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찬호 상명대 대학원장 "구성원들이 가진 지혜를 모으고 버무려야 국가나 사회 문제 해결 가능해"

집단지성은 편협한 집단사고의 틀 벗어나야… 인간의 '협력의 기술' 활용하면 많은 문제 풀 수있어

권찬호 상명대 공공인재학부 교수 겸 대학원장.

[전문가 칼럼=권찬호 상명대 공공인재학부 교수 겸 대학원장] 요즘처럼 국가는 물론 사회적으로 많은 난제들이 등장할 때 마다 새삼 '집단지성(collective intelligence)'을 떠올리게 된다. 집단지성이란 ‘집단의 문제해결 능력’으로 압축해 정의할 수 있다. 여러 사람의 역량이 합해지면 산술적인 합 이상의 엄청난 힘이 ‘창발(創發)'돼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다는 단순 논리는 역사 이래 꾸준히 힘을 발휘해왔다.

사람을 ‘사회적 동물’로 보는 관점이 옳다면 인류는 처음부터 집단지성의 기술에 기대어 생존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욱이 오늘날 인터넷시대에는 네트워크 연결수와 속도, 이에 따른 지식의 양이 비약적으로 증가하고 있어 집단지성을 발휘할 수 있는 여건도 한층 진전된 상태다. 21세기를 '집단지성의 시대'로 부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실제로 집단에 소속된 구성원들은 공사 영역을 불문하고 여러 분야에서 집단지성 시스템을 작동시키고 있고, 그 성과를 경험으로 공유하고 있다. 1989년 미국 알래스카 앞바다 청정지역에 유조선 발데즈호가 침몰해 4만톤의 원유가 유출된 사고를 떠올려보자. 당시 유관기관에서 선박침몰로 유출된 원유를 걷어내기 위해 무려 17년에 걸쳐 온갖 노력을 다했어도 해결하지 못한 최악의 사고였다. 이런 상황에서 집단지성 전문회사인 이노센티브(Innocentive)는 이 같은 사실을 다중에게 널리 알려 손쉬운 해결방안을 찾아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냈다.

한국의 경우에도 국가나 사회의 주요 의제들을 공론화 또는 공론조사 과정을 거쳐 해결한 사례가 벌써 15건이 넘는다. 공론화 방식이 모두 성공한 것은 아니지만 집단지성으로 해결하려는 시도 자체가 매우 바람직한 해결책의 하나라는 점은 확실히 입증된 셈이다. 모든 것을 아는 개인은 없지만 개개인이 조금씩 보유하고 있는 지식, 지혜, 경험과 추론을 합치다 보면 해법을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이 집단지성 이론의 핵심이다.

사회혁신의 대가인 멀건(J. Mulgun)은 집단지성이 세상을 바꾸고 있다고 공언하고 있다. 구글과 네이버에 저장된 지식들이 우리 사회에 기여하는 엄청난 효과, 위키피디아의 성공 사례, 수많은 공사기관에서 활성화되어 있는 크라우드소싱 제안제도, 지방자치단체에서 경쟁적으로 도입하고 있는 리빙랩(LivingLab)이나 커뮤니티맵핑(community mapping) 등 이루 헤아리기 힘들 정도다.

여기에 프로그램상의 문제를 미리 발견해 제거하는 버그 바운티(bug bounty), 병원의 여러 분야 의사들이 참여하는 통합진료, 경영분야나 정치행정 영역에서 사용하는 예측시장 시스템(prediction market system), 많은 데이터와 지식의 결합으로 만들어지는 인공지능(AI)의 발전 등 수많은 집단지성 시스템들이 사회 각 분야에서 미래사회를 이끄는 동력으로 자리매김한지 오래다.

