기억은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낸 후 치러진 대통령선거에서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고 ‘군정 종식’을 못한 것이었다. 나는 숱한 번민과 고민 끝에 3당 합당으로 국면 전환을 시도했다. 많은 비판에 직면했지만 분열된 야권으론 다음 대통령선거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 굴로 들어간다.’

천신만고 끝에 대통령이 되고 난 후에 '신한국 창조'를 위해 모든 열정을 바쳤다. 잘한 일도 있었고 국민들의 매서운 비판에 직면할 때도 많았다. 88년 간 인생 여정을 되돌아보면 ‘영광의 순간은 짧았지만 고통과 고뇌의 시간의 길었다.’ 이제 모든 짐을 내려놓고 역사의 뒤안길로 떠나려 한다. 나는 대한민국의 제 14대 대통령 거산(巨山) 김영삼이다.'

한국 정치의 풍운아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난 22일 새벽 노병을 이기지 못하고 서거했다. 그의 서거 뒤에 수많은 정치적 해석과 아쉬움 그리고 그리움이 이어진다. 88년을 살다간 그의 민주화 역정을 그리고 통치 내용을 꼼꼼히 들여다보는 것이 중요하겠지만 더 중요하게 반추해야 할 내용은 그가 정치 후배들에게 남긴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유산이다. 그의 삶은 대통령 당선이라는 영광과 함께 하지만 오랜 민주화 투쟁과 재임시의 얼룩진 평가도 공존하고 있다. 한국 역사에 남긴 김영삼 전 대통령에 대한 공과(功過)는 역사가 평가할 것이다. 여기서는 그가 남긴 정치적 유산을 더 활용할 방법을 고민해 보았다. 전직 대통령과 유력 정치인이었던 김영삼으로부터 정치 후배 특히 차기 대선후보들이 배울 교훈은 무엇일까. 5가지 정도로 분석하면 우선 선거 영향력이다. 일반적인 대중 정치인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비전을 선거 승리를 통해 실현할 수 있었던 남다른 능력이 있었다. 다음으로는 소통과 개혁 능력이다. 차기 대선후보들에게 무엇보다 요구되는 덕목이다. 세 번째로는 청렴함이다. 칼국수로 상징되는 김 전 대통령의 삶은 청렴 그 자체였다. 부정부패를 일소하지 않고서는 신한국 창조가 불가능하다는 의연한 결의는 스스로의 청렴함에서 비롯된다. 네 번째로는 경제 관리 능력이다. 김 전 대통령은 5년 간의 국정운영을 마치 ‘민주화 투쟁’처럼 숨가쁘게 주도했다. 조금 더 정교하게 통치능력을 발휘하고 집권 이전에 충분히 준비할 수 있었더라면 그에 대한 평가의 전부가 되고 있는 IMF(국제통화기금) 외환 위기를 비켜갈 수 있지 않았을까? 마지막으로 통일 준비였다. 87년 대통령 선거 이전 창당한 정당의 이름이 ‘통일민주당’일 정도로 남북관계에 관심이 많았던 김 전 대통령이었다. 그러나 집권 이후 남북관계의 획기적 진전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94년 8월로 예정된 김일성과의 남북 정상회담이 무산되고 북미 관계가 냉각되면서 통일 공감대는 후퇴하고 말았다.

한국갤럽이 지난 8월 4~6일 실시한 조사(전국1000명 휴대전화RDD조사 표본오차95%신뢰수준±3.1%P)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대통령으로서 잘한 일이 많다고 보는지 잘못한 일이 많다고 보는지’ 물어본 결과, ‘잘한 일이 많다’는 의견은 16%에 그쳤다. ‘잘못한 일이 많다’는 응답은 42%나 되었다. 그렇지만 평가를 유보한 경우가 10명 중 4명이 넘는 42%였다(그림1). ‘잘못한 일이 많았다’는 응답자의 상당수는 ‘IMF 외환 위기 초래’를 그 이유로 들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평가를 미루고 있고, 평가의 대부분이 IMF 외환 위기에 편중된 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서거를 통해 재조명이 이루어지고 있는 김 전 대통령의 전 생애를 돌아본다면 그리고 시간이 흐른 지금 IMF 외환 위기의 원인을 보다 더 객관적으로 진단한다면 국민들의 인식이 분명 달라질 것으로 전망된다. 무엇보다 정치적 리더십이 실종된 한국 정치에 김 전 대통령이 빛을 발한 이슈였든 아니면 그림자가 드리워진 국면이었든 후배 정치인들에게 던져주는 유산은 매우 거대하다.

