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봉대 행동대장 송재만 선생
[대전=데일리한국 이광희 기자] 송재만은 1891년생으로 만세운동이 있던 해 스물아홉이었다. 그는 본래 서산군 이북면 내리에서 태어났다. 현재는 태안군 원북면 이지만 그때는 서산이었다.

낮은 잔구들이 이어진 그런 곳이었다. 약간의 농토가 있었지만 넉넉한 곳은 아니었다. 그것마저 일제에 수탈당하여 매번 먹거리에 허덕거렸다.

그래서 고향을 등지고 한때 천안군 천안읍 읍내리에서도 살았다. 천안은 육로를 통해 경성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호남과 영남으로 가는 길이 삼거리를 이루는 곳이었다. 게다가 당시 충청권에서 가장 번성했던 도시이기도 했다.

송재만이 그곳에 간 것은 조금은 희망이 있을까 하는 바람에서였다. 하지만 그곳 역시 일제의 침탈아래 있던 곳이라 녹녹하지 않았다.

그러다 1914년 대호지면 면사무소가 있는 조금리로 이사 와서 살고 있었다.

그는 대호지면사무소에서 잡무를 맡아 처리하던 소사로 일하고 있었다. 면의 총무나 다름이 없었다.

그는 본래 부지런하고 성실했다. 작달막한 키에 동글동글 한 얼굴이 귀여운 상이었다. 늘 웃는 표정이 보는 사람에게 친근감을 주었다.

대호지에서 그를 모르는 면민이 없었다. 면내의 대소사가 생기면 주민들은 송주사를 가장 먼저 찾았다. 그를 통하면 안 되는 일이 없었다. 아울러 가장 만만했다.

주민들의 입장에서 이인정 면장은 너무 멀었다. 그는 사대부집안에서 태어나 군수를 역임한 인물이었다. 평민들의 입장에서는 하늘같은 존재였다. 쉽게 얼굴을 들고 볼 수도 없는 처지였다. 신분도 그와는 달랐다.

그렇다고 면서기들을 만나는 일도 쉽지 않았다. 그들 역시 일이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거들먹거리기 일쑤였다.

주민과는 다른 위치에 있었다. 공조직에 몸담고 있다는 자체가 권위였다. 공무를 잘 수행하기 위해서는 그 권위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애써 주민들과의 직접 접촉을 피했다.

필요에 의해 주민들을 만난다 해도 고자세로 대했다. 일제에 의해 잘 훈련된 바도 있었지만 그들 스스로 그것이 싫지 않았다.

순사들이 매를 들고 주민들을 때렸다면 면서기들은 말로 주민들을 호령했다. 아랫사람 다루듯 했다.

선임 면서기는 그렇게 교육 시켰고 동시에 후임 면서기들은 그리 교육받았다. 주민들을 다루는 그들만의 비법이라고 생각했다.

조선조의 명맥이 이어졌기에 면서기는 벼슬이었다. 관직이 낮을 뿐 그것은 일반 백성과는 다른 벼슬이었다. 스스로 벼슬아치라고 생각 했으므로 주민들과 어울릴 수 없었다.

그래서 만만 한 게 송재만이었다. 평민출신의 소사라 그가 가장 편했다. 직급도 그렇지만 그는 예사 면사람과 달랐다. 무엇이든 도움을 주려고 애썼다.

같은 주민들의 입장에서 고민하고 아파했다. 태생이 백성인지라 그 난 자리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는 조금리에 장이 서면 장마당에 나가 살다시피 했다. 열흘 만에 한번씩 서는 장이지만 그곳에서 면내의 모든 정보를 구했다. 각 마을 사람들을 만나고 소식을 들었다.

어느 마을에 상이 났는지. 혹은 혼례가 있는지도 알 수 있었다. 또 어떤 마을에 궂은 일이 생겼는지도 들었다.

누구네 집에 쌀농사를 얼마나 했으며 보리농사를 얼마나 지었는지도 환하게 알고 있었다. 심지어 콩농사를 어떻게 망쳤는지 까지 꿰뚫고 있었다. 이런 모든 것이 그의 부지런함과 무관치 않았다.

때문에 이인정 면장은 면내 시찰을 갈 때마다 그를 앞장세웠다. 그는 면장의 수행비서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송주사 만큼 발이 넓은 사람도 없었다.

송재만은 일과가 끝나는 시각이면 어김없이 친구들을 찾아다녔다. 똘방지고 일을 시키면 군말이 없는 사람들로 조직을 만들 생각이었다. 다가올 거사에서 궂은일을 도맡아야 할 선봉 행동대가 필요했다.

