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위 공무원 출신 최민호 작가의 심금을 울리는 동화 이야기

사진= 미노스 제공
1.

대궐문을 들어선 그림의 떡 장수와 덕보는 길거리에 힘없이 앉아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놀랐습니다. 퀭한 눈, 축 처진 어깨에 삶을 포기한 듯, 사람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린 사람들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어린 아이들의 모습은 더 처참했습니다. 힘없는 팔을 내려뜨리고 숨만 가쁘게 몰아쉬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장이 섰던 곳이어서 사람들은 그래도 먹을 것이라도 있을까 싶어 나와 있는 것 같았습니다. 몇 년째 가뭄이 계속되면서 이런 비참한 모습이 곳곳에서 보였습니다.

그림의 떡 장수는 봇짐을 내려놓았습니다. 종이 위에 붓을 들고 떡이 수북한 상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떡을 그림 속에서 꺼내들자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나그네를 쳐다보았습니다. 나그네는 떡을 나누어 주기 시작했습니다. 갑자기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아우성을 치며 떡을 받기 위해 너도나도 손을 내밀었습니다.

“떡 좀 주시오, 열흘을 못 먹었소이다. 나 좀...”

나그네는 떡 하나라도 더 나누어주기 위해 열심히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때였습니다.

“뭣 하는 짓들이냐. 다 비켜섰거라...!”

벽력같은 소리에 사람들이 놀라며 개미떼가 흩어지듯 달아났습니다. 창과 칼로 무장한 군사들이 모여 있는 사람들을 쫓아내고 있었습니다. 군사중의 하나가 손에 쥔 떡을 들고 엉거주춤 서있는 남자를 보자, 방망이로 어깨를 내리치며 소리쳤습니다.

“대왕님 행차신데 무얼 주춤거리느냐? 냉큼 무릎 꿇고 고개 숙이지 못할까!”

남자는 무너지듯이 땅에 주저앉아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림의 떡 장수가 이 광경을 보고 놀란 눈으로 군사를 노려보자, 이번에는 그림의 떡 장수를 몽둥이로 내리쳤습니다.

“무엄하게도. 건방진 녀석 같으니라고...어서 무릎 꿇지 못해!”

그림의 떡 장수와 덕보는 무서운 서슬에 꼼짝 못하고 땅에 엎드려 왕의 행차가 지나가길 만을 기다렸습니다.

“대왕님 행차시다. 모두 길을 비켜라...!”

군사들은 소리를 치며 대왕을 호위하였습니다. 그림의 떡 장수는 행렬이 지나갈 때 슬쩍 눈을 들어 보았습니다. 대왕의 행렬은 맨 앞에 창칼을 든 병졸들이 길을 열고, 나팔과 북을 든 악사들이 요란한 음악을 연주하며 뒤를 따랐습니다. 말을 탄 장수들이 번쩍거리는 투구를 쓰고 턱을 앞으로 내밀고 나아가고, 호랑이와 용의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몇 겹으로 에워싼 가마를 메고 가고 있었습니다. 가마는 울긋불긋 화려한 문양과 금과 은으로 장식을 하여 보기만 해도 눈이 부셨습니다.

가마 속에 젊은 대왕이 앉아 있었습니다. 살이 쪄서 배는 동산만큼 부르고, 목은 통나무처럼 굵고, 눈은 비수처럼 가늘게 찢어져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포악함과 욕심이 가득 차 보이는 얼굴이었습니다.

호랑이와 용의 갑옷으로 치장한 군사들은 사방으로 눈을 부라리며 대왕을 호위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대왕의 행렬이 다 지나갈 때까지 돌멩이처럼 땅에 웅크리고 엎드려 있어야 했습니다. 행여 고개라도 들면 어디서 방망이와 창칼이 날아들지 모를 일이었습니다. 행렬이 시장 중간에 이르자, 말을 타고 가던 장수 하나가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대왕님 만세! 대왕님 만세!”

이 소리를 듣자 엎드려 있던 사람들은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같이 외쳤습니다.

“대왕님 만세! 대왕님 만세!”

