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위 공직자 출신 최민호 작가의 따뜻한 동화 이야기

[사진=미노스 제공]
1.

안개는 어둠과 전혀 다른 것이었다. 어둠은 빛으로 뚫고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안개는 모든 시야를 흰 장막으로 막아서서 뚫고 나갈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해가 떨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뿐인데, 주위는 짙은 안개로 인해 하얗고도 검은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걸어가고 있노라니 나무며, 가로등이며 서 있는 것들이 문득 문득 스스로 다가와 유령처럼 눈앞에 우뚝 섰다.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이 느닷없이 하얀 어둠 속에서 정물화처럼 나타난다. 사물은 코앞에 다가서서야 홀연히 나타났다. 손목과 목덜미로 스며드는 미세한 안개방울은 찬 겨울 날씨의 으스스함에 더하여, 코트의 깃을 오싹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기침이 쿨룩쿨룩 나왔다. 잡풀이 우거진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 산기슭에 있는 외진 건물에 간신히 도착하였다. 약도를 확인할 필요조차 없었지만 안개로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아, 현관 앞까지 다가가 세로로 걸려있는 나무 현판을 더듬듯 읽어 보았다. 맞았다. 보건소였다.

센서로 자동으로 불이 켜지는 현관 등이 켜졌지만 안개로 인해 효과는 미미했다. 초인종의 위치를 알아내는 순간, 이내 현관 등이 꺼져 다시 캄캄해졌다. 초인종을 몇 번을 눌렀을 때야 안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실내등이 켜지고 현관문이 열리자 환하게 실내가 보였다. 처음으로 숨이라고 하는 것을 쉬어보는 것처럼 그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실내에 있던 남자는 조심스럽게 밖을 살폈다.

“새로 부임하는 보건소장입니다.”

라며 큰소리로 자기소개를 하자, 그제서야 실내의 남자는 안심이 된 듯 문을 활짝 열고,

“어서 오시오. 이렇게 갑자기 올 줄은 몰랐소.”

하면서 맞아 주었다. 현관 안으로 들어 선 젊은 남자는 들어오자마자 큰 여행 가방을 내려놓고, 뒤 돌아서서는 무릎 사이에 두 손을 넣고 맞비비기 시작했다.

“밖이 그렇게 추운가요? 손이 시렵게?”

젊은 남자는 손을 충분히 비비고 나서 주인의 악수에 응했다.

“아닙니다. 손이 차가워서 첫 악수할 때 실례가 될 것 같아서요...”

새로 부임하는 보건소장의 손은 그래서 그런지 따뜻했다. 주인의 안내로 두 남자는 차탁이 있는 응접소파에 마주 앉았다.

“오늘은 안개가 짙어서 내일이나 올 줄 알았어요. 이런 날은 손님이 오기 힘들지요. 먼 길 오시느라 수고하셨소.”

“감사합니다. 이런 곳인 줄은 몰랐습니다.”

차가운 손을 비비면서도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혀있는 것을 보면 추위 이전에 신임 소장이 얼마나 긴장하고 있었던가 알 수 있었다. 밤이 늦은 것 같았지만 시간이 그리 많이 된 것은 아니었다.

“아, 참. 저녁 식사는...?”

“아. 아니. 괜찮습니다...”

소장은 싱크대로 가서 라면을 끓이기 시작했다. 멋쩍은 듯, 송구해하면서도 젊은 신임 보건소장은 라면을 맛있게 먹었다. 분위기가 한결 따뜻하고 친근해졌다. 그제서야 두 보건소장은 제대로 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2.

레지던트 과정을 마친 보건소장들은 30대의 군의관 장교들이었다. 전임 소장은 이제 전역을 앞두고 있었고, 신임 소장은 막 임관하여 부임한 대위였다.

“이 지역은 겨울이 되면 안개가 이렇게 지독하게 껴요. 마을 가운데 흐르는 하상천 때문에 그렇다고 하는데,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에 개천이 흐르면 일교차가 큰 날에 꼭 안개가 끼지. 요즘이 한창 그럴 때라서... 머지않아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안개가 더 심하게 생긴다오. 이런 안개는 처음일거요. 서울에서는 볼 수가 없지...”

“언제까지 이런가요?”

“봄이 되면 풀려요. 하지만 매일 끼는 건 아니고, 그런 날이 있어. 심한 날이...”

군의관은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인사서류를 흘낏 보면서, 호기심어린 눈초리로 후임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런 벽촌 보건소를 자발적으로 지원하다니...훌륭하오. 서로 오지 않으려고 애쓰는 곳인데...무슨 사연이라도 있소? 이런 스펙에?...”

“아닙니다. 별 특별한 것은 없습니다. 의사 구경하기 힘든 곳이라 하니, 좀 별난데서 의사노릇 좀 해보려고요...”

“이 곳에 대해서는 뭐 좀 알고 왔소?”

“아닙니다. 그저 음성 나환자들이 사는 마을이라는 것 외에는...”

선배는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알고 왔으면 됐다는 듯 했다. 선배는 후배에게 간단하게 보건소에 대해 소개 겸 설명을 해주었다. 1층에는 진료실, 주사실, 약품실, 그리고 병상이 3-4개 있는 입원실. 2층은 소장의 숙소였다. 소장은 주말이면 가족이 있는 도시로 나가곤 하였는데, 그럴 때면 간호사가 대신 보건소를 지킨다고 하였다. 간호사는 이 마을에 터 잡고 살고 있는 중년의 여성인데, 20년 이상 근무를 해서 간호전공을 하지는 않았지만 간호사로서 손색은 없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나란히 2층 숙소로 올라가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후배는 깍듯이 선배 장교에게 경례 부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한국 이름 사희문. 나이는 33세. 미국 영주권자. 존스 홉킨스 의과 대학 졸업.

전임 소장은 이런 경력의 소유자가 올 곳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미국인이나 다름없는, 더구나 명문중의 명문의대 출신 의사가 한국의 이런 오지마을의 보건소장을 지원한다는 것은 예사롭지 않은 일이었다. 무슨 사연이 있거나... 보기 드문 히포크라테스 후예이거나.... 이런 사람이 부임한다는 인사통고를 받았을 적부터 궁금증과 호기심을 가지고 신임 소장을 기다리고 있었던 참이었다.

3.

보건소의 아침이 밝았다. 밤의 안개는 언제 그랬냐는 듯, 아침은 크리스탈처럼 맑고 깨끗했다. 아. 이 신선한 공기.. 새로 부임한 사희문 소장은 코를 허공에 킁킁대며 대기의 냄새를 맡았다. 산 속의 맑은 샘물을 마실 때 혀에서 단맛이 감돌 듯 공기에서 단맛이 감돌았다. 산소의 이 단맛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폐를 비롯한 온몸의 오염원이 깨끗이 정화되는 듯하였다. 모처럼 아침이면 습관적으로 나오는 기침도 나오지 않았다. 만성 천식도 이곳의 청정한 공기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는 것 같았다. 하루 밤의 숙면에 온몸의 피로감이 가셔졌다.

젊은 소장은 아래층으로 내려와 고참 소장이 차린 토스트와 차를 마시며 마을의 상쾌한 아침에 대해 찬탄하였다.

“우리가 의사이지만, 병도 공기에서 오고, 치유도 공기로부터 온다는 것을 여기 와서 실감했다네. 이 마을의 물과 공기만 마시고 살면 신선이 될 것 같아. 나는 환자가 오면 주사에 약물을 넣지 않고 공기를 넣어서 주고 싶어. 공기가 약보다 몇 배는 더 좋은 약이니...”

“하하하. 선배님. 농담도... 공기주사 놓으면 어떻게 되는지 아시면서... 그만큼 공기가 좋다는 말씀이시군요. 진실로...”

“그래. 이 마을은 정말 아까워. 이런 마을이 이렇게 벽촌으로 남아 있다는 게...”

“관광객들이나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지 않나요? 산도 좋고, 경치도 좋은데...”