행동대원은 담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겁이 많으면 아무리 사람이 좋아도 배제했다. 거사 당일에 몸을 던져 함께 일할 각오가 되어있는 사람을 골랐다. 혼자의 생각으로 사람을 물색해야 했으므로 쉽지 않았다.

그가 가장 먼저 찾아간 이는 조금리의 송봉운이었다. 그는 늘 장마당에서 만나는 친구였다. 그리 크지 않은 키에 다부진 체격이 겉보기에도 만만해 보이지 않았다.

평소 겁이 없고 담대했다. 그가 주먹이 센 건 아니지만 깡으로는 그를 당할 사람이 없었다.

대호지면뿐만 아니었다. 인근 관내에서도 그의 담대함은 알아주었다. 그가 장마당에 나타나면 마을 조무래기 건달들은 피해 다닐 정도였다.

다른 면에서 조금리를 지나려면 그에게 인사를 하고 다녔다. 통행세는 아니었지만 술이라도 한잔 받아 주어야 평안했다.

“친구가 어쩐 일이여 이 누추한 곳을.”

송봉운은 조금리 외딴집으로 찾아온 그를 지극하게 맞았다. 없는 살림이었지만 탁주를 받아 대접했다. 둘은 한동안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술안주라야 곰삭은 김치조각이 고작이었다. 초라한 소반에 송봉운은 연신 송구함을 표시했다.

그의 집은 산기슭에 몸을 기대고 선 낮은 초막이었다. 노부모를 모시고 살았다. 모시고 산다는 것보다 함께 산다는 표현이 맞았다. 남의 소작일을 하는 노부모의 그늘에서 그 나이가 되도록 살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살림이 말이 아니었다. 웅크리고 앉은 늙은 초막과 좁은 마당 그리고 집을 뒤덮고 있는 미루나무가 풍경이었다.

송봉운은 오랜만에 집으로 찾아온 친구라 더욱 반가웠다. 사실 그가 면에 나가면 술밥은 송재만의 몫이었다. 그가 면에서 푼돈이라도 번다고 늘 술밥을 샀다.

면사무소 앞에 있는 주막이 그의 단골이었다. 송봉운이 장마당에 나오면 그곳에서 국밥을 대접했다. 대접이라기보다 함께 나누었다.

송재만은 친구인 송봉운이 살림이 넉넉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야 혼자 몸이라 어렵지 않았지만 그는 늙은 부모와 함께 하고 있었다. 때문에 늘 어려움이 더 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때로는 고기 근을 끊어 손에 들려 보내기도 했다. 때문에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송재만을 대했다. 그런 그가 오랜만에 소식도 없이 집으로 찾아왔으니 더없이 반갑고 고마웠다.

“오랜만인디 한잔 들게 그려. 그동안 자네의 신세에 늘 감사혔네. 오늘은 내가 술 한 잔 살꺼구먼.”

송봉운이 탁주를 권하며 말했다. 투박한 손에 들린 낡은 주전자가 기울어졌다.

“그려. 오늘은 친구에게 한잔 얻어먹어야겠네. 참으로 기분이 좋구먼.”

송재만은 늦은 시간까지 술을 마셨다. 정신이 혼미해지려 했다. 그럴 때마다 정신을 바짝 차렸다. 의도적으로 눈을 크게 뜨고 앞에 앉은 송봉운을 너머다 보았다. 그 역시 술기운이 조금씩 오르는 듯 보였다.

“그런데 어인 일로 외딴 집까지 찾아온겨. 괜히 오지는 않았을 테고 말이여.”

송봉운이 얼큰한 표정으로 물었다. 더 취기가 오르기 전에 심중을 알고 싶은 눈치였다.

“오늘은 긴요하게 도움을 청할 일이 있어 왔구먼 그려.”

송재만이 김치조각으로 입을 씻으며 말했다. 새콤한 맛이 눈을 가물거리게 했다. “뭐가 그리 긴요한겨. 도움이라면 무신 도움.... 변변할 거도 없는 내가 줄 도움이 있단 말이여?.”

그제야 송재만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도 말이여. 참 기구한 삶을 살았네. 서산 이북면 내리에서 나서 천안에 살다가 다시 이곳 대호지면에 와서 살고 있지 않는가. 면직원으로 살지만 이 나이가 되도록 장가도 들지 못하고 혼자 살고 있잖여. 이룬 일도 없고 해놓은 것도 없이 말이여.”

그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스스로 돌이켜 보아도 허망한 삶을 살았다는 생각이 스쳤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온 것 외에 손에 꼽을 일이 없었다.