그림의 떡 장수는 숨이 막히는 듯 했습니다. 이윽고 행렬이 지나갔습니다. 사람들이 일어서서 다시 그림의 떡 장수 옆으로 모여들었습니다. 못 먹었던 떡을 받으러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림의 떡 장수는 그림을 다시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떡을 받으러 내미는 야윈 손바닥에 일일이 떡을 쥐어주던 나그네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습니다.

‘백성들은 저토록 굶주리고 있는데, 왕은 무엇을 먹고 살았길래 저리도 피둥피둥 살이 쪘단 말인가’

고마움과 서러움에 눈물에 떡을 말아먹던 사람들이 나그네에게 소리를 죽여 말해 주었습니다.

“본 것, 들은 것,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면 안된다우. 오로지 대왕님 덕분에 잘 먹고 잘 입고 잘 잔다고 말해야 한다우. 저 호랑이와 용이 얼마나 무서운지 저들에게 잘못 보이면 그날로 끝이라우...나그네도 조심하시오. 아시겠수?... 떡을 주시니 고마워서 하는 말씀이우...내가 했다는 말을 해서는 안되우...”

떡을 쥐고 그들은 총총히 사라졌습니다. 그림의 떡 장수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습니다. 옆에 있는 덕보에게 말했습니다.

“그림의 떡으로 될 일이 아닌 것 같구나. 이 일을 어찌 할꼬... 사람들은 무서워서 말을 못하고 살기위해 도망치면 옥에 가둔다니...호랑이와 용으로 사람들을 위협하며 왕 노릇을 하고 있구나. 이 일을 어찌 할꼬?”

나그네는 덕보의 손을 잡고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2.

대궐 문 앞에 낯선 사람이 그림을 펼쳐놓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팔고 있었습니다. 떡 그림이 있는가 하면 감나무 그림도 있고 밥상 그림도 있었습니다. 누구 하나 그림을 사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림 값이 보통 비싼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림 장수는 몇날 며칠을 그렇게 그림을 펼쳐 보이며 자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키가 크고 눈이 부리부리한 한 사나이가 그림 앞에 섰습니다. 남자는 그림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였습니다.

“저 그림은 무엇이오?”

그림 속에 호랑이와 용과 봉황이 서로를 에워싸고 하늘을 향해 포효하고 있는 그림이었습니다. 눈과 이빨이 살아 움직이듯 선명한 그림이었습니다.

“저 그림은 신기한 그림입니다. 저 그림을 벽에 붙이고 있으면 호랑이과 용과 봉황이 주인을 지켜주는 그림입니다. 그러나 주인이 따로 있습니다...”

“주인이 따로 있다고? 그림 속에 무슨 뜻이 있소?”

나그네가 말했습니다.

“용은 지위를 뜻하오. 호랑이는 권력을 뜻하오. 봉황은 재력을 뜻하오. 지위와 권력과 재력을 지켜주는 그림이라오. 왕만이 가질 수 있는 그림이오...”

남자는 그림을 뚫어지게 쳐다보았습니다.

“저 그림을 파시오. 얼마요?”

“백만냥이올습니다.”

“백만 냥? 백만 냥이면 백만 명이 백일을 살 수 있는 금액 아니오? 그렇게 비싸다니...”

“그러니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그림이오. 그만한 가치가 있소.”

사나이는 머뭇거렸습니다. 탐나는 그림이었습니다. 이때 나그네가 사나이의 귀를 빌린다며 귓속말을 했습니다. 사나이는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정말이요......?”

사나이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꼭 사야겠소. 금액은 얼마든지 드리겠소.”

사나이는 그림을 샀습니다. 사나이는 그림을 정성껏 포장한 후 대궐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덕보가 나그네에게 물었습니다.

“저분이 누군지 아세요?”

“저번에 대왕행차가 있을 때 말을 타고 대왕님 만세를 외치던 호위장수 아니더냐? 저 그림을 사서 대왕님께 바칠 것이다. 대왕의 지위와 권력과 재력을 지켜주는 저 그림을 보고 얼마나 좋아할 것인지 장수는 알고 있는 것이니라...”