선거·의회 중시한 YS의 선거 영향력을 우선 배워야

우선 선거 능력이다. 김 전 대통령은 단순한 민주 투사 차원이 아니라 민주화 세력을 정치력으로 승화시킨 경우였다. 함께 활동한 유력 정치인이였지만 이철승 같은 이는 지속적으로 미래 정치 세력으로 이어가지 못했다. 김 전 대통령은 자기 스스로 선거 능력을 확보해온 특징이 있었다. 기록의 사나이였다. 1954년 최연소 국회의원이 된 이래로 최다선인 9선 의원이었다. 정당 운영에서도 선거 영향력은 충분히 검증되었다. 의회주의자로 불리는 김 전 대통령은 누구보다 '선거'와 '의회'를 중시하는 정치인이었다. 군사정권 시절인 1985년 총선을 앞두고 대부분의 민주화운동 세력이 당초 '선거 보이콧'을 거론했으나 그는 과감히 '선거 투쟁'을 명분으로 총선에 적극 참여해 신한민주당 바람을 일으켰다. 이게 5공 정권 붕괴와 대통령 직선제 도입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 88년 총선에서는 그가 이끄는 통일민주당은 부산 지역에서 단 1곳을 제외하고 싹쓸이를 했다. 그리고 3당 합당으로 민자당 대표가 되어 대선 직전에 치른 국회의원선거에서 기대보단 적었지만 과반에 육박하는 결과를 만들었다(299석 중 149석). 부산 지역은 무소속 1곳을 제외하고 15곳에서 민자당 승리를 이끌었다. 3당 합당으로 비판이 잇따랐지만 결코 김 전 대통령의 선거 영향력이 줄어들진 않았다. 3당 합당에 대한 많은 비판이 뒤따르고 있다. 정치 윤리적으로 비판받아 마땅하겠지만 선거 공학적으로 김 전 대통령으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87년 대통령 선거에서 ‘4자 대결 야권 후보 필패론’이 적중하는 상황을 맛보았었다. 김대중 평화민주당 총재와 야권 통합을 할 수 없는 환경이라면 그리고 88년 국회의원선거에서 제 1야당의 자리를 평민당에 넘겨준 김 전 대통령으로서는 야권 통합에 따른 대선 출마가 쉽지 않은 국면이었다. 87년 대통령 선거에서 1위인 노태우 전 대통령은 2위인 김영삼과 김대중 후보에 비해 200여만표를 더 획득했었다. 집권여당에서 영남 출신 후보가 다음 선거에 출마하게 될 경우 ‘4자 대결’구도는 재현되고 선거 성격은 71년 때와 같은 ‘영남과 호남’의 지역 대결 구도가 될 공산이 높았다. 71년 신민당 경선의 트라우마가 있었던 김 전 대통령으로서 3당 합당은 ‘배신적 행위’라기보다는 ‘불가피한 선택’으로 다가왔을 것으로 분석된다. 무엇보다 김 전 대통령으로부터 차기 대선 후보들이 배울 유산은 선거 영향력이다. 차기 대선후보로 거론되는 김무성 대표와 문재인 대표 역시 선거 능력 즉 선거 영향력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대선 입지는 급격히 좁아진다. 김 전 대통령이 단지 민주화 투사에 그치지 않고 한국 정치사의 ‘큰 나무, 큰 그늘’로 남아 있는 데는 선거 영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선거 현장에서 김 전 대통령은 시대 정신을 읽어내는 능력과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포효하는 웅변력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내년 총선에서 차기 대선후보들이 얼마나 다른 정치인들의 당락에 영향을 줄지 그들이 펼칠 선거 영향력에 주목하게 된다.