“이 친구야. 그게 무신 기구한 삶이여. 이 시대 우리친구들이 다 그렇잖여. 너무 낙심 말어.”

송봉운이 손으로 재만의 무릎을 툭치며 말했다. 동병상린. 다를 것 없는 입장이었다. 송재만의 그 말에 송봉운도 함께 공감하고 있었다. 행동으로는 위로했지만 속으로는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정말 제대로 일을 해보고 싶어 찾아왔구먼. 사내답게 살고 싶어서 말이여.”

송재만이 비장한 각오를 품은 얼굴로 봉운의 눈을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 그 대목에서 술기운이 획 하고 달아난 느낌이었다. 제대로 된 일 이라는 말이 스스로를 긴장 속으로 몰아갔다.

“그게 무신 말이여? 제대로 된 일은 뭐고 사내답게 사는 건 또 뭐여.”

송봉운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송재만을 들여다보았다. 그 역시 정신이 번쩍 드는 모양이었다.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까를 기다렸다. . 송재만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검 같은 어둠만 고여 있었다. 술상 옆에 피워놓은 호롱불만 검은 그을음을 하늘로 날리며 까무락거렸다. 손갓을 만들어 입에 대고 나직하게 말했다.

“조만간 거사를 일으킬 생각이여.”

송재만은 이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이를 깨물었다.

“거사라니?”

송봉운은 주변을 살핀 다음 놀란 눈으로 그의 눈을 들여다봤다. 역시 말소리는 나직했다.

“조선 천지가 이 나라 독립을 외치는 군중들로 난리여. 각 고을마다 독립만세를 외치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단 말이여. 한데 이곳 대호지는 쥐죽은 듯 조용하지 않는가. 그래서 이번에는 이 몸이라도 나서서 만세운동을 벌일 생각이구먼.”

송재만의 말에는 강한 의지가 녹아 있었다. 담박에 뛰쳐나가 만세소리를 외칠 기세였다. 골골로 뛰어다니며 한 없이 만세를 부르짖을 기세였다. 말소리는 나직했지만 그의 말투에는 강한 투지가 담겨 있었다. 분노가 녹아 있었다.

“아니 그게 무신 말이여. 자네가 나서서 독립을 외치다니.”

“누구라도 외치지 않으면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아서 그려. 사람들을 규합하고 그들과 함께 나서서 이 나라 독립을 외칠 생각이란 말이여. 이 한 몸 바쳐 이 나라가 독립 된다면 뭐가 그리 두려울 게 있겠나.”

송재만은 탁주를 길게 들이키며 단단한 어조로 말했다. 비장한 각오가 그의 눈에 서리처럼 엉겨 있었다.

“그럼 나도 할 일이 있단 거여... 뭐여?”

송봉운은 군침을 삼켰다.

“그래서 하는 말이여. 내가 행동대장을 맡을 테니 자네가 부대장을 맡아 함께 거사를 치르자는 거여. 엄청난 아픔을 겪게 될지 몰라. 거사가 잘못되면 죽을 수도 있어, 하지만 이 나라 독립을 위해 싸우다 죽으면 그 또한 영광 아니겠는가.”

송봉운이 빈 잔을 받아 잔에 하나 가득 탁주를 따랐다. 그리고 자신의 잔에도 탁주를 그득하게 따랐다. 그리고는 그 잔을 송재만에게 넘겼다.

“좋구먼. 우리는 친구 아닌가베. 지금까지 사내로 살면서 제대로 된 일을 한번 해보지 못했구먼. 뒷골목의 상건달처럼 살수야 없지 않겠는감. 그런 일을 맡겨준다면 기꺼이 해야제.”

송봉운은 말끝에 힘을 주었다.

“암. 이 나라를 위해서 하는 일인디 두려워할 게 뭐가 있단 말이여. 내 필생의 사업이라고 생각하고 힘껏 맡아 볼 꺼구먼. 내 기꺼이 할겨.”

송봉운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다부지게 말했다. 눈에 영기가 엉겼다. 그것은 살기에 버금가는 비장함이었다. 매섭고도 선명한 의지의 눈빛이었다.

“고맙구먼 친구.”

재만과 송봉운은 길게 탁주를 들이켜고 손을 굳게 맞잡았다. 거칠고 다부진 손과 송재만의 마디 굵은 손이 서로 엉겼다. 그것은 맹세였다.

죽는 한이 있어도 변절하지 않겠다는 언약이었다. 취기가 올랐지만 정신은 더욱 또록또록 빛났다.

송재만은 밤마다 그렇게 면내를 돌아 다녔다.