덕보도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나그네와 덕보는 자리를 떠났습니다.

3.

호위장수는 젊은 대왕에게 은밀히 다가갔습니다.

“대왕님. 여기 신기한 그림이 있사옵니다. 이 그림을 벽에 걸면 대왕님의 지위와 권력과 재력을 지켜주는 그림이옵니다. 이 그림을 침대 맡에 꼭 거십시오.”

“무슨 그림이 그런 그림이 있겠소?”

호위장수는 좌우를 살펴보고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에,

“이 그림은 살아 움직인다 하옵니다. 대왕님을 해치거나 대왕님의 자리를 넘보는 자가 있으면 이 그림속의 호랑이와 용과 봉황이 살아 나와 대왕님을 지켜준다 하옵니다.”

대왕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호위장수를 바라보며 그림을 보았습니다. 호랑이의 눈이 빛을 내며 껌벅했습니다. 놀란 왕이 이번에는 그림속의 호랑이를 조심스레 만져 보았습니다. 발톱이 방금 만든 비수처럼 날카롭기 그지없었습니다. 꺼칠꺼칠한 털의 촉감도 그대로 손끝에 전해졌습니다.

용이 들고 있는 여의주도 눈이 부시도록 빛나고 있었고, 봉황의 날개에서는 향기로운 향내까지 풍겨 나오고 있었습니다.

“저 호랑이와 용과 봉황은 주인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림에서 살아나와 조화를 부린답니다.”

믿어지지 않았지만, 그림이 워낙 심상치 않은지라 왕은 그림을 침대 맡에 걸어놓기로 했습니다. 늘 불안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를 이어 왕좌에 올랐지만, 언제 자신을 배신하는 자들이 왕의 지위를 빼앗을지 두려움이 떠날 때가 없었습니다. 백성들은 긴 가뭄 속에 헐벗고 굶주려 자신에 대한 원성이 높아지고 있었지만, 신하들 중에 누구 한 사람 이를 정직하게 전해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늘 대왕님 덕분에 잘 먹고 잘 산다는 칭송만 되풀이 할 뿐이었습니다.

왕은 비밀 첩자들을 두고 신하들을 감시했습니다. 첩자들이 배신의 마음을 갖고 있다고 보고하면 그 신하는 가차 없이 처형하였습니다. 역모는 신하들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백성 중에도 불만을 품고 반란이라도 일으킬까 염려하여 백성들 속에도 비밀첩자를 심었습니다. 불만을 이야기하는 백성이 있으면 사정없이 처벌하였습니다. 혹독하고 잔인했습니다.

권력은 창칼에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군사들 중에 가장 날랜 사람을 뽑아 호랑이와 용의 갑옷을 입혀 특별히 대우를 해주었습니다. 대왕이 오로지 믿을 수 있는 호위무사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눈알 속의 눈동자 같이 영민하게 자신을 지켜주며 충성을 맹서하는 자를 호위장수로 임명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그 호위장수가 자기를 지켜줄 신기한 그림을 가지고 온 것이었습니다.

4.

왕은 호랑이 그림을 침실 벽에 걸고 잠이 들었습니다. 그날 밤 꿈을 꾸었습니다. 때때로 꾸어왔던 꿈이었습니다. 머리가 셋 달린 독사가 혀를 날름거리며 자신에게 덤벼들었습니다. 머리를 칼로 내리치면 잘린 머리가 혀를 날름거리며 끝없이 덤볐습니다. 왕은 공포에 질려 발버둥을 치며 꿈을 깨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날 밤은 달랐습니다. 왕이 독사에게 시달리고 있을 때, 벽에 걸린 그림 속의 호랑이가 ‘어흥’하고 부르짖더니 날듯이 튀어나와 독사의 머리를 네 발톱과 이빨로 단번에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독사는 힘없이 죽어가며 표독한 눈으로 왕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림속의 호랑이가 왕을 지켜주는 것이었습니다.