“누가 오려고 하겠소? 나환자촌에... 이 마을은 인구가 늘지 않는다네. 사람들이 나가지도 들어오지도 않으니까. 마치 석고 같은 마을이야. 굳어 버린 100년 전의 화석 같다네. 3년 전 내가 부임할 때도 선배가 지금 나하고 똑같은 말씀을 하셨지.”

“............”

“아, 한 가지 주의할 사항이 있네. 이따 간호사가 오면 환자이야기 말고는 마을에 대해서는 되도록 언급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네. 과도한 호기심도 삼가고... 여기서는 금기시 되어 있는 말들이 있으니...간호사도 음성이니까... 하지만 걱정하지는 말게. 서로서로 알아서 잘 챙기니까...”

인수인계가 끝나면 전임 소장은 언제 볼지 모를 사람이었다. 서울의 모 병원에 취업도 이미 결정되었다. 두 보건소장은 업무 인수인계를 시작하였다. 전임 소장의 마을에 대한 소개는 이러했다.

4.

버려진 마을이었다. 하늘의 저주, 천형이라 일컬어지던 나병은 어찌할 길이 없는 것이었다. 약도 병원도 변변치 않던 시절, 공기와 피부접촉에 의해 전염되는 이 병은 걸렸다 하면 버림받을 수밖에 없었다. 손가락, 발가락, 눈썹, 머리칼이 없어져버리는 이 무서운 병에 걸린 사람이 가까이 오는 것을 사람들은 가장 두려워하였다. 나라에서는 그들을 일반 사람들과 격리시키면서, 동시에 나름 보호하기 위하여 그들만의 마을을 만들었다. 100년 전 버려졌던 일이었다.

죄 없는 천벌을 받으며 살고 있는 이들 마을 사람들에게 관심을 두는 사람이 있었다면 오직 두 부류. 선교사와 의사였다. 선교사는 마을에 들어와 선교를 하면서 사람들에게 헌신하였다. 그들은 예배당을 세웠다. 그리고 수녀원이 들어섰다. 환자들의 피고름을 짜주고 빨래를 하면서, 버려진 그들을 위로하고 안아 주었다. 그리고 서서히 환자가 되어 죽는 이들도 많았다.

나라에서는 보건소를 세웠다. 의사인 보건소장은 나라에서 파견되어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동시에 그들을 관리하였다. 마을사람들은 외부에 나가지 못한다. 외부 사람들은 들어오지 못한다. 정기적으로 진료체크를 하면서 보건소장은 마을사람들을 관리하였다. 보건소에 지원하는 의사가 많지 않자 군의관이 파견되었다. 군의관인들 이곳을 좋아할 리는 없었다. 그들 중에 슈바이처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마을사람들의 눈에는 점령군같이 보이는 사람이 많았다. 마을사람들은 돼지를 키우고, 땅을 개간하여 농사를 지으며 생계를 이어갔다. 그들은 돈사를 세웠다.

이 마을 사람들이 생명같이 생각하는 덕목이 있었다. 청결이었다. 마을은 늘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천국의 정원같이 아름답게 가꾸어져 있었다. 정원 한 가운데에는 조각상이 서 있다. 그들이 진심으로 존경하고 감사해하는 두 사람, 한 미국인과 한 여성의 얼굴이었다. 그들의 문드러진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치료해 준 미국인 선교사와, 새끼 돼지 두 마리를 처음으로 선사하며 용기를 잃지 말고 키우라고 등을 두드리며 격려해 준 어느 부인이었다.

그리하여 마을에는 정원을 중심으로 숲속에는 작은 예배당과 수녀원이, 반대편 언덕 위에는 보건소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돈사들... 100년 전의 그 광경은 지금도 변함이 없었다.

“사 소장도 알다시피, 사람들의 고정관념이라는 것은 미신처럼 무서운 것이라오. 지금 한센 병은 유전병도 급성전염병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다 알지 않소? 리팜피신 주사 한번이면 99.9% 끝낼 수 있고 임신으로도 유전으로도 전염되지 않고, 그저 치료하면 완치되는 피부병인데도 환자는 말할 것도 없고 완치된 사람까지도 백안시하는 것이나, 저들이 생산하는 돼지고기나 농산물을 기피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말이요.

이 마을사람들은 사람을 믿지 않소. 오로지 신만을 믿는 것 같소이다. 의사인 보건소장도 믿지 않고 있소. 그저 3년마다 지나가는 사람이라 생각할 뿐, 자신들을 보호하는 사람이라고는 생각지 않고 있소. 그건 과거 우리 선배들의 행적을 돌이켜보면 이해가 가기도 하는데 세월이 흘렀어도 좀처럼 나아지는 것 같지가 않소. 솔직히 나도 마을사람들의 신뢰를 얻지는 못하였소. 열심히 해봐도... 역대 선배들도 다 그러했고... 그래서 간호사는 이 마을사람을 쓰는 것이오. 사 소장이 어떤 생각으로 이 마을을 자원했는지는 모르지만...”

전임소장은 신임소장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고정관념 말이요. 서로가 무서워하는 그 미신은 정말 무섭소. 나병보다도 말이요.”

미신이 지배하는 역사는 길고 길었다.

“과학이 지배하는 시대에 미신이 지배하는 곳... 그리고 미신이, 미신이 아닌 마을. 바로 이곳이라오. 믿을 수 없겠지만... 아마 머지않아 몸소 겪게 될 것이오. 그러면 내 말이 이해될 것이오...”

신임 사희문 소장의 생각이 복잡해졌다. 아름다운 경치와 맑은 공기, 파란 하늘에 먹구름이 끼는 듯 했다. 스스로 정직하게 생각하면, 이곳은 오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왜 와야 하는지도 모르는 곳이었다. 미국의 아버지와 자신을 후원해주는 포사이드 재단에서 이곳에 가서 봉사를 하여야 한다며, 의대를 보내면서 입버릇같이 말한 곳이었다. 의사가 그런 곳에 가지 않으려면 의학공부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며 권하였던 곳이었다. 그들의 권유에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를 상기하며 막연한 로망으로 자원했던 이 곳... 마음이 약간 어두워졌다. 기침이 나왔다. 아침을 들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한 중년 여인이 들어왔다. 간호사였다. 그녀는 신임 소장을 보고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하곤 이내 자리를 비켰다. 전임소장은 신임소장에게 인계를 마치고는 짐을 싸기 위해 2층 숙소로 올라갔다. 2층에서 작은 소리로 콧노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3년간 군생활의 전역을 앞두고 있는 것이다.

5.

12월이 깊어갔다. 밤은 점점 짧아지고, 안개가 끼는 날은 점점 많아졌다. 사희문 소장은 간호사가 퇴근하고도 밤늦게까지 진료실에서 환자들의 진료기록들을 살펴보곤 했다. 마을과 마을사람들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부임한 이래 딱히 소장에게 마음을 주는 사람도,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눌 만한 상대도 없다보니 외로운 마음에 진료기록을 살피는 것이 습관이 되어 버린 탓도 있었다.

간호사는 말이 없는 편이었다. 묻는 말에 성실히 대답하곤 하지만, 스스로 말을 걸거나 생각을 말하는 법은 거의 없었다. 환자가 찾아오면 증상을 들어보고 알아서 처치를 하는 일은 오히려 소장보다 더 능숙하였다. 사람들을 훤히 들여다보며 상태를 꿰뚫고 있었다. 간호사가 감당하지 못할 상태의 증상. 그것만이 소장의 할 일이었다. 간호사의 이런 역할이 소장의 입장에서 보면, 편하다면 편한 것이었지만, 마을 사람들과 접촉하는 기회는 그만큼 줄어드는 것이었다. 사 소장은 역대 보건소장들은 이점을 만족스럽게도 불만스럽게도 생각했겠다 싶었다. 사 소장은 곧 작은 천주교 예배당과 수녀원을 방문하리라 생각했다.

다행히 보건소에 대한 국가의 지원은 좋았다. 생활에 불편은 없었다. 다만, 외로웠다. 생각해 보면 그는 늘 외로웠다. 외국생활에서의 외로움... 의학공부라는 외로움... 그에게 외로움은 어렸을 때부터 좀처럼 낫지 않는 만성 천식 같은 것이었다. 유전도 아니고, 천성적인 것도 아니었지만 가지고 태어난 것처럼 늘 몸에서 떠나질 않았다.