집단지성의 정의.
그렇다면, 국가나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들도 집단지성으로 풀어낼 수 있지 않을까? 예컨대, 남북관계와 대북정책, 일본의 경제보복에 대한 대책, 사법개혁의 방향, 부동산 대책, 탈원전 문제, 최저임금의 결정 등을 둘러싼 거대 이슈들도 집단의 구성원들이 가진 지혜를 모으면 훨씬 좋은 해결방안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이들 문제들을 풀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이를 알기 위해 우선 집단지성의 작동 원리를 짚어보자.

집단지성이란 집단에 소속된 각 개인들이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의, 정확히 말하면 50% 이상의 지식이 있고, 상호 독립적으로 판단하며, 진지하게 참여할 경우에, 다수가 참여할수록 바른 답을 찾는다는 것이다. 이 원리를 이해한다면 집단지성의 힘을 신뢰하게 될 것이고, 더 나은 집단지성을 만드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계몽가정(enlightenment assumption)’이라 불리는 조건, 즉 각 개인들의 판단능력이 랜덤보다 높아야 한다는 것은 해결해야 할 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의 지식과 정보를 가지고 있다면 어렵지 않게 달성할 수 있다. 그런데 집단지성 운영자들은 이 조건을 당연시하며 간과하는 경우가 많다. 특정 문제에 대한 인식이나 경험이 없는 사람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하면 정확도가 떨어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집단지성의 원리를 처음 제시한 콩도르세(M. Condorcet)는 사람들이 전통, 편견, 감정 등 여러 이유로 50% 이하의 확률을 가질 수도 있다고 봤다. 이 경우에는 오히려 '집단 반(反)지성'이 나타나게 된다.

개인이 특정 문제에 대한 판단능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미디어 등을 통해 정보를 충분히 제공받아야 하고, 심의나 공론화와 같은 방법으로 지식수준을 높여야 한다. 집단의 의견취합 과정에서 이뤄지는 상호간 토론과 숙의는 개인의 능력향상에 도움이 된다. 콩도르세는 제도를 운영하는 사람들은 개인의 능력을 높이는 일을 우선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설파했다.

그러나, '다운스(A. Downs)의 관찰' 처럼 현대인들은 대개 자기 일을 하는 데도 바쁘기 때문에 구태여 많은 비용을 들여가면서 본인의 이해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 국가나 사회적 이슈의 구체적인 실체를 알려고 하지 않는다. 가까운 가족, 같이 생활하는 동료, 주변의 여론주도자나 언론의 의견을 따르면 그만이다. 하지만, 집단으로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우선 참여자 개개인이 그 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을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한편, 집단지성의 논리에 의하면 다수의 선택이 정답을 택할 확률은 각 개인의 능력이 우수할수록, 또 참여자 수가 많을수록 높다. 현실적으로는 집단의 규모를 무한정 크게 할 수는 없기 때문에 가능하면 판단 능력이 우수한 참여자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컨대, 집단지성 이론에 의하면 각 개인의 능력이 51%일 때는 1,000명이 참여하여야 74%의 정확도를 보이는 반면, 능력이 60%일 때는 50명만 참여해도 92%의 정확도를 나타낸다. 만일 구성원들에게 특정문제가 생소해 판단능력이 낮다면 참여자의 규모를 늘릴 필요가 있다는 의미다. 따라서 참여자의 수가 집단지성의 질을 결정하는 결정적 요소는 아니라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구성원의 수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구성원들의 다양성이다. 예컨대, 특정 행정대상 지역을 선택할 때 관련자 모두가 참여해 의논한다면 좋은 대안을 선택하게 될 가능성이 그만큼 높아질 것이다. 사람들의 특정 현상에 대한 판단능력은 쉽게 높아지는 것이 아니지만 다양한 경험과 추론 방식을 가진 사람들을 참여시키는 것은 상대적으로 훨씬 쉽다. 결국 집단지성의 가치를 결정하는 핵심 요건은 인지적 다양성을 가진 구성원들을 많이 참여시키는 것이다.

