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서희 변호사(중앙대 첨단영상대학원 객원교수)
[데일리한국 전문가칼럼=장서희 변호사] 얼마 전 국내 굴지의 IT기업 네이버의 한 직원이 메모를 남긴 채 숨졌다. 사인은 고인의 극단적 선택으로 알려졌다.

해당 기업의 노조가 발표한 입장문에 따르면 그러한 비극의 주요 배경은 과도한 업무 스트레스와 위계에 의한 괴롭힘인 것으로 파악된다. 회사에서는 가해자로 지목된 모 임원 등에 대한 직무정지 조치가 이루어졌다.

노조가 언급한 ‘위계에 의한 괴롭힘’이란 근로기준법에서 금지하는 직장 내 괴롭힘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근로기준법 제76조의2는 사용자 또는 근로자는 직장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 등의 우위를 이용하여 업무상 적정범위를 넘어 다른 근로자에게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를 ‘직장 내 괴롭힘’이라고 규정하면서 이를 금지하고 있다.

이러한 직장 내 괴롭힘 금지 규정이 도입된 것은 이미 2019년 1월의 일이나, 이번의 비극적 사건이 말해주듯 법은 직장 내 괴롭힘에 노출된 피해자들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근로기준법에서는 직장 내 괴롭힘이 확인된다 하더라도 그 가해자에게 불이익을 주는 조항을 전혀 두고 있지 않다. 심지어 사측이 가해자에 대한 징계는커녕 가해자를 비호하는 데 급급하더라도 그 어떠한 제재도 받지 않는다. 유일하게 처벌이 가능한 경우는 사측이 직장 내 괴롭힘을 신고한 피해자를 그 신고를 이유로 인사상의 불이익을 줬을 경우인데, 이 역시 실효성은 없어 보인다.

예컨대 피해자가 비정규직일 경우 괘씸죄로 해고해버린다 하더라도 사측에서는 직장 내 괴롭힘 피해 신고가 아니라 계약 만료를 이유로 해고한 것이라고 변명하면 그만인 식이다.

마이클 더글라스가 주연한 영화 ‘폭로’에서는 마이클 더글라스가 상사로 부임한 데미 무어에게 성희롱을 당했음에도 오히려 성폭력 가해자로 누명을 쓰는 상황이 벌어진다. 남성이 성범죄의 피해자가 된다는 인식이 낯설었던 탓에 진실을 밝히는 데 어려움을 겪던 마이클 더글라스는 ’성희롱은 권력에 관한 것’이라고 절규한다. 이 영화는 직장 내 괴롭힘과 성범죄를 결합해 다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직장 내 괴롭힘과 권력형 성범죄는 유사한 부분이 많다. 권력을 수단으로 한다는 점, 증거 확보가 어렵다는 점, 피해자가 오히려 불이익을 당하기 쉽다는 점 등이 그렇다. 특히 가해자는 ‘그럴 만한 사람이 아니다’라며 비호되는 반면 피해자가 오히려 이상한 사람으로 매도되는 2차 피해까지 당하기도 한다. 이러한 이유들로 그 어떠한 범죄보다 폭로가 어렵다는 점 또한 서로 유사하다.

이 사건 역시 끝내 세상에 폭로되기까지 귀중한 한 사람의 생명이 희생되었다. 그러한 선택이 있기까지 얼마나 큰 어려움과 고난의 시간이 있었을지 감히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그 고통의 시간 동안 허울뿐인 법률은 피해자에게 어떠한 도움도 주지 못한 것이다.

이와 같이 직장 내 괴롭힘과 관련해 우리 현실은 제대로 된 가해자 처벌이나 피해 구제는 고사하고 그 피해사실의 폭로조차 지극히 어려운 실정이다. 이러한 폭로의 어려움을 등에 업고 지금도 직장 내 괴롭힘 가해자들은 도처에서 유유히 활보하고 있을 것이다.

덧붙여 유념할 것은 직장 내 괴롭힘 가해자들이 반드시 악마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은 않다는 사실이다. 상식이 있는 평범한 인간으로 보이지만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교묘하게 피해자의 일거리를 빼앗고 내밀하게 그 인격을 말살하며 더할 수 없는 정신적 고통을 주는 경우도 적지 않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교훈은 직장 내 괴롭힘에서도 적용된다.

진심으로 고인의 명복을 빈다.

■ 장서희 변호사 서울대 소비자아동학부를 졸업한 뒤 중앙대 영화학과에서 학사와 중앙대 첨단영상대학원 석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법률사무소 이헌의 대표 변호사다. 영화를 전공한 법률가로, 저서로는 '필름 느와르 리더'와 '할리우드 독점전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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