남병사 댁이 있는 사성리는 남주원이 행동대를 조직해 주었다. 그래도 송재만은 그들을 각자 찾아다니며 당부하고 부탁했다.

그들은 남병사 댁 집사이면서 사성리 이장 고수식과 김팔윤, 그리고 사성리 김순천과 남태우였다. 모두 남주원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어 적극 호응해 주었다.

이들은 모두 재만의 사형들이었다. 고수식은 1872년생으로 47세의 어른이었다. 김팔윤은 1889년생으로 친형처럼 지내는 사이였다. 다만 김순천은 26세의 혈기 왕성한 아우였다.

남태우는 양반으로 처음부터 이번 일에 깊이 관여한 인물이었다. 40세란 나이에 걸맞지 않게 매사에 적극적이었다.

비록 몰락한 집안의 자손이지만 양반의 피를 타고난 탓에 나름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말로만 양반이 아니라 행동하는 양반이길 자처했다.

그가 주변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것은 그런 탓이었다. 솔선수범하는 정신이 투철했다.

스스로도 양반이면 민족이 신음하고 있을 때 두려움 없이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차에 행동대의 제안을 받고 마다하지 않았다.

나이가 있어 힘들겠다며 뒤로 뺄 만도 한데 그는 단참에 승낙했다. 그는 송재만을 친동생처럼 맞아 주었다.

또 사성리 김형배는 1885년생으로 36살의 중년이었다. 담대하고 뱃심이 좋아 늦은 밤에도 산을 넘나들기를 밥 먹듯 하는 사람이었다. 한밤에도 길을 나서면 출포리든 어디든 마음먹은 대로 돌아다녔다.

34세인 송전리 김장안은 형으로 받들며 지내는 사이였다. 그는 천도교인이면서 적극적인 성격이라 매사에 시원시원했다. 송재만의 제안에 선뜻 대답해 주었다.

무슨 일을 하는지도 묻지 않았다. 그냥 함께하자는데 동의했다. 송재만에 대한 믿음도 있었다. 하지만 그 스스로도 평소에 옳은 일리라면 떨쳐나서야 한다는 신념에 차있었다.

또 사성리 안상춘과 송무용은 동생들이었다. 20대 초반들이라 혈기가 왕성했다. 돌을 씹어 먹어도 소화가 될 나이였다. 무엇이든 시켜만 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달려 나갈 청년들이었다. 송재만은 이들이 있어 든든했다.

도이리에 찾아 가서는 개별로 접촉했다. 남인우와, 전성진을 잇따라 만나 당부했다. 남인우는 1886년생으로 37세의 나이였다.

그는 무반집안의 기질을 타고나 양반이면서도 쪼잔하지 않았다. 매사에 담대하고 겁이 없었다. 농사를 짓고 살았지만 전란이 있었다면 그는 무인이 되고도 남음이 있는 인물이었다. 결코 물러설 생각이 없는 그런 사람이었다.

전성진도 1885생 35세로 양반이었다. 그는 조용하면서도 내공이 단단한 인물이라 뱃심이 좋았다. 모두 남이흥 장군의 후예답게 용감하고 무쌍했다.

그리고 동생뻘인 남성우를 행동대원으로 영입했다. 그 역시 양반으로 23세의 젊은 나이지만 무골 집안의 자손답게 기질이 남달랐다.

장정리를 찾아서는 연락책 최연식에게 상의했다. 그러자 스스로 행동대로 나서겠다고 말했다. 두 손을 굳게 잡았다. 그는 인근에 사는 김찬용을 소개했다.

김찬용은 23세의 젊은 양반계급으로 혈기가 왕성했다. 고종황제의 갑작스런 붕어에 분노하고 있던 인물이었다. 흔쾌히 확답을 받았다.

마중리로 달려가 심능필에게, 두산리로 가서 김홍진에게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심능필은 27세의 양반이었다. 민족의식이 투철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 민족이 일본에 압제당한 일에 대해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 하고 있었다. 이런 마당에 선봉대를 제안하자 즉시 화답해주었다.

김홍진은 43세의 나이임에도 처음부터 거사에 동참했던지라 적극 호응해주었다. 또 적서리 사는 김길성을 행동대원으로 만들어 임무를 부여했다.

그는 아직 덜 익은 19세의 청년이었다. 하지만 대원으로 조금도 손색이 없을 만큼 민족의식이 투철했다. 그것은 그를 아는 이들이 모두 인정하는 바였다.

그리고 면사무소가 있는 조금리에서 김금옥을 만나 부탁했다. 뒷일은 송재만 자신이 돌보기로 했다. 김금옥 역시 23세의 피가 뜨거운 청년으로 힘이 장사였다.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이라 그를 선봉대에 뽑았다.