다음 날은 하늘을 덮을 만큼 큰 날개를 가진 독수리가 부리와 발톱으로 공중에서 습격해 오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그림 속의 용이 입에서 불을 뿜으며 벽에서 솟아나와 독수리를 낚아채서 왕을 구해주었습니다.

왕은 그림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진심으로 믿었습니다. 지위와 권력과 재력을 지켜주는 그림을 머리맡에 두고 나서부터 안심하고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세상에 두려운 마음이 들면 그림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림속의 호랑이와 용과 봉황은 늠름하게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왕은 그림에 대한 신뢰감이 더욱 커졌습니다. 호위장수를 불렀습니다.

“호위장수. 그림을 더 살 수 없겠소? 궁궐의 방마다 걸어 놓아야겠소.”

“하오나..., 그림 값이 워낙 비싸서...”

“무엇이라고? 그림 값? 그게 무슨 말이오? 어서 그 그림을 사 오시오. 왕국과 왕을 지키는 신비한 무기를 사는데 무슨 돈을 아낀단 말이오?”

“알겠습니다. 대왕님.”

호위장수는 그림의 떡장수를 찾았습니다. 떡 장수는 언제나처럼 사람들에게 떡을 나누어 주고 있었습니다. 그림의 떡 장수 주위에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있었습니다. 호위장수는 그림의 떡장수에게 말했습니다.

“호랑이와 용 그림을 더 그려 주셔야겠소. 많이 그리시오. 궁궐의 여기저기 붙여 놓아야 하겠소.”

하면서 얼굴 가득 웃음을 띠었습니다. 왕의 신임을 두텁게 얻고 있다는 것이 기쁜 것 같았습니다. 호위장수는 돈을 아끼지 않고 그림을 샀습니다.

삽화=인전(仁田)
5.

사람들은 갈수록 생활이 어려워지고 있었습니다.

“세상에... 그림을 산다고 세금을 이렇게 혹독하게 거두어서야...”

굶는 사람이 더 몰려들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림의 떡장수는 부지런히 그림을 그려 떡을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림의 떡 장수 주변에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졌습니다. 호위장수를 만난 후 그림의 떡 장수는 호랑이 그림을 틈나는 대로 그렸습니다. 그릴수록 돈이 들어왔습니다. 그림의 떡 장수에게 거액의 그림 값이 들어오는 것을 본 덕보가 물었습니다.

“그 많은 돈으로 무엇을 하세요?”

그림의 떡 장수는 덕보를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허어...아이야... 세상에 공짜라는 것은 없단다. 내가 떡을 그려 나누어주고 있지만, 공짜로 얻는 것이 아니란다. 어딘가의 떡을 가져다주는 것이지... 아마도 왕의 곳간이 텅텅 비어갈 것이다....”

덕보가 의아스럽다는 듯이 물었습니다.

“그러면 지난번에 주신 떡이나 홍시도....?”

“그럼, 떡도 떡집 떡이었고, 감도 산에서 자라는 감을 따서 준 것 뿐이다... 연장도 나중에 만들 연장을 미리 빌려 온 것이었고... 세상에 공짜로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단다.”

덕보는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왕이 그림을 많이 살수록 백성들의 살림은 더욱 어려워지고, 불만은 점점 더 커져 갔습니다. 시장에서 그림의 떡을 얻어먹고 사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허기를 채운 사람들의 목소리가 조금씩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왕은 자기만 잘 살면 백성은 굶어 죽어도 좋단 말인가? 비싼 그림만 사들여 궁궐만 지키면 된단 말인가. 그림 값으로 백성들을 먹여 살려야 할 것 아닌가?”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백성들의 불만은 아랑곳없이 그림을 대궐의 방마다 걸어놓은 왕은 스스로 안심하였습니다.

‘호랑이가 이빨과 발톱을 세워 나를 넘보는 독사들을 물리치는 한 내 지위나 권력이나 재력을 넘보는 자는 없을 것이다. 외적이 쳐들어오면 저 용이 하늘을 날아 불을 뿜어 지켜줄 것이다. 호랑이와 용과 봉황 그림이 있는 한, 왕과 왕국은 안전할 것이다.”

