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한국 이광희 기자] 대호지는 당진군 서북쪽에 위치한 지역이었다. 동쪽으로 호수처럼 느릿하게 흐르는 평리만과 서쪽으로 대호만이 있었다. 그사이가 대호지였다.

나무뿌리 모양의 두 만이 가랑이를 벌린 곳이었다. 때문에 삼면이 물길에 가로막혀 있었다. 땅의 형상만 보면 너불거리는 해조류 조각 같았다.

지대가 낮고 갯벌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밀물에는 넉넉한 만이 형성되지만 썰물 때는 온통 갯벌투성이였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갯냄새뿐이었다.

겨우 한가운데로 낮은 잔구들이 이어져 있었다. 사람들은 부뚜막까지 기어오르는 낙지를 잡아 허기진 배를 채웠다고 너스레를 떨 정도였다.

이런 탓에 해상교통은 그런대로 소통이 되었다. 인천으로 가는 화륜선이 다녔다. 작은 쪽배를 타고 물길을 나서는 이들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육상교통은 답답하기 짝이 없는 곳이었다. 동남쪽에 위치한 정미면 천의를 거쳐야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천의에서 들어가는 도로만 막고 있으면 숨통이 막혔다.

그 길을 통하지 않고 들고날 방안이 없었다. 따라서 어찌 보면 폐쇄되고 소외된 지역이었다. 게다가 먹거리가 그리 풍성한 지역도 아니었다. 도리어 갯벌과 바람이 많아 궁벽했다.

사성리 대호지나루터는 교통문제를 해결해 주는 유일한 숨통이었다. 주민들은 이곳을 통해 경향각지로 나갔다.

일제는 이런 지리적 요인을 들어 이곳에 경찰 주재소를 두지 않았다. 정미면 소재지인 천의에 당진경찰서 천의주재소를 두고 관리했다.

1914년에는 관할구역을 당진경찰서에서 서산경찰서로 이속했다. 하지만 당진이 가깝다 보니 당진서의 영향권에 있었다.

대호지 유생들이 공부했던 도호의숙의 현판
때문에 일제는 다른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관심을 소홀히 했다. 먹거리도 풍부하지 않고 물자도 넉넉지 않았다. 이런 저런 까닭으로 정치, 경제적으로 그리 중요하다고 판단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주민들의 소통이 자유롭지도 않았다. 고등계형사의 출몰이 잦았기에 위축되기는 매한가지였다. 일상에서도 그런 현상이 느껴졌다. 주민들은 그들만 보면 주눅이 들었다. 꼬리를 내리기 일쑤였다. 숨 쉬는 일도 팍팍했다.

게다가 경찰서에서 동떨어진 곳이다 보니 순사들의 유세가 말이 아니었다. 완장을 두른 이들이 권력이랍시고 거들먹거렸다.

면소재지에서 대호지나루터로 가는 길목에 남주원이 살고 있었다. 그는 일대에서 가장 부호였다. 사성리 그의 집은 수많은 사람들이 식객으로 드나들었다.

대호지면에서 가장 많은 정보가 드나드는 길목이었다. 조선독립의 바람도 이 길목을 통해 들어왔다.

바람이 유난히 불던 날이었다. 봄이라지만 을씨년스러웠다. 뼈골로 파고드는 한기에 몸을 사렸다.

초저녁이었다. 어둠이 두텁게 마을을 감싸고 있었다. 멀리 개짓는 소리가 간간이 들렸다. 어두운 산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게다가 부슬비라도 내릴 조짐이라 길거리에 인적이 없었다. 모든 사물이 어둠 속에 녹아들었다.

머리를 단정하게 자른 사내가 들길을 지나 마을로 접어들었다. 사성리는 조용했다. 봄비 기운이 비치는 탓인지 개도 짓지 않았다.

그는 큰길 옆에 딱 버티고 선 솟을대문 앞에 걸음을 멈추었다. 주변을 살핀 다음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그제야 문이 삐죽 열렸다.

“도이리 사는 남상돈일세.”

“예, 도련님께서 기다리고 계시는구먼유.”

문간아비는 넙죽 허리 굽혀 인사를 올리고 그를 집안으로 안내했다. 남상돈은 솟을 대문을 지나 사랑채로 향했다.