소통과 개혁…임기 초 강력한 개혁으로 지지율 고공행진

다음으로는 소통·개혁이다. 김 전 대통령은 70년대와 80년대 ‘민주화’의 상징이었다. 엄혹한 한국 현대사에서 군사 정권이 지배한 70~80년대는 ‘민주화’가 시대정신이었다. 많은 학생운동이 이 땅에서 일어났지만 정치 세력화를 통해 제도권에 투영되지 않으면 목표달성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국민들과 소통한 김 전 대통령의 ‘민주화’는 평화적 방법이었고, 자기 희생이었다. 군부의 서슬이 퍼런 시절에 헌정사에 유례가 없는 국회의원 제명을 당했지만 그의 결기는 숨죽지 않았다. 국민들에게 그가 보여준 소통과 용기는 모든 국민들이 함께 항거할 수 있는 도화선이 되었다. 특히 전두환 정권 하에서의 ‘23일 단식’은 온 국민의 봉기를 이끌어내는 시대의 소통이 되었다. 대통령이 되어서도 소통 행보와 통합·화합 행보는 줄어들지 않았다. 언론이 김영삼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다고 할 정도로 언론을 통해 국민들과 대화하려고 노력했었다. 직접 현장을 방문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수시로 기자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 기회를 통해 민심을 읽고 임기 초반 거침없이 대도무문(大道無門)할 수 있지 않았는가. 국민들과 충분히 소통한 대통령이었다면 개혁이 빠질 리 없다. 30여년의 군사정권을 종식시키고 탄생한 문민정부에서 개혁은 필연적 선택이었다. 군대 내 특정 인맥 조직인 ‘하나회’를 해체하고 군부 쿠데타 가능성을 근본적으로 일소했다. 임기 1년차 김 전 대통령의 개혁 행보는 눈부셨다.

한국갤럽의 역대 대통령 지지율 분석에 따르면 하나회 척결과 금융실명제를 연달아 내놓으면서 대통령 지지율은 80%를 상회했다(그림2). 거의 폭발적인 국민들의 반응이었고, 김 전 대통령 특유의 ‘과감한 결정력’이 빛을 발한 시기였다. 오랫동안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던 고위공직자 재산등록, 조선총독부 건물 해체, 일제 시대의 잔재인 국민학교 명칭을 초등학교로 전환시킨 것도 김영삼정부의 작품이었다. 군사정권에 억눌려 왔던 국민들의 자존심을 한껏 높인 소통과 개혁의 산물이었다. 내년 총선에서 그리고 다음 대선에서 시대정신은 과연 무엇일까. 차기 대선후보들은 선거 승리 그 자체도 중요하겠지만 무엇보다 민심을 제대로 읽을 수 있어야 하고 개혁적인 자기 상품이 있어야 한다. 이제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거의 모두 알고 있는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김 전 대통령의 명언을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청렴성과 '칼국수'…대선후보의 부정부패 처신은 완벽해야

세 번째로 김 전 대통령이 남긴 유산은 청렴성이다. 김 전 대통령의 청렴함과 소탈함을 설명할 때 곧잘 등장하는 소재가 칼국수이다. 가장 서민적인 음식이기도하지만 ‘칼’국수라는 이름에서 개혁을 상징하는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제19대 국회도 그리고 현재의 박근혜 정부도 부정부패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김 전 대통령은 당선되고 난 후 정치와 기업의 결탁 이른바 ‘정경유착’에 주목했다. 이번 국회에서는 부정부패 척결과 직결되는 김영란법의 국회 통과에도 난항을 겪었다. 김 전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비밀리에 준비해서 93년 8월 12일 ‘금융실명제’를 전격 발표했었다. 당시에도 지금 국회처럼 부정부패 척결에 대한 저항이 강했다면 ‘금융실명제’ 법안이 과연 통과될 수 있었을까. 지도자는 무릇 자기 스스로 청렴해야 한다. 서거한 김 전 대통령의 뒤로 상도동 자택만 재산으로 덩그러니 남아 있다고 한다. 54년 국회 입성 이후 98년 2월 퇴임까지 40년 넘는 정치 여정이었지만 돈은 그에게 목표가 아니었다. ‘성완종 리스트’로 그리고 ‘방위 산업 비리’로 점철된 한국 사회의 현주소를 김 전 대통령의 유산을 안고서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