행위자의 능력과 다양성은 경합적이지는 않지만 현실에서는 가끔 상쇄적인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특정 지역, 학교, 세대, 계층 출신들로만 어떤 집단을 구성할 경우 그 집단의 개인능력은 높아질 수 있으나 다양성은 줄어들 것이다. 능력과 다양성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단연코 다양성을 선택해야 한다.

독립성 가정(independence assumption)이라고 불리는 상호 독립적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조건은 집단 구성원들이 다른 구성원들의 선택에 영향을 받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 조건이 지켜지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사례가 ‘집단사고(group think)’로 알려진 동조화 현상이다. 집단 구성원들이 집단 내 갈등의 최소화를 위해 이견 제시를 꺼리고 집단의 주류의견에 동참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많은 사람들이 집단지성을 집단사고와 동일시하고 있으나, 이 두 개념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집단사고는 집단의 참여자 수를 무의미하게 만들뿐 아니라, 창의성을 배제하고 독단에 빠지게 할 수 있으므로 매우 위험하다.

여러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하거나, 어떤 의견을 제시할 때 그럴만한 타당한 이유가 있어서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행동이나 생각을 따라하게 되는 현상인 ‘사회적 증거(social proof)’도 마찬가지이다.

집단지성의 요건인 독립성을 지키기 위한 방법으로 경쟁제도를 도입하거나, 익명성을 보장하는 방법들이 활용되고 있다. 어떤 방식이건 집단 참여자들에게 기회가 골고루 주어져야 한다. 내부 고발자, 공익 신고자나 제보자를 보호하는 것도 같은 취지다. ‘벌거벗은 임금님’이나, ‘임금님 귀는 당나기 귀’를 외치는 소년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얘기다. 백조가 모두 희지 않다는 증거를 쉽게 보여주기 위해 검은 백조(black swan)를 등장시켜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특히, 심의나 토론과정에서 주도자의 특정 의견으로 편향된 채 논의된다면 독립성이 훼손될 수도 있으므로 유의해야 한다. 분명한 것은 집단 내의 문제에 대해 심의나 숙의를 거쳐 개인의 능력을 높이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의견의 취합과정에서는 독립성이 보장돼야 한다는 점이다.

마지막 조건은 성실투표 가정(sincerity assumption)으로서, 진지하게 참여하거나 또는 투표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의사결정 과정에 거짓으로 왜곡된 의견을 표시하지 않고 구성원 개인이 가진 진심을 그대로 제시하는 것이다. 이 조건은 개인의 의지에 달려 있으므로 충족이 어렵지 않다.

그러나, 조직 속의 개인은 이 조건을 지키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 실제 우리 사회에는 각자의 생각이 아무리 달라도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행동방식이 제한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정당의 구성원인 경우에는 정강정책을 따라야 하고, 공공 또는 시민단체는 단체의 존립목적에 부합하는 방향을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찬성하거나, 반대하거나 또는 따르거나 따르지 않거나하는 양갈래의 선택지가 주어질 뿐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조직의 정책방향이 진지한 참여를 통해 제대로 설정된다면 문제해결이 쉬워질 수 있다. 또한 집단지성은 공적 관점을 강화시키므로 조직 전체의 대의를 존중하게 된다면 갈등을 줄여나갈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집단지성으로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첫째, 사회의 구성원들이 사회문제들에 대해 무관심하지 않고 어느 정도의 지식을 쌓아야 하고, 둘째, 의사결정 과정에서 가급적이면 다양한 영역에 있는 사람들이 참여해야 하며, 셋째, 집단의 논리에 빠지는 집단사고에서 벗어나 의사결정 과정에 성실하고 진지하게 참여해야 한다.

집단지성으로 사회문제의 해결이 어렵다면 바로 이들 조건을 충족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국가나 사회의 큰 이슈들은 구성원들 간 가치의 개념과 분배를 둘러싼 갈등이 있기 마련이다.

