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서희 변호사(중앙대 첨단영상대학원 객원교수)
[데일리한국 전문가 칼럼=장서희 변호사] 홍콩 영화 '무간도'는 각기 신분을 위장한 채 범죄조직과 경찰조직에 잠입한 경찰과 조직원의 운명적 교차를 그려낸다. 경찰이라는 사회적 지위가 보장하는 안온함을 포기한 채 지하세계에 오롯이 청춘을 바쳐야 했던 진영인(양조위)의 삶의 무게는 영화 전반을 무겁게 짓누른다.

진영인의 경찰 신분을 아는 유일한 인물이던 황 국장이 너무도 황망히 죽게 되면서 그의 유일한 바람이던 정상 세계로의 순조로운 복귀는 허락되지 않는다. 그렇게 사면초가에 놓였던 진영인은 끝내 경찰서로 복귀하지 못한 채 그저 삼합회의 일원으로 비참하고 허무한 죽음을 맞이한다.

그로부터 6개월 후 그의 경찰 신분이 밝혀짐에 따라 진영인은 그를 기억하는 극소수 사람들의 애도 속에서 경찰 묘지에 안장된다. 그럼으로써 긴 시간 명과 암, 합법과 위법의 경계를 오가며 고통받던 그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 자신의 진짜 지위를 온전히 확인 받게 된다.

영화 속 홍콩 경찰은 한 젊은이의 인생을 통째로 담보 삼아 대체 무엇을 얻으려고 한 것일까? 수차례 돌려 보더라도 이러한 의문이 주는 서늘한 느낌이 쉽게 지워지지 않는 영화다.

'무간도'뿐 아니라 다양한 영화에서 위장수사를 통해 범죄 세계를 그려내곤 하지만, 위장수사는 가상의 세계를 전제로 한 영화적 장치에 불과하다. 우리 현실에서 위장수사는 곧 위법수집 증거와 맞닿아 있어 위법수집증거 배제법칙에 저촉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형사소송법 제308조의2는 적법한 절차에 따르지 아니하고 수집한 증거는 증거로 할 수 없다는 형사소송의 원칙을 천명하고 있다. 이에 신분을 위장하는 잠입수사 등 기망을 이용한 수사 기법은 대개 위법한 수사로 보아 이를 통해서 수집된 증거는 위법수집증거로서 법정에서 아무런 효력도 발휘하지 못할 위험이 높다.

그러나 우리나라 최초로 위장수사를 정당화하는 법률이 새롭게 마련되면서 이전까지 불가능했던 새로운 유형의 수사가 앞으로 가능하게 됐다. 지난 9월 24일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시행됨에 따라 아동·청소년 대상 성범죄 수사를 위해 위장수사가 합법화된 것이다.

개정법은 제25조의2부터 제25조의9를 신설하여 아동·청소년대상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신분비공개수사 및 신분위장수사를 허용하는 수사 특례 규정을 마련했다. 지난 해 국민적인 분노와 경악을 불러일으킨 ‘n번방’ 사건 등이 이러한 위장수사 법제화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법 제25조의2 제2항은 디지털 성범죄를 계획 또는 실행하고 있거나 실행하였다고 의심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고, 다른 방법으로는 그 범죄의 실행을 저지하거나 범인의 체포 또는 증거의 수집이 어려운 경우에 한정하여 신분위장수사를 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를 위해 신분을 위장하기 위한 문서, 도화 및 전자기록 등의 작성, 변경 또는 행사가 가능해졌다.

예를 들어 ‘박사방’ 같이 신분증 등을 요구한 뒤 신원이 확인된 사람만 성착취물에 접근할 권한을 줬던 범죄 유형의 경우 앞으로는 경찰이 학생증 등 가상의 신분증을 이용해 해당 범죄에 접근하여 수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개정법은 이러한 신분위장수사로 인해 인권침해가 발생할 우려와 관련해서 수사 전에 법원의 허가를 받도록 하는 절차도 함께 규정하고 있다.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와의 싸움을 위해 우리 법은 신분비공개수사를 넘어 신분위장수사까지 정당화하는 전례 없는 결단을 내렸다. 성범죄 척결을 앞당길 수 있는 새로운 법률적 근거가 마련된 만큼 그에 상응하여 적극적인 수사와 대응이 이루어짐으로써 아동·청소년을 성범죄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는 전기가 마련되기를 바란다.

■ 장서희 변호사 서울대 소비자아동학부를 졸업한 뒤 중앙대 영화학과에서 학사와 중앙대 첨단영상대학원 석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법률사무소 이헌의 대표 변호사다. 영화를 전공한 법률가로, 저서로는 '필름 느와르 리더'와 '할리우드 독점전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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