선봉대 조직은 거의 마무리가 되었다. 꼭 필요치 않으면 더 이상 늘일 생각이 없었다. 그때 남상돈이 한명을 추가로 추천했다. 그는 도이리 사는 남상은이었다.

그를 만나기 위해서는 어려움이 있었다. 우선 송재만은 심복 김부복을 불러 심부름을 시켰다. 남상은에게 조속히 만날 약속을 정하게 했다. 그리고 약속 한날 그가 원하는 장소로 나갔다.

약속장소는 한봉산 고갯마?밑에 양지바른 곳이었다. 그가 살고 있는 도이리 집에서 마주 보이는 산마루였다. 그는 지게를 지고 나무꾼 행색으로 그곳에 나타났다. 담이 크고 겁 없이 살 성격의 청년이란 게 한눈에 보였다.

남상은은 1894년생으로 다부진 체격에 두 눈이 똘방한 26세의 청년이었다. 호는 취송이었다. 그는 조금도 머뭇거림이 없었다. 매사에 분명했다.

명문가의 자제답게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생각이 확실했다. 눈에서는 광체가 발할 만큼 의기가 대단했다. 그가 집을 피해 산에서 나무꾼으로 만난 일도 까닭이 있었다.

그는 성암 남성희의 둘째아들이었다. 성암은 남이흥 장군의 셋째아들 두기공의 10세손으로 1868년 도이리에서 태어났다.

12살 되던 해에 도호의숙에 들어가 11년간 공부하고 6년여 훈장으로 일했다. 그는 평생을 한학에 몰두한 인물이었다. 그의 민족의식 역시 철저했다.

고종황제의 붕어에 크게 분노하고 있었다. 일제의 강점에 대한 분노 또한 대단했다. 이런 탓에 그의 아들들이 모두 강골이었다.

첫째아들 남상학은 1890년생으로 남들이 놀랄 만큼 똑똑했다. 신동이란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어릴 때부터 도호의숙에 들어가 아버지 성암 아래서 공부했다.

나이 11세 되던 1901년부터는 소년부의 훈학을 담당할 정도였다.

나이가 들면서 9척 장신으로 자라 무관으로서도 손색이 없었다. 더욱이 그는 의협심이 강해 남주원의 조부 남명선 한성우윤의 총애를 받았다.

한때 그의 재산을 관리하던 서사로도 일했다. 자연 남주원과도 교분이 깊었다. 한 식구처럼 지냈다.

그가 남병사 댁에서 일할 때 남명선의 천거로 백야 김좌진을 만났다. 백야보다 한 살이 어렸지만 그의 보좌역을 자처하며 그를 따라 중국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소식이 끊어졌다. 세간에서는 그가 독립군이 되었다는 얘기가 파다했다.

아무도 알지 못했다. 다만 일본 경찰 끄나풀들이 수시로 그의 집을 감시했다. 낮에는 거의 한두 명씩 집 앞을 배회했다.

처음에는 그들이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지 몰랐다. 하지만 그들이 일제의 끄나풀이란 사실을 알고 가족들은 그들을 경계했다.

집밖을 나올 때마다 그들이 따라붙었다. 남상은은 그날도 지게를 지고 집 뒷산을 돌았다. 나무꾼을 가장해 한봉산 고갯마루 아래로 온 거였다.

그의 형 남상학이 북로군군정서 총사령관 백야 김좌진 장군의 수하에서 사관양성소 설립을 담당하는 장교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왜놈들이 이런 정보를 파악하고 그 가족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혹 그와 연락이 오갈 지도 모른다는 예단에서였다.

이런 집안의 막내다 보니 남상은의 인품이 출중한 건 당연했다. 송재만은 그에게 전후사정을 얘기하고 선봉대를 제안했다. 남상은은 즉시 승낙했다.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저자: 이광희 데일리한국 기자, 데일리한국 충청 대표

소설가, 97년 등단

저서: 장편소설 『붉은 새』상.하. 『청동물고기』 1.2.3. 『소산등』, 『진시황과 녀』 소설집 『시계소년』 발간.

단편소설 「왕비의 팔찌」 등 다수 발표.

일반저서: 『문화재가보여요』, 『충청혼맥』, 『충청의 독립만세운동 어제와 오늘』 출간

한국소설가협회, 한국문인협회, 대전문인협회 회원, 현 한밭수필가협회 회장

대전시문화상, 오늘의 문학본상, 이달의 소설가상, 국세청장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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