왕은 그럴수록 호위장수를 믿음직스러워하며 그림을 더욱 더 애지중지했습니다.

6.

어느 날, 시장에서 떡을 받아먹고 있던 사람 중 눈매가 날카로운 사람이 사람들에게 말하였습니다.

“여러분... 요즘 이야기를 듣다보니, 왕은 그림을 사는 데만 골몰하고 우리 백성들의 생활은 돌보지 않고 있다 하더이다. 커녕, 불만을 말하면 잡아다가 옥에 가두고 모질게 고문을 한다 하더이다. 그림을 사들이느라 나라의 곳간도 비어가고 있더이다. 먹지고, 입지도 못하고 낸 세금이 다 그림 값으로 들어가고 있다 하니 이래도 되겠소? 이렇게 굶어 죽을 바에야 차라리 저 곳간을 깨고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읍시다. 그림의 떡 장수가 공짜로 주는 떡도 미안해서 더 이상 못 먹겠소. 어떻소이까?”

사람들은 서로서로 눈치를 보면서 은근히 눈매가 날카로운 사람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사람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옳소. 옳소...”

사람들이 점점 모여들자 작은 외침이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곳간에 쳐들어갑시다. 궁궐로 쳐들어갑시다.”

왕의 비밀 첩자가 이런 동정을 놓칠 리는 없었습니다. 비밀 첩자는 즉시 호위장수에게 보고를 하였고, 호위장수는 왕에게 달려갔습니다.

“대왕님. 지금 백성들이 심상치 않습니다. 반란을 일으키려 하고 있습니다. 즉시 조치를 취해야 할 것입니다. ”

“호위장수. 당신이 바로 나를 지키는 사람 아니오? 내 지위와 권력과 재력을 지키기 위해 그림들을 사서 가져오지 않았소? 그림 속의 호랑이와 용들로 하여금 나를 지키도록 하시오!”

“알겠습니다. 대왕님. 신기한 그림을 가지고 저 역적들을 쳐부수도록 하겠습니다. 염려 마시옵소서.”

호위장수는 왕의 침실에 있는 그림들을 떼어 성문에 전면으로 배치하였습니다. 藍?자리를 넘보는 독사들의 무리는 가차 없이 처단될 것입니다. 성안으로 쳐들어오는 백성이 있으면 그림 속의 호랑이와 용과 봉황이 즉시 그림 속에서 뛰어나와 왕에게 덤비는 백성들을 사정없이 할퀴고 찢을 것입니다. 호위무사는 그림 뒤에 호랑이와 용의 갑옷을 입은 병사들을 이중 삼중으로 배치하였습니다.

왕은 궁궐 깊숙이 숨어 호위장수의 이런 조치를 보면서 마음속으로 안심하였습니다. 사악한 독사들도 호랑이 앞에서는 힘도 없이 죽어갔습니다. 저 어리석은 백성들은 용이 얼마나 무서운지도 모르고 있을 것입니다. 굶주려 힘이 없는 백성들이 맨손으로 호랑이와 용을 이길 수 없을 것이고, 호랑이와 용의 갑옷을 입은 충직한 호위병사들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성문 밖에 백성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두려움에 눈치를 보던 백성들의 수가 많아지자 점점 대담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작은 소리로 외쳤습니다.

“대왕이시여. 통촉하시옵소서. 불쌍한 백성들을 굽어 살펴 주시옵소서....”

그러나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외침도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왕은 선정을 베푸시오. 백성을 돌보시오.”

외침은 함성이 되었습니다.

“왕은 무얼 하오. 이 땅은 백성들의 땅 아니오. 당장 백성들을 살려내시오!”

함성이 점점 커지면서 구호는 더욱 격렬해져 갔습니다.

“못살겠소. 더 이상 못살겠소. 왕은 물러나시오. 백성을 못 살게 하는 왕은 물러가시오. 이 땅의 주인은 백성이 아니겠소?!”

사람들은 급기야 주먹을 불끈 쥐고 외쳤습니다.

