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서희 변호사(중앙대 첨단영상대학원 객원교수)
[데일리한국 전문가 칼럼=장서희 변호사] 최근 전 여자친구를 살해한 혐의로 구속된 피의자 김병찬의 신상이 공개되었다.

그는 지난 9일 법원으로부터 '100m 이내 접근 금지' '전화 연락 금지' 등의 잠정조치 결정을 통보받은 후 마트에서 흉기를 사서 피해자 주거지에 찾아가 경찰의 신변보호를 받던 피해자를 살해했다.

이 사건은 이제 막 시행된 스토킹처벌법이 피해자 보호와 범죄 예방에 있어 얼마나 유명무실한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이 사건의 피해자는 신변보호를 위해 경찰에서 지급한 스마트워치를 착용하고 있었지만, 피해자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지 못한 경찰이 현장에 늦게 도착하면서 끝내 사망을 막지 못했다. 피해자 가족들은 그럼에도 경찰이 매뉴얼대로 했다는 식의 반응을 보인다며 분노하고 있다.

경찰은 이 사건이 발생하고 나서 스마트워치의 한계점을 보완하고 스토킹범죄 대응을 강화한다는 대안을 내놨다. 태스크포스를 구성해 스토킹 전담 인력과 예산을 늘리고, 스토킹 범죄 매뉴얼을 개선하겠다는 것이다. 끔찍한 비극이 일어나고 나서야 현행 제도의 문제점을 자인한 것이다. 2021년 10월 21일 스토킹처벌법이 시행된 지 고작 한 달만이었다.

이처럼 스토킹처벌법상의 각종 조치가 동원되었지만 또 한 번의 스토킹 살인이라는 최악의 결과로 막을 내렸다. 경찰은 이러한 살인죄에 대해 특정범죄가중법상 보복살인 혐의를 적용하기로 했다. 피해자의 스토킹 신고에 대한 앙심을 품고 보복을 위해 살인을 저질렀다고 보아 특정범죄가중법상의 보복범죄로 의율하려는 것이다.

특정범죄가중법 제5조의9 제1항은 자기 또는 타인의 형사사건의 수사 또는 재판과 관련하여 고소·고발 등 수사단서의 제공, 진술, 증언 또는 자료제출에 대한 보복의 목적으로 형법 제250조 제1항의 죄(살인)를 범한 사람은 사형,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고소, 증언 등에 대한 보복으로 살인할 경우 보복범죄로 보아 가중처벌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보복범죄를 가중처벌하는 제도를 두고 있다 하더라도 스토킹 신고에 대한 보복범죄의 위험이 경감된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신고를 통해 보복범죄와 같은 더 큰 비극이 초래될까 하는 우려는 여전하다.

줄리아 로버츠가 출연한 1991년작 '적과의 동침'에서 여주인공 로라는 겉으로는 완벽해 보이지만 심각한 결벽증과 의처증이 있는 남편 마틴에게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당하고 폭력에 시달리면서 살아간다.

어느 날 로라는 남편과 요트를 타고 나갔다가 물에 빠져 실종되는데 남편은 물 공포증이 있던 로라가 익사한 것으로 생각하고 장례를 치른다. 그러나 실제 로라는 남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물 공포증을 이겨내고 수영을 배워서 목숨을 건 탈출을 시도한 것이었다.

남편으로부터 벗어나 숨어서 살아가던 로라에게 남편 마틴이 다시 나타난다. 그러나 로라는 이번에도 경찰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다. 로라는 그저 경찰에게 전화해 ‘침입자를 죽였다’라고 말한 뒤에 마틴을 향해 스스로 방아쇠를 당긴다.

이처럼 로라는 가정폭력에 시달리면서도 제도권의 도움을 구하지 않은 채 혼자 힘으로 목숨을 건 탈출을 감행한다. 다시금 남편에게 발각되어 결정적 위기에 처했을 때에도 로라는 직접 마틴을 상대한다. 그녀는 자신의 비극을 끝내기 위해 경찰을 찾지도, 경찰을 기다리지도 않는다. 그녀는 매번 왜 그런 선택을 해야 했을까?

허구의 이야기일 뿐이지만 이 영화는 법과 제도가 잔인무도한 악한들로부터 약자를 지키는 데 있어서 한계가 있다는 현실을 전제하고 있다. 이로부터 무려 30년이 지난 지금 우리나라의 법 제도는 과연 흉포한 악으로부터 약자를 제대로 보호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회의하지 않을 수 없는 요즘이다.

■ 장서희 변호사 서울대 소비자아동학부를 졸업한 뒤 중앙대 영화학과에서 학사와 중앙대 첨단영상대학원 석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법률사무소 이헌의 대표 변호사다. 영화를 전공한 법률가로, 저서로는 '필름 느와르 리더'와 '할리우드 독점전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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