사 소장은 가능한 한 부지런히 마을을 다니며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의 병 이전의 병을 어루만지고 치유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였다. 그들과 만날 때면, 손을 맞비벼 따뜻하게 덥혀진 손으로 손을 잡았다. 어쩐지 그들을 보면 아주 오래전에 만난 사람처럼 속으로부터 친밀감이 들기도 했다. 마을사람들과도 제법 면식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것뿐, 아직 이었다. 그들은 아직도 마음의 문을 열고 있지 않고 있음을 그들의 눈빛을 보면 직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럴 때면 밀물같이 외로움이 닥치면서 애써 심고자하는 마을에 대한 애정이 달아나 버리는 것 같았다.

6.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지는 어느 저녁 날. 동지의 긴 밤이 시작되면서, 안개가 스멀스멀 마을을 뒤덮기 시작했다. 안개는 하늘에서부터 아래로 드리워지는 것이 아니었다. 늑대같이 지면에 낮게 몸을 붙이고 소리도 없이 땅 위에서 기어오는 것이었다. 밤이 깊어질수록 안개는 짙어져 갔다. 흰 장막, 마을은 회를 칠한 거대한 적막의 무덤 속에 파묻혀 가는 것 같았다. 그 날, 사 소장은 일찌감치 간호사가 퇴근하자, 보건소 문을 닫고 2층의 숙소에서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안개가 짙어지는 바깥을 내다보며 어둠과 안개가 어루어내는 기괴한 조화를 멍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창밖은 불을 끄고 보면 검은 밤이요, 불을 켜고 보면 하얀 밤으로 변하곤 하였다.

‘부임하는 날도 이랬었지....’

썩 좋지 않은 기분으로 언덕길을 올라 보건소를 찾아왔던 그 날이 떠올랐다. 창문 커튼을 닫으려 할 때였다. 현관에서 초인종 소리가 ‘딩동 딩동’ 하고 들렸다. 2층 창밖으로 아래층을 내려다보았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 밤에 누구일까?’ 의아해하며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 다시 ‘딩동’하고 초인종이 울렸다. 아래층을 내려가면서 현관등을 켰다. 그리고 현관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안개 탓인지 어둠 탓인지 서 있는 사람이 얼른 눈에 띄지 않았다. 사 소장은 현관문을 한 걸음 나와 두리번거리며 눈을 크게 뜨고 초인종 누른 사람을 찾아보았다. 순간, 사 소장은 죽어 자빠질 듯 놀랐다.

그 곳에, 검게 늘어진 긴 옷을 입고, 검은 머리를 허리까지 늘어뜨린 여자가 유령처럼 안개 속에 서 있는 것이었다. 음산하다 못해 지옥의 사신인 양 암귀의 모습으로 이쪽을 노려보며 서 있는 모습은 안개에 가려져 더욱 괴기스러웠다. 사 소장은 온몸이 얼어붙어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더듬거리며 물었다. 순간 기침이 나왔다. 쿨럭 쿨럭...

“누, 누구, 누구시오?”

유령은 사 소장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없이 사 소장을 쏘아보았다.

“누구, 누구시란 말이요?”

떨리는 목소리로 재차 묻는 소장의 말에, 말없이 서 있던 유령은 홀연히 안개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몇 걸음 나아가 안개 속으로 사라진 그 여자를 찾아보았지만, 짙은 안개와 어둠속에서 자취를 찾을 길이 없었다. 사 소장은 뒷걸음을 치며 현관문으로 다시 들어왔다.

‘쿨럭 쿨럭 쿨럭...’

사정없이 천식기침이 쏟아져 나왔다. 숨을 몰아쉬며, 들어오자마자 사 소장은 사무실 약서랍을 급히 열어 기침약을 먹고 가까스로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럴 리는 없다. 분명히 초인종 소리를 들었었다. 유령이 초인종을 누를 리는 없을 것 아닌가? 왜 초인종을 누르고는 그냥 사라지고 마는가? 환청이었고, 착각이었나? 사 소장은 으스스한 두려움에 몸이 떨렸다. 귀신? 의학을 공부한 사람이 귀신을 보았다고? 고개를 저으면서, 사 소장은 괴기영화에나 나올법한, 안개가 짙은 겨울밤에 유령을 본 자신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다시 기침이 뱃속에서부터 울려 나왔다. 쿨럭, 쿨럭...

밤새도록 그 모습이 눈앞에서 떠나지 않았다. 치렁치렁 긴 머리에 검은 장막같은 옷을 몸에 두르고, 자신을 뚫어지게 응시하던 햐얀 얼굴.... 너무도 충격적이었다. 사 소장은 침대에 누워서도 떠오르는 그 모습이 생각나서, 애써 고개를 저으며 부인하다가 끝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7.

날이 밝아 간호사가 출근하자, 사 소장은 꺼칠한 얼굴로 간호사를 소장실로 불렀다. 무어라 말을 할까 말문이 열리지 않았다. 탁하고 쉰 목소리로 간호사에게 물었다.

“이 마을에 혹시..., 어떤 여자... 미친 여자가 있습니까?”

간호사는 은근히 놀라는 눈치였다.

“왜요? 미친 여자...? 그런 사람은 없는데요. 왜요? 무엇을 보셨나요?”

“어떤 미친 여자 같은 사람을 어제 보았소. 꼭 유령같이 보였소만... 유령일리는 없고...그런 사람 없습니까?”

간호사의 눈빛에 놀람이 가득찼다.

“유령 같은 여자요? 그 사람이 어제 밤에 왔었나요?”

“어제 밤에 보건소에 와서 초인종을 울렸어요. 내가 나가보니 그냥 서 있다 사라지고 없어졌어요. 꼭 귀신같이 보입디다만...혹시 마음속에 그런 환자로 짚이는 사람이 없나요?....”

“어떤 옷을 입었어요?”

간호사는 눈에 공포와 긴장의 기색을 가득 담고서 물었다.

“치렁치렁 내려오는 검은 옷에 허리까지 길게 머리를 풀고 있더군요.”

간호사는 소장을 한참동안 쳐다보았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간호사는 정색을 하고 진지하게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아니에요. 미친 여자가 아니에요. 유령이에요. 이 마을에 유령이 있어요. 소장님이 보셨군요. 안개 낀 겨울날 밤에 유령이 나타나곤 했어요. 그 유령이 또 나타났군요.”

소장은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그게..무슨...말도 안되는... 이 개명천지에 유령이라니...”

믿어지지 않는 눈빛으로 간호사를 보았다. 50대 중반의 간호사는 젊은 소장에게,

“사실입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한 30년 전쯤 되겠군요. 한 보건소장이 이곳에 부임해 오셨었죠. 그때는 지금같이 자동차나 전화가 많을 때가 아니었어요. 그래서 마을에 급한 환자가 발생하면 의사가 왕진가방을 들고 환자를 찾아가곤 하였죠. 그래서 소장님은 늘 왕진 가방을 싸놓고 잠자리에 들곤 하셨대요.”

간호사가 전하는 이야기는 마치 그 장면을 눈앞에 보기라도 하듯 생생했다.

?..... 그 날, 안개가 짙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겨울,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날이었다. 소장은 2층 숙소로 들어가 잠을 청하였다. 그날따라 낮에 환자가 많아 피곤함에 몸이 물먹은 솜같이 무거웠다. 잠자리에 누워 막 곤한 잠에 떨어졌을 때였다. 초인종이 울렸다. 잠도 덜 깨고, 늦은 시간에 피곤에 절은 소장은 무쇠같은 발을 끌며 무심코 현관문을 열었다. 이때 눈앞에 서 있는 여자. 길게 늘어진 검은 옷에, 헝크러진 검은 머리를 허리까지 내려뜨리고 현관 앞에 서 있던 한 여자가 소장을 보자 다급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빨리요. 빨리요. 우리 아기가 죽어가요, 어서 빨리 나오세요. 선생님.”