이집 주인 남주원은 1893년생으로 27살이었다. 그는 6살 때부터 6년간 문중에서 운영하는 도호의숙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도호의숙은 도이리에 있었으므로 매일 왕복 이십 리 길을 걸어서 다녔다.

그리고 곧이어 상경하여 1905년 3월부터 사립 중등학교를 졸업하고 호동사립 해동신숙을 졸업했다. 신학문을 배운 인텔리였다.

1916년 할아버지 남명선이 갑자기 숨지자 어쩔 도리없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1918년부터 해미공립보통학교 학무위원을 역임했다.

또 사성리 자신의 집에 도호의숙의 분교인 반계의숙을 세워 교육사업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평소에도 그는 자신의 집에서 근방의 친우들과 자주 모임을 가졌다.

그가 살고 있는 집은 사성리 남병사 댁으로 불렸다. 사성리와 도이리에 집성촌을 이루며 살던 남씨는 본이 의령이었다. 이들은 모두 남유 장군의 후손들이었다.

남유 장군은 1597년 ‘임진 7년 전쟁’ 때 나주목사로 재직하며 이순신 장군을 도와 노량해전에서 순직한 인물이었다. 그는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그의 아들 남이흥 장군도 1627년 병마절도사로 평안도 안주에서 청나라 침공을 막지 못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정묘호란 때 일이었다.

그는 훗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두 부자가 국난에 순직한 충정어린 무인 집안이었다. 조선사를 통틀어 부자가 국난에 참전하여 순직한 충신은 이들 뿐이었다.

그 후손들은 대호지면 도이리에 집성촌을 이루며 살았다. 종가도 그곳에 있었다.

남주원도 같은 문중이었다. 다만 직계는 아니었다. 그의 집이 남병사 댁으로 불린 건 할아버지인 남명선이 종2품의 병마절도사를 지냈기 때문이었다. 한성부 우윤, 장위영 경무사란 직함이었다. 남 병마절도사 댁의 줄임이었다.

남주원의 할아버지 남명선은 딸만 둘 있었다. 그가 해주수군절도사로 있을 때까지 아들이 없었다.

그는 수군절도사로 있으면서 그곳 남홍기란 인물과 가깝게 지냈다. 의령 남씨란 이유에서였다. 그의 아들 가운데 한 명을 양자로 들였다. 그가 남계영이었다. 남명선은 그를 장손으로 삼아 가계를 이었다.

하지만 남계영은 덕수이씨와의 사이에 아들을 낳고 그해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스물이 갓 지나서였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이가 남주원이었다.

남명선은 어렵게 얻은 손자를 애지중지 손수 키웠다. 금이냐 옥이냐 하면서도 바르게 키우려고 애썼다. 동량을 만들기 위해 모든 일을 아끼지 않았다.

남주원이 일찍이 서당을 나와 경성으로 유학길에 오른 일도 이와 무관치 않았다.

핏덩이 때부터 남명선이 키웠으므로 주원은 할아버지를 아버지로 알았다. 아버지처럼 어려워하며 자랐다.

그리고 남명선이 57세 되던 1903년, 한양에서 작은 부인을 얻어 친자를 낳았다. 그가 남계창이었다.

주원이 10살 때 작은삼촌이 태어난 것이다. 하지만 적통이 주원에게 넘어간 뒤라 집안 살림은 남주원이 하고 있었다.

남병사 댁은 민간에 허용된 최대치인 99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지만 가작 집과 창고 헛간을 합하면 100여 칸이 넘었다. 처음 들어가는 사람은 제대로 안채를 찾지도 못했다.

추녀를 높이 쳐들고 선 솟을대문을 지나면 듬직한 사랑채가 버티고 서 있었다. 남명선이 그러했듯이 주원도 주로 이곳에 머물렀다.

중문을 지나 그 안쪽에 곳간 채가 자리했다. 거두어들인 곡물을 보관하고 농기구와 각종 자재들을 쌓아두는 창고였다.

그곳에서 앙증맞은 쪽문을 들어가면 그제야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안채가 숨어 있었다. 그곳은 내실이라 남정네들은 얼씬도 하지 않는 곳이었다.

