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돌아봐' TV 프로는 갑 ·을 입장 바꿔 성찰하는 계기 제공

충무공, 일본군의 약점과 조선군의 자신감 부족 읽고 위기 극복

리더들, 상대 마음 읽기 위해 노력하고, 읽고 있다는 티라도 내야

천영준 연세대 기술경영연구센터 책임연구원
[데일리한국= 천영준 연세대 책임연구원 칼럼] 요즘 ‘나를 돌아봐’라는 TV 예능 프로그램이 인기다. 연예계 인기 스타들이 돌아가며 누군가의 매니저를 맡아 ‘을(乙) 체험’을 하는 것이다. 자신이 평소의 지위에 머물러 있을 때에는 겪어보지 못한 갑(甲)의 호통이나 닦달, 을의 설움 등을 몸으로 느끼며 자신을 되돌아 보는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나를 돌아봐' TV 프로 왜 인기인가?

시청자들은 자기가 잘 알던 선배의 하루 매니저를 하며 식사를 주문하고 전화로 약속을 잡으며 쩔쩔매는 스타들의 모습을 보고 웃는다. ‘그래, 너도 한번 그걸 겪어 보면 내 마음을 알아’라고 생각하며 위로받는 것이다. 강자에게는 강하고 약자에게는 약한 게 일반적인 사람 심리다. 그러나 정말 입장을 바꿔 보면 지난 날 자신이 얼마나 약자에게 덜 관용적인 인물이었는지 성찰하게 된다. 반성하면 고민하게 되고, 고민하면 누군가의 마음을 읽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진정한 리더는 이처럼 상대방의 마음을 입장 바꿔 헤아려 볼 수 있는 심중을 가진 사람이다.

충무공, 칼로 제압·붓으로 설득·말로 다독여

다가온 4월 28일은 충무공 이순신 탄신일이다. 언제나 임진왜란과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이순신 장군 이야기는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 바이블(Bible)이다. 지난해 영화 ‘명량’이 1200만명의 관객을 동원하고, 최근 광복 70주년 기념으로 KBS에서 ‘징비록’이 방영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충무공 이순신 같은 리더에 목말라 하는 것일까. 이미 교과서나 사료에서 배웠던 다양한 근거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그의 '마음 읽기'가 아닐까 싶다. 충무공을 인간적으로 가까이했던 재상 류성룡은 이순신이 일반적인 무장 같지 않은 인물이라고 평했다. 그의 저서 <징비록>에 등장하는 이순신은 차가운 이성과 날카로운 분석력을 지녔지만 선비와 같은 고요함과 담백함이 숨어 있는 선비다. 칼로 전장을 제압하지만, 붓으로 관료들을 설득할 수 있고, 말로 사람을 다독일 수 있는 사대부(士大夫)였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신언서판(身言書判)이 모두 훌륭했던 인물이었다.

문제는 이런 이순신의 기질이 눈치 보기에 급급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이면 얄미운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즉위 초부터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 등 당대 최고의 엘리트들을 참모로 거느렸던 선조는 자신의 권위를 소비하는 지도자였다. 힘에 대한 집착은 있었지만 아이디어는 별로 없었다. ‘나는 똑똑한 지도자다’라는 느낌에 취해 당파들이 제기하는 견해를 그때그때 취사선택하는 게 취미 생활이었다. 마음 읽기보다는 눈치 보기가 조선 정국을 지배하고 있었다. 당연히 이순신 같은 사람은 그런 상황에 어울리지 않았다. 우리의 상식과 달리 충무공은 처음부터 출세길이 막힌 무관이 아니었다. 함경도와 두만강 건너 녹둔도를 전전하며 혁혁한 전공을 쌓았던 그는 항상 조선 육군의 기대주였다. 그렇지만 선조 주변의 정치인 이일을 비롯해 현장에 총괄 감독 개념으로 파견되었던 관료들에게는 눈치 없이 저 혼자서만 당당한 사람이었다. 정황 상 자기 견해를 따라 달라는 최고 책임자의 부탁을 물리치고 무조건 현장 중심, 정세 중심으로 의사결정을 내리는 이순신의 마음 읽기는 그렇게 오해를 받았다.

따뜻함과 과감함도 있었다. 전라도 정읍 현감으로 부임할 당시 우의정 정언신이 유명한 ‘정여립의 난’에 연루되어 귀양을 가게 됐다. 이순신에게는 ‘이탕개의 난’ 당시 직장 선배로 모시던 사람이었다. 정언신은 이순신을 끝까지 괴롭혔던 송강 정철의 모함을 받아 남해 지역으로 유배되는 와중이었는데, 충무공은 그를 찾아가 국난의 상황에서 위기를 견딜 수 있는 ‘마지막 가르침’을 받는다. 왕은 갈팡질팡하고 신하들은 저 혼자서만 똑똑하니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주문이었다. 마음 읽기의 신념은 그렇게 강화됐다.

