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부 안병용 기자

[데일리한국 안병용 기자] 평소 이어폰을 잘 끼지 않는다. 귀를 압박하는 느낌이 불편할 뿐 아니라 평소 사물에 대해 다양한 관찰을 즐기는 편이어서 굳이 주의력을 분산시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때는 유달리 이어폰을 착용하고 싶을 때가 있다. 25일 크리스마스가 바로 그런 날이었다. 결국 서랍 한구석에 고이 아껴둔 값비싼 이어폰을 꺼내들고 외출에 나섰다.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흥겨운 음악과 노래를 들으며 유유히 광화문 광장에 도착했다. 그런데 웬걸, 갑자기 성능 좋은 고급 이어폰이 전혀 힘을 쓰지 못했다. 광장을 둘러싼 엄청난 고음의 마이크에서 울려 나오는 캐롤송이 근처의 모든 소리를 압도한 탓이었다.

흥겨운 캐롤송에 잠시 귀를 귀울이는데, 갑자기 “문재인 구속하라”는 외침이 여기저기서 들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잠시 뒤 광장 전체가 “문재인 퇴진” 함성으로 뒤덮였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산타클로스 대신 이른바 ‘태극기부대’가 광장을 가득 메운 채 자신들만의 외침에 흠뻑 빠져있는 모양새였다.

직업정신이 무의식중에 발동됐다. 선글라스를 끼고 태극기를 흔들던 한 어르신께 "쉬는 날 왜 여기 계시는 이유"에 대해 넌지시 물었다. 한 분에게 질문을 했는데, 답변은 주변 어르신들로부터 동시다발적으로 돌아왔다. 아마도 질문하는 목소리가 다소 컸던 모양이다. “나라에 빨갱이들이 너무 많아”라는 드센 답부터 “문재인이 제대로 하는 게 없잖아”, “아유, 나라 꼬라지 좀 봐” 등 거친 말들이 순식간에 쏟아져내렸다.

그러다 고개를 갸웃하던 한 여성 어르신이 이번에는 거꾸로 질문을 던졌다. “자네는 뭐하는 사람인가?” 직업을 속일 이유는 없었다. “기자입니다” 답하는 순간, 주변에서 지켜보던 족히 네다섯 명은 돼 보이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모르는 이들에게 빙 둘러싸이니 괜한 두려움이 들기도 했지만, 짐짓 쳐다보기만 했다. 일부러 팔짱을 낀 채 속으로만 내뱉었다. ‘기자를 처음 봐서 그런가?’

원모양으로 기자를 둘러싼 이들은 “기사를 똑바로 쓰란 말이야!”, “기레기들이 제일 문제야, 시X 개X의 자식들”이라며 거친 육두문자를 고성과 함께 퍼부었다.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상황에 잠시 눈을 감았다.

취재 경험이 꽤나 있지만, 그 가운데 욕설이 뒤섞인 추억은 별로 없기에 우선 황당했다. 2016년 말 당시 박근혜 당시 대통령을 겨냥해 광화문 광장에서 열렸던 촛불집회의 취재 경험도 되새겨 봤지만, 그저 열심히 발품 팔며 고생한 기억뿐 욕설을 들어본 적은 없었다.

머릿속 전체가 멍해졌지만 할 말은 해야겠다는 생각에 “욕하지 마세요” 만류했더니 이번에는 삿대질을 시작했다. “삿대질 그만 두세요”라고 반발하니, 이젠 아예 어깨와 팔을 향해 신체 접촉을 가해왔다. 그 순간 손에 쥐고 있던 이어폰을 땅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러자 군복입은 한 어르신은 자신이 신고 있던 군화로 이어폰을 짓이겨 박살내버렸다. “아...” 무심결에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제야 인근에 있던 경찰 두 명이 현장으로 달려와 어르신들을 떼어 놓기 시작했다.

불쾌한 기색을 드러낸 것도 잠시, 기자가 뉴스의 보도 대상이 돼선 안 된다는 알량한 자존심에 광화문 광장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박살난 이어폰에 대해서는 아깝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고, 더욱이 물어내라고 할 생각 조차 들지 않았다.

이날 식사를 함께 했던 후배가 이같은 상황을 전해듣고 그들에 대해 “우매한 사람들”이라고 애써 위로해줬기 때문일까. 귀갓길 내내 그저 ‘정치적 목적으로 모인 집회에서의 민간인 군복 착용은 불법’이라는 법률에 따른 규정만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집에 돌아와 TV를 켜니 영화 채널에서 크리스마스를 대표하는 명작 ‘나홀로 집에’가 방영되고 있었다. 도둑에 맞서 기발한 장치로 범인(犯人)들을 통쾌하게 응징(?)하며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는 소년 해결사가 유달리 멋져 보였다. 영화주인공인 어린 소년에게 ‘방어의 귀재’라는 호칭을 붙여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나홀로집에’의 배경이 대한민국이었다면 주인공인 케빈은 어떻게 됐을까. 미국에 비해 한국은 상대적으로 개인 방어 규정이 약한 탓에 케빈이 도둑들과 함께 경찰서를 수도 없이 드나들어야하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이 머리를 스치자 씁쓸함이 가시지 않았다. 어르신들의 거친 공세에 내심 아무렇지도 않은 듯 팔짱을 끼고 무대응으로 일관한 것이 과연 ‘제대로 된 대처법'이었는지 케빈에게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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