소장은 반사적으로 두꺼운 외투를 걸치고, 왕진가방을 챙겨 여자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날은 음산했고, 안개가 짙어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피로에 젖은 소장은 무감각하게 후레쉬로 여자의 뒤를 비치며, 빠른 걸음으로 앞장서서 걸어가는 여자를 뒤따라갔다. 여자는 마을 구석 어느 오두막에 이르자 발걸음을 멈추었다. 대문도 없이 초라한 집이었다. 여자는 집안으로 들어가며 다급하게 말을 했다.

“어서요. 저기 저 방에 우리 아기가 있어요. 어서요.”

소장은 건넌방에 들어갔다. 희미한 호롱불에 갓난아기가 가쁜 숨을 쌕쌕거리며 누워 있었다. 얼른 아기를 안고 살펴보았다. 열이 불덩이 같이 높고, 울다 지쳐 기진했는지, 아기는 울음도 울지 못하고 얼굴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위중하였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살 가망이 없어 보였다. 정신이 번쩍 든 소장은, 아기 엄마에게 왕진가방을 챙겨오라 소리를 지르고서는 자신은 아기를 외투 속에 깊숙이 감싸안고 허겁지겁 안개 속을 헤쳐 보건소로 내달려 왔다. 아기는 열병에 급성 폐렴 같았다. 응급조치를 하여 아기를 가까스로 살려냈다. 아기가 소생하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소장은 왕진 가방을 들고 왔을 아기 엄마를 찾아보았다. 그러나 아기엄마는 어디에도 눈에 띄지 않았다.

이튿날, 날이 밝자 소장은 어제 가보았던 길을 되짚어 아기가 있었던 외딴 오두막집을 찾아갔다. 왕진가방과 아기 엄마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오두막집에 들어선 소장은 집을 둘러보았다. 문 앞의 작은 방과 아기가 누워있던 건넌방은 비어 있었다. 그 곳에 왕진가방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아기 엄마는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때 구석에 있는 골방 하나가 눈에 띄었다. 문을 열었다. 방을 들여다 본 소장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목을 맨 아기 엄마가 천장에 매달려 있는 것이었다. 어제 밤 보건소에 나타났던 그 아기 엄마였다. 경찰을 불러 절차대로의 조치를 한 보건소장은 시체를 검시하였다. 자세히 살펴보았다. 또 다시 살피고 살펴보았다. 믿어지지 않았다. 시체는 어제 밤에 죽은 것이 아니었다. 경직상태로 보아 죽은 지 3일 이상 지난 사체였다. 면밀히 검사해 보았지만 틀림없었다. 안개 속을 뚫고 보건소에 나타나 아기를 살려달라고 말하며 자신을 데리고 간 아기엄마는 이미 3일전에 죽은 엄마였던 것이다.

소장은 망연자실하였다. 어제 밤에 본 그 여자는 유령이었던 것이다. 소장은 그 후 며칠간을 입맛을 잃고 현기증과 망상에 시달렸다. 이야기는 삽시간에 마을에 퍼져나갔다. 열병과 폐렴으로 죽어가는 아기를 못 잊어 엄마는 죽은 뒤에도 유령이 되어 아기 생명을 구했다는 것이다. 아기 엄마가 왜 갓난아기를 그대로 놔둔 채 자기만 목숨을 끊었을까는 의문으로 남았다. 그러나 엄마의 아기에 대한 지극한 사랑은 저 세상에 가도 변함없다는 감동이 불가사의한 여운으로 남아 이 마을의 전설이 되어 전해지고 있었다....?

“사실입니까? 그게...그럴 수가?...”

“정말입니다. 내 나이 그때 열댓살 가까이 되었으니까요. 노인들은 다 아는 이야기에요. 마을이 난리가 났었어요. 마을에서는 아기엄마 장례를 성대히 치러 주었답니다. 마을 공동묘지에 묻었죠. 그때가 크리스마스경이라 사람들은 그 유령을 ‘크리스마스 유령’이라 불렀습니다.”

“............”

간호사가 망설임도 없이 하는 이야기에 사 소장은 목이 뻣뻣해짐을 느꼈다. 극도로 긴장한 탓이었다.

“아기는 어떻게 되었나요? 그 뒤....”

“귀신 곡할 일이 벌어졌지요.”

“어떤?.....”

“아기는 하는 수 없이 보건소에서 맡아 키우게 되었대요. 간호사가 보살폈죠. 그렇게 한동안 지나자 아기가 건강을 되찾았답니다. 한없이 보건소에서 키울 수는 없어서 공립 보육원에 보내기로 하였답니다. 절차를 밟고 있는 중이었대요...”

?....또 백색장막의 안개가 마을을 감싸 안았다. 스멀스멀 산자락을 타고 올라온 안개로 보건소가 검고도 하얗게 휩싸인 저녁. 현관의 초인종이 울렸다. 아기를 돌보느라 저녁 늦도록 근무하던 간호사는 아기에게 우유를 주다가 초인종 소리에 현관문을 열었다. 그때 안개를 등지고 현관문에 우뚝 서 있는 여인. 길게 늘어진 검은 옷에 긴 검은 머리를 풀고 서 있는 여자. 아기엄마 유령이었다. 귀신을 본 간호사는 너무 놀라 그 자리에 기절하고 말았다. 그리고 아기는 사라지고 말았다. 영원히...?

“아기가 죽었다는 말인가요? 아니면 귀신이 데려갔다는 말이에요?”

“모릅니다... 없어졌어요.”

간호사는 새삼 무서움이 밀려오는 듯, 고개를 돌려 주위를 한번 둘러 보았다. 소름이 온몸에 돋아나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아이는 그 길로 없어지고 말았어요. 그 뒤 누구도 그 아이 소식은 몰라요...”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여기까지 말한 간호사의 표정은 이제까지 묻는 말에만 답변하던 사무적인 모습은 어디 가고, 천진스런 소녀의 눈망울로 소장에게 한 뼘 몸을 가까이 하였다. 그리고는 잘 들리지도 않는 소리로 숨을 죽이며 말을 이었다.

“그 뒤부터 이 마을에 유령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어요. 그 검은 엄마 귀신이요...”

“!?.........”

“마을에 어떤 아이가 심하게 아프면 그 유령이 보건소에 나타나는 거예요. 유령은 현관문에 가만히 서 있다 없어졌어요. 소장님들은 처음에는 기겁을 하고 놀랐지요. 하지만, 의사는 귀신을 안 믿는다면서 그 유령을 ㅉㅗㅈ아가다가 놓치곤 하였는데, 그럴 때마다 마을에 심한 환자가 있다는 것을 알았죠. 말하자면 크리스마스 유령이 의사에게 환자를 인도하는 것이었어요. 그 뒤부터는 소장님들도 유령을 믿기 시작했어요...”

“그러면 어제는? 어딘가 환자가 있다는 건가요? 내가 나갔을 때 나를 바라보다가 없어졌는데....”

“오, 참. 그러네요.”

문득 떠올랐다는 듯, 간호사는 부리나케 마을 여기저기에 수소문을 하였다. 아무 이상은 없었다.

“어제 소장님이 분명히 그 유령을 보았다면서요. 그 후 유언비어도 많고 여기저기 유령이 나타났다는 괴담이 많아서 다는 믿지 않고 있어요. 그 유령은 그동안 통 안 나타났었어요. 그런데 어제 나타났다니요... 정말 무서워요.”

사희문 소장은 어이가 없었다. 이런 황당한 이야기가 돌아다니고 있다니... 아무리 나병 환자들이 고립되어 살고 있는 마을이라 하지만 이런 괴담이 공공연히 돌아다니고, 보건소까지 그런 유령이 나타난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문득 전임소장의 말이 떠올랐다.

‘사람들의 고정관념이라는 것은 미신처럼 무서운 것이라오... 과학이 지배하는 시대에 미신이 지배하는 곳... 그리고 미신이, 미신이 아닌 마을. 바로 이곳이라오. 믿을 수 없겠지만... 아마 머지않아 몸소 겪게 될 것이오.’

