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서희 변호사(중앙대 첨단영상대학원 객원교수)
[데일리한국 전문가칼럼=장서희 변호사] 지난 4월 28일 윤여정 배우가 미국 아카데미 오스카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인물이 중심이 되는 배우상에 있어서, 특히 인종의 벽이 높다고 평가되는 오스카에서 배우상을 수상한 것은 그야말로 세계 영화사에 길이 남을 쾌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공교롭게도 올해는 윤여정이 김기영 감독의 연출작 ‘화녀(1971)’의 주인공으로 스크린에 데뷔한 지 50년이 되는 해다. 윤여정은 주로 텔레비전 드라마를 중심으로 활동해 온 배우라고 볼 수 있지만 한국 영화사에 큰 족적을 남긴 김기영 감독의 '페르소나'로 불렸을 만큼 영화배우로서의 입지 또한 대단했다. 오스카상 수상 당시 윤여정은 자신을 영화계로 이끌었던 김기영 감독을 직접 언급하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영화 ‘화녀’는 김기영 감독이 연출한 1960년작 ‘하녀’의 변주라고 할 수 있다. 김기영 감독은 ‘하녀’를 만든 시점으로부터 11년이 흐른 뒤 자신의 작품을 직접 리메이크 했던 것이다.

윤여정은 ‘하녀’의 주인공 이은심이 맡은 하녀 역할에 대응하는 식모 명자역을 연기한다. 명자는 식모로 들어간 주인집의 가장 동식에 의해 강제로 임신을 하게 되는데 이를 알게 된 아내 정숙은 명자의 아이를 낙태하게 만든다. 이후 이성을 상실하다시피 한 명자와 정숙, 동식의 욕망과 갈등이 끝없이 뒤얽히면서 평온하고 안락한 가정을 꿈꾸던 각자의 운명은 전부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이처럼 내러티브나 스타일 양면에 있어서 영화 ‘화녀’ 역시 ‘하녀’ 이상의 강렬한 영화적 충격과 묘미를 선사하는 작품이다.

윤여정은 ‘화녀’가 발표된 다음 해인 1972년에도 김기영 감독의 작품 ‘충녀’에 연달아 출연했다. 당시 하녀 시리즈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소품인 쥐가 아예 쥐떼로 등장해 주연 여배우인 윤여정을 기겁하게 만들었다는 다소 충격적인 일화도 전해진다.

김기영의 이러한 하녀 시리즈에서 여주인공들을 사실상 실성하게끔 만든 것은 바로 타인(안주인)에 의한 낙태였다. 이는 형법상 비동의 낙태죄에 해당한다.

지난 2019년 헌법재판소에서 낙태죄에 대한 헌법불합치 결정이 내려진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한 가지 오해가 있을 수 있는 것은 당시 헌법에 불합치한다고 평가된 낙태죄의 범위는 임부의 자기결정에 따른 낙태에 한한다는 점이다. 즉 헌법재판소는 형법 제269조 제1항의 자기낙태죄와 제270조 제1항의 업무상 동의낙태죄 중 ‘의사’에 관한 부분만을 헌법에 합치되지 아니한다고 본 것이다. 이에 임산부의 동의 없이 강제로 낙태시키는 행위를 처벌하는 형법 제270조 제2항은 여전히 합헌이다.

이와 같은 헌법불합치 결정으로 형법의 낙태죄 일부 조항은 2020년 12월 31일부로 그 효력을 잃게 되었는데, 알다시피 국회는 여전히 낙태죄 조항을 개정하지 못한 채 입법 시한을 넘긴 상태이다. 낙태죄에 관한 불필요한 논란과 국민의 혼란을 더 이상 가중시키지 않으려면 헌법불합치 결정에 대응하는 조속한 개정 입법이 요구된다 하겠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 김기영의 문제작 하녀 시리즈는 이러한 형법상 비동의 낙태죄를 가장 중요한 모티브로 활용하고 있지만 적어도 낙태죄에 한해 본다면 법에는 전혀 구속되지 않는 세계관을 보여준다. 70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가장 아름다운 여배우인 윤여정의 오스카상 수상을 축하하는 의미에서라도 그녀의 김기영 시리즈를 만나보는 것은 결코 후회되지 않은 선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장서희 변호사 서울대 소비자아동학부를 졸업한 뒤 중앙대 영화학과에서 학사와 중앙대 첨단영상대학원 석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법률사무소 이헌의 대표 변호사다. 영화를 전공한 법률가로, 저서로는 '필름 느와르 리더'와 '할리우드 독점전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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