“물러나라! 물러나라! 왕은 물러나라!...”

함성은 천지를 울리는 진동이 되어 궁궐속의 왕의 귀에까지 들렸습니다. 이 함성을 들은 왕은 노발대발하며 호위장수에게 명했습니다.

“당장. 저 놈들을 박살내지 않고 무엇하는고... 당장 저것들을 무찌르시오. 창과 칼로 다 죽이지 않고 무얼 하고 있소!”

호위장수는 왕의 명령을 듣자, 다시 부하들에게 소리를 쳤습니다.

“무엇하느냐! 그림들의 호랑이를 풀어라. 나라의 지위와 재물을 넘보는 저 놈들을 다 없애 버려라!”

이 말을 듣자, 그림들 속에서 호랑이와 용과 봉황이 나는 듯 튀어 나왔습니다. 이빨이 칼날보다도 날카로운 호랑이, 입에서 불을 뿜으면서 으르렁거리며 꿈틀거리는 용, 백성들 머리 위를 날개를 퍼덕거리며 치솟아 오르는 봉황. 세워 놓은 그림 속에서 튀어나와 발톱을 세우고 당장 잡아먹을 듯 으르렁대는 이들의 무서운 모습에 사람들은 모두가 겁을 먹고 땅에 엎드리고 말았습니다.

이때였습니다. 백성들 사이에 있던 그림의 떡 장수가 나왔습니다. 그는 능숙한 솜씨로 종이를 펼치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실눈을 뜨고 그림을 보았습니다. 호랑이와 용과 봉황도, 호위병사도 호위장수도 떡 장수가 그리는 그림을 보았습니다. 떡 장수가 그린 그림은 바람이 부는 대로 이리저리 눕는 가냘픈 풀이었습니다. 풀은 점점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 풀숲에서 호랑이와 용과 봉황이 뛰노는 그림이 그려졌습니다. 호랑이와 용과 봉황은 그림을 보자 눈빛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두려워 엎드려 떨고 있는 백성들을 내려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을 향해 천둥치듯 세상이 진동하는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으르렁....어흥....”

사람들은 두려워 어쩔 줄 몰랐습니다. 호랑이와 용과 봉황이 천천히 뒤돌아서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호랑이와 용의 갑옷을 입은 호위병사들에게 이빨을 드러내 보이며 으르렁거리기 시작했습니다. 호위병사들은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습니다. 멀리서 이를 지켜보던 왕은 갑자기 돌변하여 이쪽을 노려보는 그림속의 호랑이와 용과 봉황의 모습에 깜짝 놀랐습니다.

“호위장수, 호위장수... 이게 웬일이란 말이요. 왜 갑자기 저 호랑이와 용이 나를 노려 보는거요? 어서 호위무사들과 저 호랑이를 무찌르시오. 어서. 나를 지키시오. 어서...”

초조하게 외치는 왕의 말을 듣자 호위장수가 병사들의 앞에 섰습니다.

“충성스런 나의 병사들아. 내 말을 들으라. 우리는 이 나라의 땅과 재산을 지키며 우리의 주군에게 충성을 맹세하였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주군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한다. 목숨이 아까운 자 있는가?”

병사들은 한결같이 외쳤습니다.

“없습니다!”

“그렇다면 답하라. 너희 병사들의 주군은 누군가? 나 인가? 저 왕인가? 답하라!”

호위장수는 병사들을 노려보며 물었습니다. 이때 병사 중에서 시장에서 사람들을 향해 외쳤던 눈매가 날카로운 사내가 나왔습니다. 그는 병사들과 함께 목소리를 맞추어 외쳤습니다.

“호위장수입니다!”

이 말을 들은 대왕은 혼비백산했습니다.

“호위장수, 호위장수... 당신이 어찌 감히 나를...나를 배신한단 말이요! 이럴 수가. 이럴 수가...내가 그토록 믿었건만... 그림을 사준 사람이 바로 당신 호위장수 아니었던가!?”

호위장수가 왕을 향해 말했습니다.

