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승시상 극히 희귀…억겁의 미소 압권

예술의전당 이동국 큐레이터 "그림이 아니라 대사건이다" 평가

사명대사 열반 직전의 모습으로 추정되는 '유정승시상'.사진=김성조 기자
[양산(경남)=데일리한국 김성조 기자] 사명대사(四溟大師) 좌탈입망(坐脫立亡) 직전 모습을 담은 '유정승시상'(唯政升時像)이 400여년만에 출현해 화제가 되고 있다. 좌탈입망은 오랫동안 참선 수행을 한 스님이 '앉은 자세'(坐脫·좌탈)나 '선 자세'(立亡·입망)로 열반하는 것을 말한다.

'유정승시상' 속 사명대사는 '승(僧)으로서 이제 부처님 뜻 알았으니 한 평생 곁에 있던 동반자 역시 이제는 편히 쉬라'는 듯 평생 가지고 다닌 염주조차 살짝 비껴 놓고 '억겁의 미소'를 보이는 장면이 압권이다.

예술의전당 이동국 수석큐레이터는 "'유정승시상'은 극히 희귀하고 회화사·서예사적 맥락은 물론 종교사·사회사적으로 일대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간결한 필획(筆劃)의 윤곽선만으로 모든 형상을 묘사하고 있다"며 "구불구불한 가사장삼(袈裟長衫)의 의복 주름과 깍지를 낀채 무릎을 감싸고 앉아 온화한 모습으로 얼굴에는 엷은 미소를 띠며 열반에 드는 순간을 극적으로 포착해내고 있다"고 극찬했다.

글씨와 서체에 대해 그는 "'惟政法師 字 離幻 俗姓 任 號 四溟堂 松雲 升' '惟政 升時像' '平國師利 殺生舍利' '鞭羊堂 作像 書' 등 편양언기(鞭羊彦機)의 화제는 1600년대 전후한 조선중기 소해(小楷, 작은 글씨)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며 "특히 철심(鐵心)같은 기필(起筆) 행필(行筆) 수필(收筆)의 점(點)획(劃)이 분명하고 간가결구(間架結構), 즉 글씨의 짜임새가 엄정하다"고 평가했다.

이러한 전형적이고 엄정한 소해는 왕희지 소해법첩 글씨를 조선화(朝鮮化) 시킨 한석봉체의 전형과도 같은 맥락이라고 덧붙였다.

이러한 성격의 작품은 16세기 조선중기 이상좌의 '불화첩'(호암미술관 소장, 보물593호)에 있는 일련의 '나한상'이 활달자재(豁達自在)한 필획으로 묘사되고 있다는 점에서 좋은 대비를 보인다.

특히 이 수석큐레이터는 "유정 승시상 화제에 평국사리(平國師利), 살생사리(殺生舍利)라고 적시된 대로 국태민안을 위해 임진왜란때 나라를 구하고, 일본에 나포된 포로의 평화로운 송환과 중생의 안녕을 위해 죽음을 무릅쓴 사명대사의 모습을 400여년의 시공을 뛰어넘어 현전(現前)에서 뵙는 착각이 들 정도로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고 감탄을 자아냈다.

이어 "지금까지 사명대사의 진영은 대구 동화사, 밀양 표충사 등지에서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이번의 유정 승시상은 400여 년 전 그려진 이후 세상에 처음 출현한 그림인 만큼 회화사 서예사 등 미술사적인 맥락은 물론 불교사 사회사적으로 대 사건이 아닐 수 없다"고 했다.

특히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1520~164)의 의발(衣鉢)을 전수받아 유정과 함께 서산 4문파의 중심인물인 편양언기(鞭羊彦機)가 친필로 간결하고도 침착한 필획 묘사 중심으로 대상의 좌탈입망 순간을 서화(書畵)해냈다는 점에서 더욱 더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밝혔다.

밀양 표충사에 소장되어 있는 사명대사의 금란가사와 장삼(長衫)의 실제유물과도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는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런 맥락에서 사명대사와 임진왜란을 전쟁사를 넘어 문화사적 사상사적으로 전시와 연구로 조명해낼 과제를 '유정 승시상'은 동시에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다.

한편 '유정승시상'크기는 가로 20.5㎝, 세로 23.5㎝이며 제작 시기는 그림 속 승복과 사명대사 열반(1610년 8월26일) 시기로 미뤄 1610년 늦여름 경으로 추정된다. '유정승시상'을 그린 편양당 언기(1581~1644)스님은 선조 14년 죽주현(竹州縣, 현재의 경기도 죽산)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장씨로 임진왜란이 발생한 1592년 12세 때 금강산 유점사에서 서산대사의 제자인 현빈인영(玄賓印英) 대사 문하에서 출가했다.

저작권자 © 데일리한국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