조직속의 개인들은 행동을 의도적으로 조정함으로써 더 나은 집합적 결과를 얻을 수 있다. 협력은 개체들의 노력을 집합체의 성과로 결합시키는 가장 기본적인 집단화(aggregation) 양식이다. 협력이 없으면 집단지성도 구현될 수 없다. 사회를 이끄는 지도자들은 위의 조건들을 하나씩 음미하면서 협력의 가능성과 요인들을 탐색할 필요가 있다.

인간은 다른 동물에 비해 '협력의 기술'을 고도로 발달시킨 존재이다. 인간이 만드는 제도는 협력의 체계이고 문화는 협력의 성과를 전승시키는 장치이다. 협력의 수준이 높아지기 위해서는 때로는 행위자들의 의도적 노력이나 조정이 필요하다. 협력의 기제는 제도, 관습, 사회적 규범 등을 들 수 있으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레비(P. Levy)는 집단지성에서 필요한 협력을 새로운 사회적 유대의 창출 가능성에서 찾았다. 특히 오늘날 인터넷 시대에는 그같은 유대가 쉽게 맺어진다는 점에 착안했다. 실제로 인터넷 시대에는 어느 누구도 정보나 지식을 독점할 수 없고, 이기심이 줄어들게 되며, 개인의 역량들이 시시각각으로 조정돼 협력의 가능성이 높아진다. 스미스(A. Smith)의 공감능력(sympathy), 루소(J. Rousseau)의 연민(pitie) 등이 작동한다는 뜻이다.

집단지성의 원리는 간단하지만 수학적으로 입증된 이론이어서 신뢰할 수 있다. 하지만 다수가 선택하기 때문에 믿을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집단지성은 다수가 모이기만 하면 저절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조건이 제대로 갖춰질 때만 생겨나는 잠재적 지성(potential intelligence)이기 때문이다. '다수결'의 경우, 다수라는 이유로 정치적 수용성을 높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보다는 오히려 다수가 선택하는 것이 진리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 임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집단지성의 본질은 바로 여기에 있다.

집단지성은 다수결이나 투표 뿐 아니라 상태 추정이나 미래예측에도 사용된다. 또한, 집단지성은 ‘판단문제’뿐 아니라 ‘선호문제’인 경우에도 적용될 수 있다. 내가 좋아하는 방안은 곧 선택되어야 하는 올바른 방안이라고 여겨진다는 의미다. 집단지성은 단순히 진영의 논리를 공고히 해주는 기제는 아니다. 오히려 집단지성은 협업을 통한 공존의 논리다.

집단지성의 원리는 프랭클린, 제퍼슨 등에 의해 자유민주주의를 천명한 미국헌법의 기초를 제공했고, 다수의 민의를 존중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의 근거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위대한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이처럼 지혜를 모은다면 집단지성이 사회와 국가의 장벽들을 무너뜨리고 보다 안전하고 평화로운 세상으로 이끌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가 가진 문제들 중에서 해결이 어렵고 갈등이 오래 지속되는 경우에는 집단지성의 원리와 결부해 해법을 찾는 것이 필요하다. 집단 속의 어느 누구도 전지전능할 수는 없다. 구성원들이 가진 지혜를 모으고 버무려야 비로소 문제 해결의 단초를 찾아낼 수 있다. 집단지성이 편협한 집단사고를 벗어나 국가나 사회의 문제해결에 촉매역할을 하면서 적극 활용되기를 기대한다.

■ 권찬호 상명대 교수(現 대학원장) 프로필 : 중앙대학교와 미국 노스웨스턴대학교를 졸업하고 독일 라이프치히대학교에서 수학했다. 오랜 공직생활을 거쳐 현재 상명대학교 공공인재학부교수 겸 대학원장으로 재직 중이다. 수년간 집단지성 연구에 몰두해 이 분야의 전문가로 알려져 있다. 최근 발간한 명저 집단지성의 이해(박영사, 2018)의 저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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