안채 뒤로는 늘 스산한 분위기가 감도는 사당이 배치되어 있었다. 바깥에는 소작농들이 사는 작은 집들이 옆구리에 담장을 끼고 게딱지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때문에 깔고 앉은 집터만 무려 2,400여 평에 달했다.

게다가 남병사 댁이 붙이는 토지는 200여 필지에 21만여 평에 이르렀다. 말이 21만평이지 1천 마지기가 넘었다. 사성리 일대에서 그의 땅을 밟지 않고는 지나가지 못했다.

남병사 댁은 대호지나루터에서 5리(2킬로미터)정도 떨어진 길목에 붙어 있었다. 어린아이 젖가슴 같은 낮은 산을 뒤로하고 앞으로는 널찍한 논밭을 깔고 있었다.

게다가 길옆이라 드나들기가 수월했다. 그러므로 이곳을 통해 인천을 경유하여 경성으로 가는 충청권 인사들이 수시로 들려 신세를 졌다.

언젠가 사랑채에서 할아버지 남명선이 남주원을 급히 찾았다. 그는 귀한 손님이 찾아왔다는 말만 전해 들었다. 도호의숙을 다녀오던 길이었다.

젊은 시절의 만해 한용운 선생

10살을 막 지났을 때였다. 급히 사랑채로 들자 할아버지가 인사를 올리라고 일렀다. 주원은 사랑채 윗목에 앉은 사내에게 넙죽 큰절을 올렸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머리를 들었다.

사내는 머리를 깎은 모습이 젊은 스님처럼 보였다. 옷은 남루했으며 핏기 없는 깡마른 얼굴이었지만 강단이 가슴에 묻혀있었다. 게다가 단호한 성격이 고스란히 그의 눈빛에 녹아있었다.

맑은 눈동자가 선연히 살아있었다. 깊은 눈빛에서 사물을 뚫어보는 안목이 보였다.

“네가 주원이냐?”

곡차 잔을 들며 조용하게 물었다.

“그러하옵니다.”

“허 고놈......큰일을 할 놈이구먼.”

사내는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주원을 내려다보았다.

“우리집안 대들보 일세. 그대가 잘 돌봐주시게.”

남명선은 낯선 사내에게 정중하게 당부했다. 그가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였고 사내는 아직 20대 중반쯤으로 보였음에도 남병사는 조금도 하대하지 않았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병사어른 손자시라면 이 나라 동량으로 키워야지요.”

사내는 곡차를 한 모금 들이키고 말했다.

뒷날 알았지만 그가 만해 한용운이었다. 남주원은 만해가 집안에 올 때마다 예를 갖추어 인사를 올렸다. 그가 원체 큰 가슴을 지닌지라 남명선은 나이 차이가 크게 났지만 특별히 예우를 다했다.

주원은 알게 모르게 만해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절대자유를 지향하는 점이나 인본을 근간으로 하는 평등과 평화를 공영의 가치로 삼은 일도 그에게서 배운 생각이었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며 일제의 조선에 대한 압제 허구성 등도 만해를 통해 깨우쳤다. 그가 스님의 신분이었지만 투철한 민족의식은 따를 사람이 없었다. 주원은 그런 만해를 존경했으며 늘 그를 배우고자 했다.

남주원이 자별하게 지낸 또 다른 인물은 백야 김좌진과 한훈이었다. 백야는 나이가 네 살 위라 형처럼 대했다. 게다가 백야의 부인은 해주오씨 오숙근이었다.

남주원의 부인도 같은 종씨인 오원근이었다. 부인들이 자매는 아니었지만 같은 성씨에 항렬이 같다보니 이들도 자매처럼 지냈다. 그러니 백야와 남주원은 누구보다 가까웠다.

백야 역시 홍성에서 경성에 오를 때면 남명선 병사어른을 찾아 인사를 올렸다. 그럴 때마다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전했다. 백야도 남병사 어른의 뜻을 새기며 그의 집에 유숙하곤 했다.

청양사람 한훈은 야음을 틈타 쥐도 새도 모르게 집을 드나들었다. 식솔들조차 그가 드나드는 걸 아는 사람이 없었다.