김 전 대통령의 업적으로 가장 크게 평가받아야 할 대목은 물론 ‘민주화’이다. 덧붙여 재임 중으로 눈을 돌리면 가장 큰 업적 중의 하나는 단연 금융실명제였다. 전격 발표한 다음날인 93년 8월 13일 한국갤럽이 전국 1058명을 대상으로 금융실명제 실시에 대한 의견을 조사한 결과 ‘잘한 일’이라는 평가가 87.1%로 압도적이었다. 잘못한 일이라고 평가한 사람은 3.3%에 그쳤다. 차명과 가명을 통해 부정한 거래를 일삼던 부정축재의 고리를 끊어내는 데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위대한 결정이었다. 차기 대선후보라면 도덕성 확보는 기본이다. 특히 부정부패에 대한 처신은 완벽에 가까워야 한다. 김 전 대통령이 금융실명제를 통해 국가 투명성을 높이려고 했지만 국가의 경제 규모에 비해 반부패 수준은 상대적으로 매우 낮은 상황이다. 부패가 많은 사회는 그 자체로서도 문제이지만 리더십을 신뢰할 수 없는 ‘저신뢰 사회’ 위협에 봉착하고 만다. 많은 사회적 저항을 예상했음에도 불구하고 개혁적인 금융실명제를 단행한 김 전 대통령의 유산을 이어 차기 대선 후보들도 국민 눈높이를 맞출 수 있는 ‘청렴한 대한민국 건설’의 청사진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

경제 관리 능력…IMF 외환위기 '반면 교사' 삼아야

다음으로 김 전 대통령으로부터 얻어야 할 유산은 경제관리 능력이다. 30여년 간의 군부독재와 맞서 싸운 김 전 대통령의 5년 간 국정운영은 마치 투쟁 같았다. 대중 소통과 개혁에서는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지만 관료 사회를 이해하고 정책을 조율하는 정교함은 떨어졌다. 개혁의 과도기라고는 하나 94년 성수대교가 붕괴되고 95년 삼풍백화점이 잇달아 붕괴되는 사고는 김영삼정부에 대한 믿음을 떨어뜨렸다. 문민ㅊ恝【?달라진 관료 사회가 나타난 점도 있겠지만 보다 더 정교하게 관리하고 경제 부분의 통치 능력을 가지지 못한 건 크게 안타까운 일이다. 차기 대선 후보들은 결국 국민들의 평가는 재임시의 경제적 성과에 집중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아무리 개혁의 전도사가 되어 정치적 현안들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더라도 경제 정책에서 별다른 성과 없이 유야무야된다면 어떤 평가일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김 전 대통령을 평가하는 조사 결과를 보더라도 부정 평가의 상당 부분이 ‘IMF 국가 부도 사태’로 귀결된다. 임기 초반 80%를 넘어 90%에 육박하는 초절정의 지지율을 보였지만 임기 후반 한자릿수의 참담한 지지율로 마감하게 된 것도 IMF 경제 위기 상황에 대한 국민들의 실망이 컸던 까닭이다. 김 전 대통령이 영면한 11월 22일이 공교롭게도 김 전 대통령이 IMF구제금융을 지원받기로 직접 발표한 날이었던 1997년 11월 22일과 일치해 만감이 교차된다. 퇴임 후 수개월이 지난후 실시한 국민 여론조사에서는 IMF 외환위기의 원인을 김영삼정부의 책임으로만 묻고 있지는 않았다. 리서치앤리서치가 1998년 10월 19일 전국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전화조사에서 ‘IMF 발생 원인이 무엇인지’ 물어본 결과 ‘김영삼정부의 잘못된 경제 정책’이 3명 중 1명 정도인 33%로 가장 높았다. 그리고 다른 원인으로는 ‘정경유착(27.1%)’, ‘국민의 과소비(21.7%)’, ‘기업의 부실 경영(16.5%)’이 뒤를 이었다(그림3). 우리 국민들 사이에서도 IMF 경제 위기의 원인에 대해서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재임시의 경제운용 능력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오늘날 박정희 전 대통령의 권력 형성 과정에 대한 수많은 비판이 뒤따름에도 불구하고 긍정평가가 높은 건 ‘한강의 기적'(경제 성과) 때문이다. 민주화가 된 이 마당에 차기 대선후보들의 자질로 경제운영 능력, 소위 통치 능력은 매우 중요해진다. 더 이상 영웅적 리더십이나 팬덤(일종의 매니아층, 예를 들어 콘크리트 지지층)현상에 기대어 대통령이 될 수는 없다.