의미심장하게 가슴에 파고들었다. 유령이 나타나 의사를 환자에게 인도한다는 저 믿을 수 없는 말 속에 마을 사람들의 보건소장에 대한 감정이 묻혀있다고 여겨졌다. 그들은 소장을 불신하고 있는 것 아닌가. 사 소장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전임소장의 말이 상기되었다.

“그 고정관념 말이요. 서로가 서로를 무서워하는 그 고정관념이 정말 무섭소. 미신처럼...”

사 소장은 혼자서 마을을 면밀히 살펴보기로 마음먹었다. 이 수수께끼는 풀어야 한다. 미신은 없다. 어리석게도... 마을 사람들에 대해 경멸감과 어떤 혐오감과 동시에 호기심이 솟아났다.

마을을 돌아다녀 보았다. 아기엄마가 목매 죽었다는 오두막집은 몰골이 말이 아니었지만 그대로 있었다. 누구도 감히 그 오두막을 허물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귀신의 보복이 두려워서였다고 한다. 사 소장은 오두막집 안에 들어가 보았다.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지만, 방 구조는 간호사가 말한 대로였다. 작은 방이 있고, 건넌방이 있었다. 그리고 골방... 건넌방 벽에는 낡은 사진이 한 장 걸려 있었다. 검은 리본이 둘러진 사진이었다. 장례식에 썼던 사진을 없애지 않고 방에 걸어둔 모양이었다. 아기엄마 사진이었다. 마을사람들은 이곳에 아기엄마의 죽은 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고 있었다.

사진을 유심히 바라다보았다. 어쩐지 그날 밤에 찾아 온 유령과 닮아도 보였다.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리는 없지...귀신이라니... 사 소장은 얼른 오두막집을 나왔다. 공동묘지를 향했다. 묘지 한구석에 초라한 비석이 있는 묘가 눈에 띄었다.

‘아기엄마’

비석에는 간단히 이렇게만 쓰여 있었다. 죽은 아기엄마의 묘가 틀림없었다. 사 소장은 기이한 기분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었다. 밤이면 짙은 안개 속에서 문득 문득 나타난다는 크리스마스 유령, 장례식 사진, 묘지...

더러운 기분이었다.

8.

이튿날. 사 소장은 발걸음을 옮겨 마을의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잘 가꾸어진 중앙 정원과 숲속의 예배당과 마을사람들이 관리하는 돈사. 정원에는 두 개의 조각상이 서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진심으로 존경하고 기리는 두 인물이었다.

‘포사이드 선교사’와 ‘영부인’

사 소장은 조각상 아래에 새겨져 있는 글을 읽었다.

‘선교사로 이곳에 와서 한센병 환자들이 받는 고통과 냉대를 보고 스스로 몸을 던져 옷을 입혀주고 치료를 해주며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성인.’

포사이드 선교사를 마을 사람들은 신이자, 아버지로 마음속에 기리고 있었다. 바로 이 마을의 창시자였다. 그리고 이 마을의 이름이기도 했다.

‘포사이드 마을’

그는 그의 뼈를 이 마을에 묻었다. 그의 묘지는 정원 넘어 숲 속에 있다 했다. 사 소장은 숲 속을 향해 걸어갔다. 예배당과 수녀원이 보였다. 그 정문에는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수녀들은 마을사람들을 위해 간호와 요리, 옷을 짓는 봉사를 많이 하였지만, 늘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뒤에서 봉사하는 것을 철칙이자 미덕으로 삼고 있었다. 그리고 선교사들이 떠난 지금은 그런 봉사활동보다는 신앙적인 수도에 힘을 쓰고 있다고 간호사는 말했었다. 그녀들은 가능한 한 외부인사와의 접촉을 삼가고 있다고 했다. 포사이드 선교사의 묘지는 여러 선교사들의 묘지와 함께 수녀원 안에 있었다.

'W.H.포사이드'

사희문 소장은 그 이름을 익히 듣고 있었다. 포사이드라는 이름은, 그의 자손이 한국에서 선교뿐만 아니라, 한국인 고아들의 입양도 많이 해서, 포사이드 가문의 성을 가진 한국계 미국인이 많은 이유이기도 했다. 포사이드의 이런 활동은 지금은 포사이드 재단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정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사 소장은 닫혀진 수녀원의 문 앞에서 묘지를 향해 고개를 숙여 경의를 표하였다.

돼지를 키우는 돈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영부인은 이 마을에 돼지 두 마리를 보내면서 새끼를 낳으면 두 마리씩만 다른 나환자촌에 보내달라는 당부를 하였다고 했다. 경제적인 자립의 기초를 다져주었을 뿐만 아니라 진심으로 이들의 손과 등을 어루만지며 사랑을 베풀었다고 마을사람들은 조각을 만들어 어머니같이 기리고 있었다.

마을의 여기저기를 조용히 다니는 소장을 보고 마을 사람들은 처음보다는 눈빛이 부드러워졌지만, 그들의 몽당손을 내밀지는 않았다. 마음을 열지는 않았다는 증거였다.

편견과 고정관념이 만들어내는 믿음이라는 것... 전임 소장은 신앙과 미신은 똑같은 믿음에서 출발하는 것이라 했다. 미신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신념이 되고, 또 깊은 신앙이 되기도 한다. 이 마을사람들에게는 믿음이 깊은 것 같았다. 신만이 자신들을 구할 수 있으며, 자신을 구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신이라는 믿음이었다. 전임소장은 말했었다.

“그들은 심리적으로 수치와 공포감에 사로잡혀 있고, 동시에 일종의 죄의식을 갖고 있는 것 같소이다. 인류역사가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기피당하고 멸시당한데서 나온 천벌의식이라는 것이겠지. 스스로 목숨을 끊고자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겠소. 사람들은 동정심마저 표하지를 않았지. 오죽했으면 성경에서도 부정한 사람이라 하여 사람들에게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하고, 스스로 ‘부정하다. 부정하다.’하고 소리를 질러 자신의 위치를 알려주어야 한다고 했겠소. 그 당시야 약이 없어 그랬다 하더라도, 지금은 그저 피부병에 불과한 것임에도 그런 의식이 남아 있는 것은 뭐겠소? 그런 고정관념이 바로 미신 아니겠소?”

미신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어느 한쪽만이 아니었다. 아직도 유령이니, 귀신이니 하며 믿고 있는 마을사람이나, 과학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입증을 해도 마을에서 생산되는 돼지나 농산물마저 기피하는 외부사람이나, 미신에 사로잡혀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자신이 본 그 밤중의 유령은? 미국의 의대 동기생들은 이런 말을 들으면 얼마나 자신을 비웃을까? 세계 최고의 엘리트 의대생이...

‘유령은 없다...’

사 소장은 여러 가지 가설을 세워 보았다. 30년 전 보건소장의 말도 신빙성을 따져보아야 한다. 정말로 유령이 나타나서 소장을 안내하였을까? 혹시...? 그 아이가 소장의 아기는 아니었을까? 마을 여인과의 불륜의 관계에서 생긴? 그리고 여자가 자살하자, 그런 식으로 말을 만들고 아기를 빼돌린 것은 아닐까?

아니면 유령노름에 동참한 마을사람들이 소장을 겁주거나 길들이기 위해 가끔 그런 유령극을 벌인 것은 아닐까? 더욱이 새로운 소장이 오면....? 사 소장은 간호사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저 키에 저 체격... 보건소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이 검은 옷을 입고 안개 낀 날 머리를 풀고 밤에 초인종을 누르고 홀연히 소장 앞에 나타난다면? 그리고 두려워하는 소장에게 이튿날 크리스마스 유령이야기를 한다면? 무슨 효과를 누릴 수 있을까...?

9.