“그렇소. 나는 당신의 호위장수였소....그러나 나는 똑똑히 보았소이다. 당신이 나의 주군이 될 수 없다는 걸...당신이 이 나라의 주인이 아니라는 걸.... 보시오! 저 호랑이와 용과 봉황을. 저들은 지위와 권력과 재력의 주인을 끝까지 지켜주는 영물들이오. 그러나 권력의 주인은 당신이 아니라고 저 그림이 오늘 말해주고 있소. 당신은 지위와 권력과 재력의 주인이 아니라 도적이라는 것을 저 그림이 말해주고 있소. 그렇지 않소?!”

“네 놈이, 네놈이 나를....”

대왕이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말을 더듬고 있을 때, 호랑이 한 마리가 번개같이 날아 왕의 가슴을 발톱으로 할퀴고 이빨로 물어뜯었습니다. 용도 하늘을 날아 왕을 향해 불을 뿜었습니다. 호위병사들은 이 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었습니다. 백성들 또한 이 놀라운 광경에 넋을 놓고 바라만 보고 있었습니다. 탐욕스럽던 대왕은 비참하게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대왕이 힘없이 쓰러지는 것을 본 백성들이 모두 두 손을 들고 소리쳤습니다.

“만세.. 만세...왕이 죽었다! 왕이 죽었다! 자기만 살려던 왕이 죽었다....”

백성들의 끝없는 함성이 온 세상을 메아리쳤습니다. 백성들의 함성을 뒤로 하면서 호위장수가 그림의 떡 장수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는 떡장수의 두 손을 잡았습니다.

“고맙소. 그림 장수... 약속을 지켜주어서 고맙소. 당신 말이 맞았소. 그림을 사면 내가 왕이 된다던...과연 그림대로 되었소이다. 감사하오.”

그림의 떡장수가 호위장수를 보고 말했습니다.

“장수. 어진 왕이 되시오. 백성을 하늘같이 섬기는 왕이 되시오. 백성을 버리면 가장 가까운 장수도 주군을 버리는 법이오. 마음에 꼭 새기시오. 권력의 주인은 왕이 아니라는 것을...”

7.

봇짐을 챙기고 길을 떠날 채비를 하면서 덕보가 그림의 떡장수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그러면 권력의 주인이 왕이 아니면 누구에요? 지위와 재력의 주인은 또 누구에요? 나라의 주인은 누구예요? 그림 속의 호랑이와 용과 봉황이 지켜준다는?”

그림의 떡 장수는 덕보를 보고 싱긋이 웃었습니다. 덕보의 손을 꼭 잡았습니다.

“너도 보지 않았느냐? 호랑이와 용과 봉황이 그림에서 자기들이 본 주인의 모습을... 가냘프고 바람에 흩날리고 가랑비에 젖는 힘없는 풀들.... 이 나라 산천 어디든 피어나, 꽃피고, 자라며, 씨를 뿌리는 초목들... 지위와 권력과 재력을 만들어 낸 이 땅의 여린 백성, 민초들이 아니더냐?”

미노스 동화 작가 최민호.
■ 미노스 프로필

본명은 최민호, 대전 출신으로 제24회 행정고시에 합격하고 공직에 입문해 충청남도 행정부지사, 행정자치부 인사실장에 이어 소청심사위원장,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청장, 국무총리 비서실장 등 차관급 고위직을 세번이나 거쳤다.

영국 왕립행정연수소(RIPA)를 수료하고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 행정학석사, 일본 도쿄대학 법학석사, 단국대학교 행정학 박사를 취득한뒤 미국 조지타운 대학에서 객원연구원을 역임했다.

공직 퇴임 후 고려대·공주대 객원교수, 배재대 석좌교수로 활동했으며 현재는 홍익대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30여년의 공직생활 퇴임후 '어른이 되었어도 너는 내 딸이니까(새움출판사)'라는 단편소설과 동화가 있는 이야기책을 출간, 동화작가로 데뷔했다. 단순히 어린아이들을 위한 '동화(童話)'라는 장르를 뛰어넘어 남녀노소 모두를 아우르며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동화(動話)'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려는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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