임진왜란, 심리학적 접근으로 극복한 전쟁

영화 ‘명량’에도 나오지만 왜란의 가장 큰 문제는 전력과 인프라가 아니라 전장을 지배하는 심리였다. 1592년 4월 광속으로 경상도와 충청도를 함락한 일본군이 도성을 점령하기 전까지 수많은 군대가 조선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일본군이 포르투갈에서 들여온 조총 쓰는 법을 비롯해 전국시대 동안 다양한 전술과 전략을 익혔던 반면, 조선군에는 손자병법도 제대로 연구한 장교가 없었다. 결국 '정보 비대칭' (Information asymmetry)은 신립이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는 최악의 전술을 구사하게 하고, 국왕이 수도를 버리는 참패까지 맛보게 한다. 마음 읽기의 전문가 이순신의 관점에서 조선 조정이 저지른 실수는 철저히 적군의 심리를 읽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것이었다. 우선 유교적 관료 윤리로 훈련받은 한성판윤 신립이 사령관으로 투입되거나, 형식과 체면을 중시했던 이일이 경상도 군대를 관리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전투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전장에 투입되니 적정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충무공, 일본군의 약점과 고민을 읽었다

이순신은 다양한 방법으로 연구한 결과 일본군의 가장 큰 고민이 군량과 병력 확보일 것이라고 여겼다. 군사를 아끼면서 전쟁을 하는 대륙과 달리 부품 개념으로 필사의 전투를 벌이는 데 병사를 투입하는 섬나라 군대는 항상 장병이 부족했다. 그래서 무작정 학살과 약탈을 반복하지 못하고, 결국 현지에서 식량을 조달하거나 협조를 받는 식으로 연명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순신의 관점에서 전쟁을 끝내려면 일본에서 들여오는 군량 수송선을 최대한 견제하고, 일본군이 현지 조달을 하지 못하도록 막는 게 최선이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7년 동안 바다에서 큰 싸움이 20여 차례로 국한되었던 것도 그 이유였다. 상대적으로 열세인 조선군에게는 자신감이 부족했고, 일본군에게는 자원과 인프라가 부족했다. 최대한 그 차이를 이용해 효과적으로 적을 타격하고 공포감을 심어주는 것이 이순신의 목표였던 것이다. 게다가 그는 위험 회피(Risk aversion) 심리를 지닌 군대가 얼마나 무력화되는지 이미 여진족과의 싸움에서 체득하고 있었다. 게다가 중앙 집권 체제의 국가 조선과 봉건 영주들의 분권 체제 일본의 군대가 정서적으로 매우 다른 집단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조선군은 응집력이 부족했지만 하나의 군대였다. 반면 일본군은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기요마사, 도도 다카토라 등 각각 여러 지역의 쿠니(國)에서 징발된 다이묘(大名)가 이끄는 군사들이었다. 이들은 훗날 일본으로 돌아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후 동서(東西)를 가르는 대전쟁의 주인공이 된다. 이순신은 그런 분열상이 이미 적군의 사회심리적 구조에 내재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손해 보지 않으려는 적장들의 심리를 잘 이용했다. 전투에서 성공하든 실패하든 적은 그 공과를 공유하지 않는 집단이라는 내재적 한계를 이용해 명량 해전과 노량 해전에서도 승리했다.

상대와 부하의 마음 읽기 위해 "일단 노력하라"

위기가 생기면 지도자들은 부하들을 다그친다. ‘일단 뭐라도 해봐라’. 위기 때라고 해서 관성에 젖은 부하들이 창의적일 리 없다. 늘 하던 대로 업무와 보고를 반복한다. 그러나 업무 처리 규범과 윤리 의식이 있는 리더는 진짜 가치 있는 일을 한다. 상대방과 경쟁자의 마음을 읽기 때문에 ‘유도리’나 ‘현실주의’가 아니라 정확한 판단과 분석에 입각한 의사결정을 내린다. 재미있게도 임진왜란이 벌어질 당시 당파에 속해 있지 않은 관료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동인에도, 서인에도 제대로 속해 있지 않은 자기만의 캐릭터를 소유한 사람이었다. 그는 눈치보다 앞서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누군가의 사람이 될 필요가 없었다. 리더들은 일단 노력해야 한다. 상대방의 마음이 잘 읽혀지지 않으면 읽고 있다는 티라도 내야 한다.

■천영준 책임연구원 프로필
연세대 경영학과- 연세대 정보산업공학 석사, 기술경영협동과정 박사- 다음소프트 연구자문역- 합창단 Chantez a dieu, 오페라단 '청 ' 자문위원- 연세대 기술경영연구센터 책임연구원(현)/저서 <직장인 4대 비극> <바흐, 혁신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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