주말에 사 소장은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않고 전임소장을 찾아갔다. 유령 건에 대해 객관적인 사실을 확인해 보고 싶었다. 전임소장은 한마디로 얼굴을 무너뜨리며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걸 믿소? 마을사람들의 장난이요. 소장 길들이기 하는 것이지. 유령이야기는 나도 들었소. 그러나 나 있을 적에는 그 유령이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소. 내가 워낙 강고해 보여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그 사람들, 사실은 새로 보건소장이 오면 다루기를 해요. 일부러 냉랭하게 외면을 해요. 자기들을 무시하지 말라는 메시지일거요. 이해가 되지 않소? 워낙 오랜 세월을 그렇게 소외당한 콤플렉스가 있으니. 이 마을에 유령이 있으니 우리에게 함부로 하지 말라는 경고일거요.”

그는 유령이야기를 가볍게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이 근무하는 동안에는 그런 일이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이 그 증거라 했다.

“예수가 열 명의 나환자를 고쳐주었으나, 단 한 명만이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지 않소? 그들의 그런 복잡한 콤플렉스를 우리가 다 이해하기는 어렵더이다.”

사 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과학자들의 생각은 비슷한 것 같았다. 그러나 어딘지 석연치는 않았다. 무엇보다도 자신을 길들이기 위한 마을사람들의 고의적 장난이라는 동기가 납득이 되지 않았다. 사 소장은 은밀히 자료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간호사에게 시킬 일이 아니었다. 30여 년 전 소장의 거취를 조사하기로 했다. 시간은 결렸지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역대 소장들의 이름으로 의사협회 조회를 통해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어느 날, 사 소장은 보건소를 나왔다. 간호사에게는 비밀로 했다. 유령에게 이끌려 갓난아기가 앓던 오두막집에 갔었다는 보건소장을 찾아냈던 것이다. 한적한 지방의 어느 요양원. 그 소장은 이미 80줄에 들어서서 휠체어에 몸을 의지하고 있는 노인이 되어 있었다. 영문을 몰라 하던 노인은 사희문 소장이 자기소개를 하자, 입가에 미소를 띠며 반가워했다.

“고생이 많지...보람도 있지만...”

사 소장은 여러 안부를 전하고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선배님. 보건소장으로 재직하실 때, 혹시 아기엄마 유령을 만난 적이 있습니까?”

휠체어에 앉아 눈을 가늘게 뜨고 있던 소장은 눈빛을 반짝였다.

“왜? 그 아이를 찾았나?...”

그의 얼굴에 비상한 관심이 나타났다.

“..........?!”

사 소장은 순간 당황스러웠다.

“아닙니다. 그게 아니고.... 정말로 유령이 나타났습니까?”

노인은 눈을 가늘게 뜨고 무엇인지 종잡을 수가 없다는 표정으로,

“그렇다네...믿을 수가 없었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나...”

하면서 휠체어에 기댔던 몸을 일으켜 세울 정도로 큰 반응을 보였다.

“나도 몇 번을 검시했어. 어떻게 사흘 전에 죽은 시체가 나타날 수 있는가. 그런데 틀림없었어. 사흘, 분명히 그 이전이었다네. 죽은 게... 그리고 그 여자였어. 내가 장례식 때 사진을 보았던... 믿어지지 않는다네. 지금도...”

사 소장의 온몸에 전율이 타고 흘렀다. 팔에 소름이 돋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런데 갓난아이를 놔두고 왜 엄마가 자살을 했을까요? 모성애로 볼 때 그럴 수는 없지 않겠어요?”

“그렇지... 그런데 몰랐나? 그 엄마가 나병에 감염되었다는 걸? 내가 소견서에서도 적어놓았네만... 나병 감염에서 아기를 구하기 위해 스스로 죽은 것이 아닐까 추측했었네.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지. 그때는... 아기의 나병감염을 막기 위해 자기 생명을 버린 것이야. 나는 그것을 모성애로 보았네... 그렇게 생각하니 그 엄마가 너무도 가련했어...”

“그런데 유령이 어떻게 아기를 데려 갔을까요? 그건 아무래도...”

노인은 사 소장을 힐끗 쳐다보았다.

“왜, 과학적으로 설명이 안되어서? 이미 유령이 나타났었는데도? 그런 소리 말게...그 유령은 그 뒤에도 우리 보건소에 몇 번이나 나타났어. 환자가 있을 때마다... 처음에는 무서웠지만 나중에는 무섭지 않았네... 유령은 분명이 있다네... 나는 지금도 꿈을 꾸면 그 아기엄마 유령이 보여...나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해... 세상은 자네가 생각하는 것이 다가 아니야. 미신이라고 말하는데 나도 무엇이 미신인지 모르겠네. 사실은 사실이니까...”

“..........”

더 이상 추궁이 필요 없었다. 그의 눈빛은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오히려 점점 더 미궁에 빠지는 것 같았다.

10.

하릴없이 보건소로 돌아온 사 소장은 망연해졌다. 해결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그걸 인정해야 하는 판국이었다. 유령이 횡행하는 마을. 그것을 믿고 있는 마을... 그런 상황을 어쩌지 못하고 끌려만 다녀야 하는 자신... 아무래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미신이, 미신이 아닌 마을... 미신이 지배하는 마을이란 이런 것을 두고 한 말이었던 것 같았다. 그는 마을사람들과 어떤 거리감이 느껴졌다. 나하고는 다른 무엇이 그들에게는 있었다.

다음 날, 사 소장은 숲속의 작은 예배당을 찾아갔다. 사제 한 분이 사 소장을 맞아 주었다. 정중히 인사를 나눈 뒤,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면서 소장은 사제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크리스마스 유령 이야기 들어보셨습니까?”

사제는 소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사 소장은 어이가 없었다.

“믿어지십니까? 이 마을에 그 유령이 있다는 것이?”

사제는 또렷하게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사실입니다. 크리스마스 유령이 있지요.”

사 소장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성직자의 양심을 걸고 말을 하는 사제에게조차 귀신의 존재가 인정받고 있다는데서 사 소장은 진한 실망이 느껴졌다. 동시에 그의 내면에서 또 하나의 감정이 고개를 들었다. 분노였다.

‘귀신이라면 하느님의 존재는 무엇인가? 그런 일에 의문을 품지 않고 규명조차 하려 하지 않는 이 사람들은 과연 누구인가? 이곳에 과연 내가 필요한가? 의사를 좌지우지하는 귀신이 있다면 무당이 있어야지, 의사가 있어야 할 곳인가?’

보건소로 돌아온 그는 깊은 회의에 빠졌다. 유령의 존재를 규명할 것인가 아니면 인정할 것인가? 이 문제는 심각하게 다가왔다. 공존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으로 생각되었다. 마을사람들은 성의를 갖고 대해도 여전히 냉랭하기만 했다. 소장보다는 간호사에게 약을 타가고, 자기들의 보기 싫은 피부와 몸을 보여주기를 꺼려했다. 불신 받는 의사보다 불행한 의사는 없으리라...

저들은 신이 아니면 자기들을 구원할 수 없으리라고 믿고 있다. 그러니 귀신도 믿고 있는 것이다. 병은 병일 따름이다. 의학적으로 희귀나균이든 다균나균이든 치료면 낫는 병임에도 병을 신과 자신의 죄와 연관시켜 생각하고 있다. 그러니 미신이다. 왜 의사를 신뢰하지 못하고 스스로 고립되어 어두운 골방 속으로 들어가려고만 할까? 왜 보건소에 마음을 열고 들어오지를 못할까?

그는 그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세상에 들어 온 것 같았다. 마을이 싫어졌다. 손을 내밀어도 손을 잡지 않는 그들이 마음에서 멀어져 갔다. 처음부터 오고 싶어서 온 곳도 아니었다. 사회봉사단체인 후원재단의 권유에 따라 왔을 따름이었다. 여기서 내가 무엇을 느껴야 하며,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이 소외되고 이상하게 기괴한 마을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 역대 보건소장들이 왜 이 마을을 기피하며 하루 빨리 떠나고 싶어 했는지 이제야 그 심정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밤이면 신경이 곤두 세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다. 꿈에 귀신에게 ㅉㅗㅈ기는 꿈에 땀이 흠뻑 젖어 잠을 깬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럴 때면 천식기침이 더욱 기승을 부려 몸을 괴롭혔다.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열정도, 처음 느꼈던 마을 사람들에 대한 연민도 서서히 식어갔다. 또 다시 외로웠다.