늦은 밤에 담을 넘어와 이른 새벽 사라져 갔다. 소리도 없었다. 주원이 자고 있는 사이 사랑방에 들어와 있을 때도 있었다. 그와는 방에 불도 밝히지 않고 얘기를 나누었다. 식솔들이 모르는 게 당연했다. 그도 세 살 위라 형처럼 지냈다.

그는 홍주의병 간부 출신으로 광복단 기호지방의 책임자를 맡고 있었다. 그를 만나기 전에는 남주원도 비밀조직의 실체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연기처럼 집을 드나들면서 알게 되었다. 물론 극비였다. 그를 만난다는 자체가 위험한 일이었다.

광복단은 비밀, 암살, 폭동을 주목적으로 세워진 극비 광복단체였다. 투쟁방법도 부호들의 의연금이나 일본인이 불법 징수하는 세금을 압수하는 걸 기본으로 했다. 이 돈으로 무장을 준비하고 남북만주에 사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전사를 양성한다는 계획을 가진 단체였다.

무장투쟁세력은 의병과 해산군인, 만주이주민을 훈련시켜 활용하며 중국과 러시아의 무기를 구입하여 무장시키겠다는 방략도 가지고 있었다.

또 일체의 연락기관을 북경과 상해 등지의 여관과 광무소를 이용하고 있었다. 특히 광복단은 일인고관이나 한인반역자를 수시수처에서 처단하는 행형부를 두고 있었다. 때문에 한인부호들이나 친일인사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있었다.

서산. 당진에도 행형부 이름만 들으면 오줌을 지릴만한 이들이 몇 명 있었다.

대호지에서는 남주원이 젊은 나이에 원체 부자였음으로 항상 그들의 관찰선상에 올라 있었다. 하지만 한호가 형제처럼 지냄으로 비켜나 있었다.

“형님, 일전에 일경에게 들었소. 아산 도고면장 박용하 살해사건이 비밀단체에서 일으킨 거라면서요?”

목소리를 죽이고 어둠속에서 나직하게 물었다.

“그 일도 누구의 소행인지 밝혀지지 않았을 터인디 천하의 배신자 이종국이란 놈이 17년 12월에 천안경찰서에 밀고함으로써 우리 조직이 노출됐구먼. 그 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거여.”

“.......”

“솔직히 그뿐이 아니여. 보성과 벌교의 부호 양재학과 서도현을 참살한 일도, 칠곡의 악질 대지주 장승원 처단도 우리 행형부가 혔지. 악질 반역자들이라 민족의 이름으로 처단한 거여.”

한훈이 어둠속에 주원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힘주어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주원도 소름이 오싹 돋았다.

“우리는 대한의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죽음으로써 원수 일본을 완전히 몰아내기로 천지신명께 맹세한 단체 인거여. 뭐가 두렵것나. 반역자들은 적극 처단할 생각을 가지고 있으나 조직이 노출되어 한동안은 숨어있을 생각이구먼.”

한훈은 주원에게 조국의 독립에 대한 관심을 거듭 당부했다. 일제는 언젠가 이 땅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으며 그렇게 되면 우리 민족만의 국가가 만들어 진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날을 위해서라도 재산 일부 희사를 요청했다. 그 일은 독립자금과 독립군 군자금에 대한 지원 요청이었다. 노출되면 대단히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기에 남주원은 쥐도 새도 모르게 그에게 자금을 지원했다.

그와의 만남은 바람처럼 이루어지고 있었다. 근자에는 그가 몸을 피해 중국 상해로 들어갈 때도 남병사 댁을 들렀다.

○저자: 이광희 데일리한국 기자

소설가, 97년 등단

저서: 장편소설 『붉은 새』상.하. 『청동물고기』 1.2.3. 『소산등』, 『진시황과 녀』 소설집 『시계소년』 발간.

단편소설 「왕비의 팔찌」 등 다수 발표.

일반저서: 『문화재가보여요』, 『충청혼맥』, 『충청의 독립만세운동 어제와 오늘』 출간

한국소설가협회, 한국문인협회 회원, 현 한밭수필가협회 회장

대전시문화상, 오늘의 문학본상, 이달의 소설가상, 국세청장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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