통일 준비…남북관계 개선 시도했지만 별다른 성과는 없어

마지막으로 김 전 대통령을 통해 돌아볼 유산은 통일 준비이다. 무장공비로 어머니를 여읜 김 전 대통령의 정치 역정에 남북관계는 큰 관심사였다. 부모님과 관련된 개인사를 따진다면 철저하게 반공적인 태도를 취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민주화추진협의회 이후 결성한 정당의 명칭을 ‘통일민주당’으로 했을까. 취임 직후에도 남북 정상회담을 추진하고 적십자회담 등을 통해 남북관계 개선을 시도했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도리어 북핵 위협이 커지면서 남북관계는 경색된 채로 흘러가 버렸다. 통일과 남북관계, 국제안보에 대해 보다 더 구체적인 국정운영 능력이 발휘되지 못한 점이 아쉬운 부분이다. 박근혜 대통령도 현 정부에서 매우 중요하게 강조하고 있지만 차기 대선후보들에게 통일과 남북관계는 비켜갈 수 없는 주제이다. 김 전 대통령은 임기 동안의 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주로 하나회 척결, 역사 바로세우기 등 과거사 청산에 집중되어 있었다. 민주화 이후의 한국사회 운영을 계획한다면 통일국가, 통일된 한국 사회의 터전을 마련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박 대통령의 경우에도 남북관계 부침에 따라 얼마나 많이 지지율에 영향을 받고 있는가. 리얼미터가 머니투데이 더300의 의뢰를 받아 지난 10월 28일 실시한 조사(전국1000명 유무선RDD자동응답조사 표본오차95%신뢰수준±3.1%P)에서 ‘차기 대선후보로 거론되는 인물 중에서 남북 평화관계와 통일 실현을 가장 잘 할 후보가 누구인지’ 물어본 결과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33.8%로 가장 높았다. 김영삼정부에서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을 지낸 반 총장과의 인연이 새삼 눈길을 끈다.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가 22.3%로 2위였고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16%였다(그림4). 김 전 대통령이 관심을 가졌던 남북통일의 과업은 어떤 차기 대선후보에게 주어지게 될까.

김영삼 전 대통령은 그의 통치 내용을 통해 5가지 유산을 남겨주었다. 무릇 성공하기 위한 지도자로 우뚝 서려면 선거 능력 즉 정치 능력이 있어야 한다. 국민과 눈높이를 맞출 소통 능력과 거침없이 대업을 향해 나아가는 개혁 정신을 갖추어야 한다. 많은 견물생심의 유혹 속에서도 청렴함을 잃지 않은 김 전 대통령의 유산은 차기 대선후보들에게 특히 시사하는 바가 크다. 김 전 대통령의 생애에서 아쉬운 게 있다면 정치 후배들이 채워 넣으면 될 일이다. 대통령이 되는 지도자의 덕목에 경제운용능력 즉 통치능력은 필수적이다. 아직도 우리 국민들은 경제민주화에 더 큰 경제 성장에 그리고 국민 복지 증진과 고용 증대에 목말라 있다. 한편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온전히 보전하는 외교력과 남북관계를 개선하고 궁극적으로 통일에까지 이르게 하는 지도자의 능력은 절실하다. 아마도 김 전 대통령이 못다 이룬 이 유산이야말로 정치 후배들에게 당부하는 마지막 메시지일런지도 모르겠다. 한국의 외교적 위상 강화를 위해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에 가입하고 세계화에 박차를 가했던 김 전 대통령의 열정을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일부에서는 OECD 가입을 외환 위기의 원인으로 연결하는 해석도 있지만 국제적 위상 강화를 위한 일련의 노력에 대해 한 변수만을 가지고 무작정 폄하하려는 시도는 멈추어야 한다. 전직 대통령의 유산이 정치 혐오가 극에 달한 우리 시대에 그리고 후배 정치인들에게 ‘빛과 소금’이 되면 좋겠다. 우리 시대가 있게 한 거인, 거산(巨山) 김영삼 전 대통령의 명복을 빈다.

■배종찬 리서치앤리서치 본부장 프로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서울대 국제대학원, 고려대 행정학과 박사과정 수료- 한국교육개발원 전문연구원- 국가경영전략연구원 책임연구원- 한길리서치 팀장- 리서치앤리서치 본부장(이사,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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