11.

사희문 소장은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국방부에 전출 신청을 내고자 결심하였다. 이곳을 떠나고자 마음먹었다. 사실 사희문은 통합병원이나 기타 상급부대 병원에 희망만 한다면 얼마든지 받아줄만한 프로필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전출에 앞서 미국에 있는 그의 후원재단 담당자에게 이런 사정을 소상하게 편지로 알리기로 했다. 재단에서 그토록 권했던 요청을 무시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사정을 알면 재단도 이해하리라 믿었다. 그의 편지에 대한 답장이 재단으로부터 얼마 후에 도착했다. 내용은 짧았다.

“그 곳의 포사이드를 만나 보시오.”

포사이드? 돌아가신 선교사? 그의 묘지?

그는 숲 속의 작은 예배당을 다시 방문했다. 사 소장은 그를 맞아주는 사제에게,

“혹시 이곳에 포사이드씨라고 계십니까?”

라고 물었다. 사제는,

“포사이드씨요? 제가 포사이드입니다만. 이곳의 사제와 수녀들은 모두 포사이드라는 성을 씁니다만... 그 분을 기리기 위해서요...”

사 소장은 재단에서 온 편지를 꺼내 보였다. 사제는 짧은 편지를 읽고서는,

“저를 만나라는 뜻이 아닌 것 같습니다. 혹시 이곳의 창립자인 포사이드에 대해서 아십니까?”

하고 물었다.

“잘 모릅니다만, 초창기 선교사님 아니십니까?”

사제는 빙그레 웃었다. 그는 포사이드에 대하여 설명을 하기 시작하였다.

“포사이드씨는 의사였습니다....”

?...100년 전. 한국에 의료선교를 하고 있던 닥터 포사이드는 동료 선교사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급히 조랑말을 타고 길을 떠났다. 조랑말을 타고 오던 중 그는 길가에 쓰러져 있는 한 여인을 발견하였다. 손과 발은 짓물렀고 퉁퉁 부어 있었다. 온통 상처투성이였고, 걸친 누더기 옷은 피고름으로 얼룩져 있었다. 나병 환자였다. 닥터 포사이드는 말에서 내렸다. 피고름을 흘리고 있는 그 여인을 감싸 안아 자신의 말에 태웠다. 자신은 말고삐를 잡았다. 그리고 도착지에 이르자 조랑말에서 나병 환자 여인을 두 손으로 감싸 안아 내렸다. 그는 여인을 치료할 거처를 찾다가 옹기 가마터를 발견하고 그곳에 여인을 누이고 선교사들이 쓰던 침구와 옷가지를 챙겨 그녀를 간호하였다. 그 사이 위독했던 동료 선교사는 죽고 말았다. 닥터 포사이드가 길가에 쓰러져 있던 나병 환자 여인을 안고 치료한 이야기는 삽시간에 인근에 퍼져나갔다. 나병 환자들이 하나 둘씩 그에게 모여들기 시작했다. 선교사들과 뜻있는 사람들이 닥터 포사이드의 헌신적인 행동에 감명을 받았다. 그들은 병원 건립을 추진하여 나환자 병원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 후 나환자를 돌보고자 헌신하는 사람들이 속속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들만의 마을을 만들어 그들을 보살피기 시작하였다. 이 곳 포사이드 마을이었다. 닥터 포사이드는 나환자들을 돌보다가 자신도 병을 얻어 죽게 되었다....?

“이 분이 바로 그 닥터 포사이드입니까?”

소장은 비석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오. 그렇게 자세히는 몰랐었다. 그 분이 의사였구나. 그래서 포사이드 재단이 한국인 입양아에게 그토록 큰 관심을 가지고, 의학을 공부하는 자신에게도 그런 후원을 했었구나...

처음 듣는 이야기에 감회가 깊어지고 가슴이 뭉클하였다. 그렇지만, 재단이 포사이드를 만나라는 것은 누구를 만나라는 것인지 여전히 알 수가 없었다. 혹시 재단은 이런 헌신의 봉사를 나에게 요구하고 있다는 것인가? 마음을 열어주지 않는 저들에게 피고름이라도 빨아 주라는 말인가? 이곳에서 헌신하고 저들을 위해 생명이라도 바치라는 말인가?

사 소장은 고개를 조그맣게 흔들었다. 포사이드 선교사가 걸었던 길은 숭고하지만, 자신의 봉사는 그렇게까지는 못할 것 같았다. 아직 할 일과, 해야 할 공부가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아직은.. 아직은...아니었다. 마음속에서 가책이 느껴졌지만, 이 마을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움직여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 마을에 남아 있으면 닥터 포사이드 같은 헌신적인 봉사를 못하는 죄책감이 무거운 족쇄가 될 것만 같았다. 떠나자!... 봉사의 길은 이 길 말고도 많이 있을 것이다. 사희문 소장은 마을을 떠나기 위해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갔다. 국방부에 전출 신청을 제출했다. 이제 새해가 오면 새로운 부임지로 발령이 날 듯 싶었다. 심신이 피곤하였다.

12.

현관의 초인종 소리를 못 들었던 것은 그 탓이었다. 잠결에 터져 나오는 기침이 멎지 않았다. 쿨룩 쿨룩 쿨룩... 계속해서 나오는 천식기침에 허리가 아팠다. 사 소장은 잠이 깨었다. 한파가 온다더니..., 기온이 내려갔는지 실내 온도가 으스스했다. 기침약을 꺼내기 위해 침대에서 일어섰다. 그때. 침대 맡에 서 있는 저 여인.... 검은 그림자를 벽에 드리우고서, 검은 옷에 검은 머리를 풀고 우뚝 서서 자신을 내려 보고 있는 저 여인. ‘으아악....’

비명을 질렀다. 그 유령이었다. 크리스마스 유령이었다. 비명소리에 기침소리가 섞여 내질러지는 소리에 스스로 공포가 더해져 정신이 아득해졌다.

“누구, 누구요...” 전등 스위치를 켜고자 하였으나, 떨리는 손은 움직여지지 않았다. 허둥대며, 손을 내저으며, 기침과 함께 터져 나오는 비명소리를 참고 있는 사 소장을 유령은 미동도 하지 않고 지켜만 보고 있었다. 움직임이 없던 유령이 소리 없이 손을 들어 가리켰다. 유령은 서서히 몸을 움직여 방문을 향했다. 따라오라는 것임을 영혼이 말해주고 있었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거역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죽은 자의 명령처럼 받아들여졌다. 창문의 커튼들이 미친 듯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몽유병자같이 유령을 따랐다. 현관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현관문을 잠갔는지, 안 잠갔는지 어떤 기억도 나지 않았다.

크리스마스 유령은 검은 바람처럼 앞장섰다. 짙은 안개 속에서 희미하게 보일 듯 말 듯 앞서가는 유령을 따라가며 두려움과 함께 믿어지지 않는 의구심에 스스로의 행동조차 가늠이 되지 않았다. 어둡고 하얗게 막힌 길을 터널처럼 뚫고 얼마나 걸었을까. 안개 속에 집이 한 채 나타났다. 사 소장은 흠칫 놀랐다.

오두막집이었다. 크리스마스 유령이 죽어 있었다던 그 집. 그는 마치 30여 년 전 소장이 그러했던 것처럼, 유령을 뒤따라 방에 들어섰다. 아기가 앓아 누워있던 건넌방이었다. 호롱불이 붉고 가늘게 여린 불빛을 내며 타고 있었다. 모서리 진 어두운 벽에 유령의 그림자가 길고 검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 기괴함이 심장을 차디차게 얼어붙게 만들었다. 손으로 터져 나오는 기침을 참으며 입을 막고 서 있는 사희문에게, 벽을 등지고 멈추어 서 있는 유령과 유령의 머리위 벽에 붙어있는 사진이 동시에 눈에 들어왔다.그 때 보인 유령의 얼굴... 사진 속 아기엄마의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사 소장은 두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이때, 음산하고도 조용한 유령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옥의 동굴에서 나오는 듯 한 목소리였다.

