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의리 있고 뚝심 있는 큰 나무였다.

이완구 전 총리,사진= 충남도 제공
[대전=데일리한국 이광희 기자] 한 달 전이었다. 아침에 전화가 걸려왔다. 이완구 전 총리였다. 목소리가 평소와 달리 컬컬했다. 안부를 물었다. 그는 좋다고 했다. 하지만 느낌에 건강이 그리 좋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래도 웬만할 거라 생각했다.

평소 힘 있는 정치인이라 통화만 해도 기를 받을 정도였다. “요즈음 충청도는 어떻게 돌아가는가?” 그는 충청권의 정치적 흐름에 대해 물었다. “이번에 대권주자도 못 만들고 답답허이.” 긴 한숨 속에 답답함이 묻어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통화했다.

이완구 전 총리는 충청지역에 애정이 남달랐다. 평소에도 전화가 걸려오면 30분은 기본일 정도로 이 지역에 관심이 많았다. 그의 관심사는 정치뿐만이 아니었다. 사회전반에 대한 것은 물론 충청권 일상적인 이야기까지 관심사였다.

그는 충남경찰청장을 하면서도 많은 지역민들에게 애정을 쏟았다. 가는 곳마다 충청도의 자긍심을 갖도록 부추기고 일깨웠다.

자신이 충남 홍성출신으로 성균관대 법대를 나와 1974년도에 행정고시에 합격했던 자신감을 고향사람들에게 심고 싶어했다. 그래서 그는 늘 당당했다.

90년대 초 그가 충남경찰청장을 할 때도 지역 경찰들은 그를 선망했다. 그의 조직력과 탁월한 추진력을 믿고 잘 따라 주었다.

그는 지역 언론인들과 자별했다. 그와 인연이 시작된 것도 충남경찰청장을 하고 있을 때였다. 40대 초반의 젊은 경찰청장은 가만히 자리에 앉아있지 않았다. 충남지역을 논밭 누비듯이 다녔다. 지역민들 역시 그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다.

이런 연유로 그는 1995년 민자당에 입당하면서 정치를 시작했다. 이어 이듬해인 96년 신한국당 후보로 충남 청양.홍성에서 유일하게 당선됐다. 충남경찰청장을 그만두고 얼마지 않아서였다.

그가 충청권 대망론을 그리며 가슴속에 큰 꿈을 품은 것도 이때가 아닐까 짐작해본다.

그는 두 번의 국회의원을 역임하고 2006년에는 한나라당 소속으로 충남지사에 출마했다. 충청지역에서 김종필 총재의 자민련이 쇠망하고 한나라당 바람이 불던 때라 어려움 없이 당선됐다.

그는 충남지사를 하면서도 ‘힘 있는 충남’을 부르짖었다. 그가 담대하고 적극적이었으므로 다소 점잖고 느리다는 이미지를 씻으려고 노력했다.

그는 충남지사를 하면서 기업유치를 위해 사활을 걸었다. 담당공무원들은 힘들었을지 모르지만 그때 충남지역에 기업이 가장 많이 유치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는 지사실에 그래프를 그려가며 목표치를 정해놓고 거의 매일 기업유치를 독려했다. 직접 서울 경인지역을 뛰어다니는 것은 당연했다.

당시 대전시 중구에 있는 구 충남도청 2층 도지사실을 종종 방문했던 기자로서는 당연히 그런 모습을 자주 봤다. 함께 오찬을 할 때도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기업유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문화를 도외시한 것은 아니었다. 매년 충남 부여와 공주에서 열리고 있는 대백제전의 규모를 요즈음처럼 이렇게 키운 이도 이 전 총리였다. 당시만 해도 무모할 정도였다. 지방에서 개최되는 문화행사를 위해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여 전국적인 행사로 키워야 한다는 주장을 했을 때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하지만 그는 대백제의 위상에 걸맞은 문화행사를 펼쳐야한다는 일념에 규모를 키웠고 그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배포와 의리도 남달랐다.

이명박 정부가 2009년 세종시 수정안을 추진하자 그는 “충남도민의 소망을 지켜내지 못한 정치적 책임을 지겠다”며 지사직에서 전격 사퇴했다.

이에 앞서 그를 만나 지사직 사퇴만은 하지 말 것을 요청한 적이 있다. 이어 그가 지사직에서 그만두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칼럼으로 피력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의지는 대단했다. “도민과의 약속은 지켜야 한다”며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약속한 기일이 다가오자 그는 사퇴했다.

많은 충청지역 인사들이 참으로 가슴아파했다. 세종시가 오늘의 모습을 갖추며 행정수도로의 면모를 만들어 가는데 그의 의지가 한몫을 단단히 했던 것이다.

그는 박근혜정부 두 번째 총리로 70일 만에 퇴진했다. 불명예 스러운 일이었다. 그 자신도 답답하게 생각했던 부분이다.

하지만 그가 충청권을 대표했던 맹주였음에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 지역의 많은 인사들이 그가 버티고 있었으므로 나름 대우를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의 뒤를 이어 많은 정치인들이 이 지역을 기반삼고 있으나 그가 굵은 나무였음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

그가 품었던 충청 대망론을 그 누군가는 이루어 줄 것이란 기대 속에 눈을 감았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래도 충청도에서 언젠가는 큰일을 해야 하지 않겠어?” 한 달 전. 그가 내게 들려준 마지막 말이었다.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이완구 전 총리는 선영이 있는 충남 청양군 비봉면 양사리로 돌아간다. 그는 그곳 양지바른 곳에 누워 자신이 품어 온 충청 대망론이 손에 만져지길 기다릴 게다. 아마도.....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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