“시몬, 시몬...” 유령이 주문처럼 누군가를 불렀다. 사희문의 목구멍이 솜뭉치에 막혀있는듯 했다.

“시몬,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

“..........”

덜덜 떨고 있는 사 소장에게 그 다음 들리는 말은 지옥에서 죄의 심판이라도 내리듯 조용히 그러나 차갑게 울려 나왔다.

“바로 네 엄마다.”

13.

사희문은 고개를 숙이고, 두 손과 두 무릎을 바닥에 꿇고 유령이 차분하고 무겁게 들려주는 이야기를 최후의 선고를 듣듯 들었다. 그 놀라운 이야기를...

?....33년 전, 한 여인이 갓난아기를 안고 이 마을에 들어왔다. 나병에 걸린 여인이 갈 곳은 이 마을밖에 없었다. 한적한 작은 오두막집에 거처를 정했지만, 살 길은 막막했다. 아기를 기르며 병을 치료해야 하는 여인에게 가장 절망적인 것은 이 무서운 병이 아기에게 감염되는 것이었다. 보건소에 찾아가 아이를 맡아달라고 사정을 하였지만, 보건소는 냉정하기만 했다. 그런 사정은 마을사람 누구나 겪는 고난이었고, 아무도 해결해주지 못하는 어려움이었다.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신과 이외에는 없었다. 그리고 또 하나 마음과 피가 따뜻한 가족 이외에는.... 상처에서 흐르는 피와 고름을 씻으며, 병에 감염되지 않게 아기는 건넌방에, 자신은 골방에서 잠을 잤다. 죽음을 결심해도 아이를 두고 갈 수는 없었다. 이때 신이 나타났다. 가족이었다. 아기엄마의 쌍둥이 언니였다. 언니는 이 마을의 수녀가 되었다. 동생과 아기를 돌보기 위해서였다. 포사이드 수녀가 되었다. 포사이드 수녀는 고통 받는 마을사람들과 동생과 아기를 헌신적으로 보살펴 주었다. 아기엄마에게 희망이란 막막했다. 언니만을 의지하며 아기를 키웠지만 희망에도 끝이 있었다. 아기엄마는 희망의 끈을 언니에게 맡기고, 자신은 절망의 끈으로 목을 매었다. 크리스마스 전날이었다.

엄마를 잃은 아기는 굶주림과 심한 열병과 지독한 폐의 염증으로 목숨이 위태롭게 되었다. 그렇게 앓는 아기를 발견한 언니는 보건소로 달려갔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검은 수녀복을 입은 채, 두건이 벗겨져 머리가 풀어지는 것도 몰랐다. 간신히 아기의 생명을 구하였다. 그 후 아기가 어딘가의 보육원으로 옮겨진다는 말을 들은 언니는 아기를 그렇게 보낼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밤중에 보건소를 찾아갔다. 자신을 보고 기절한 간호사를 뒤고 하고, 포사이드 수녀는 아기를 수녀원으로 데려왔다. 수녀는 포사이드 선교사 재단의 후원을 받아 아기를 미국으로 입양시켰다. 이름을 시몬(simon)이라 하였다. 포사이드 수녀들이 지어준 이름이었다. 포사이드 재단의 후원은 계속 이어졌다. 포사이드 마을 한 수녀의 간절한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포사이드 수녀는 마을의 어려운 환자가 있으면 밤중에 나타나 보건소에 알렸다. 사람들은 마을의 어려운 사정을 보건소에 알려주는 포사이드 수녀, 아니 아기의 쌍둥이 이모가 누군지 알지 못했다. 언니는, 아니 포사이드 수녀는 죽은 아기엄마의 유령이 되었다. 크리스마스 유령...

시몬이 이 마을의 보건소장으로 왔다는 소식은 수녀원에도 알려졌다. 언니는 시몬을 보고 싶었지만 그런 슬픈 과거를 알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입양부모의 행복한 아들로 남게 하고 싶었다. 시몬이 보고 싶은 어느 날 밤. 포사이드 수녀, 아기 이모는 조용히 보건소를 찾아갔다. 그리고 사희문 소장은 그 날 이 마을의 귀신, 크리스마스 유령을 눈앞에서 보았다....?

유령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시몬, 너는 이 마을 사람이었다. 엄마의 무덤이 있는 이 마을에서 살아난 이 마을 사람이었다. 시몬. 사이몬. 사희문...

떠나고 싶으냐? 이 마을이 유령의 마을이라 떠나고 싶으냐? 사람들이 너와 다른 사람이라 버리고 떠나고 싶으냐?”

그 말을 남긴 채, 크리스마스 유령은 홀연히 오두막집을 떠났다.

14.

사희문 소장은 어머니의 사진 앞에서 무릎을 꿇고 눈을 감았다. 한없이 눈물이 흘러 나왔다. 유령이란 애초부터 없었다. 유령이 있었던 그 검은 공백에는, 그리고 그 검은 옷자락 속에는 드러낼 수 없었던 비밀이 숨어 있을 뿐이었다. 바로 자신이었다. 아들을 위해 생명을 버린 어머니의 사랑이었다. 오로지 동萱?살리기 위해 몸을 던져 수녀가 된 언니의 비밀스러운 헌신이었다.

?.....시몬. 너의 기침이 어디에서 시작된 줄 알겠느냐? 너의 엄마가 죽는 날 너에게 걸린 폐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너를 본 날, 나는 네 기침소리에 네가 시몬이라는 걸 망설임 없이 알아보았다....?

사 소장은 자신의 이름이 왜 사희문인지 비로소 깨달았다. 크리스마스 유령이 왜 유령으로 살고, 그 유령을 사람들이 그렇게 강하게 믿고 싶어 하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사 소장은 미신이란 드러낼 수 없는 비밀임을 깨달았다. 사 소장의 감고 있던 눈에서 눈물이 다시 진하게 배어 나왔다.

마을 사람들에 대한 편견에 대해, 스스로의 고정관념에 대해, 스스로가 스스로만이 아니라는 걸 알지 못했던 스스로의 미신에 대해, 회한과 반성의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토록 당하였을 이 마을사람의 고통을 생각하면서, 어머니의 하루하루 피말랐던 아픔을 생각하면서, 스스로를 감추며 비밀스럽게 동생과 마을 사람들을 구해왔던 수녀이모의 끝없는 헌신을 생각하면서, 한없이 속죄의 눈물을 흘렸다. 포사이드 의사, 포사이드 선교사, 그리고 스스로의 성을 버리고 포사이드의 성을 따르며 희생을 한 모든 포사이드들을 향한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크리스마스 날. 사희문은 자신의 이름을 새로 고쳤다.

‘사이몬 포사이드’

포사이드 마을의 새로운 포사이드 의사로 태어난 것이다. 그는 포사이드 재단이 만나라고 했던 포사이드를 만났던 것이다. 크리스마스 유령, 포사이드 수녀를...

미노스 단편 작가 최민호.
■ 미노스 프로필

본명은 최민호, 대전 출신으로 제24회 행정고시에 합격하고 공직에 입문했습니다. 충청남도 행정부지사, 행정자치부 인사실장에 이어 소청심사위원장,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청장, 국무총리 비서실장 등 차관급 고위직을 세 자리나 거친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 입니다.

영국 왕립행정연수소(RIPA)를 수료하고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 행정학석사, 일본 도쿄대학 법학석사, 단국대학교 행정학 박사를 취득한뒤 미국 조지타운 대학에서 객원연구원을 역임했습니다.

공직 퇴임 후 고려대·공주대 객원교수, 배재대 석좌교수로 활동했으며 현재는 홍익대 초빙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퇴임 후, 어린 손녀들에게 들려줄 동화를 만들어 달라는 딸의 부탁에 따라 온 가족이 함께 읽을 수 있는 이야기를 지어 주다 “어른이 되었어도 너는 내 딸이니까(새움출판사)”라는 단편소설과 동화가 있는 이야기책을 출간, 동화작가로 데뷔했습니다. 뛰어난 상상력과 유려한 문체가 돋보여 공직자에서 문필가로의 변신에도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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