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태 법무법인 동민 대표 변호사 "차명사회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진정한 신뢰사회를 이룰 수 있다"

"삶이 힘겨운 중소상인이나 자영업자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역할을 하는 것도 법조인의 몫이다."

이건태 법무법인 동민 대표변호사
[데일리한국 전문가 칼럼 =이건태 법무법인 동민 대표 변호사] 살다보면 억울한 피해를 당했는데 구제받을 길이 없어 멍하니 하늘만 쳐다본 경험이 누구나 한번쯤은 있을 것이다. 명백한 피해자인데, 가해자는 보란듯이 활보하고 민·형사상 아무런 구제책도 마련되지 않아 피해자가 그야말로 피눈물이 나는 사례가 적지 않다고 본다. 법조인으로서 피해자에게 이런 저런 법리를 설명해 줄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게 피해자에게는 아무런 위안도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 불보듯 뻔하다.

요즘 중소기업과 자영업자 등 중소상인들이 너무 힘들고 어렵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정부가 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경제문제는 단기간내에 갑자기 호전되기 어렵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중소기업 사장이나 중소상인들을 만나 보면 외상 값이라도 제대로 받으면 좀 낫겠다고 하소연하는 분들이 많다.

예컨대 철물점 사장이 건축현장에 철 제품을 납품해 공사가 완공됐는데도 시공사가 공사대금을 받았음에도 외상값을 지불하지 않는 사례가 적지 않다고 한다. 하청회사가 인력과 자재를 대서 맡은 공사를 모두 마쳤고, 원청회사가 발주회사로부터 공사대금을 모두 받았음에도 하청대금을 주지 않는 사례도 있다고 한다. 철물 납품과 하청공사 가 이뤄져 공사대금을 받았음에도 정작 납품자에게는 아무런 댓가도 지불되지 않은 어이없는 상황이 불거진 셈이다.

소송을 하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 그 회사가 부도가 나서 오랜 소송끝에 승소한다고 해도 결국 남는 것은 종이조각 뿐이라는 엄연한 현실은 어떻게 할 것인가. 한 예로 사기죄로 고소해도 사기칠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식으로 조사 결과가 나온다면 고의 입증이 어려워 사실상 처벌이 어렵게 된다.

정말로 방법이 없을까? 원청회사가 발주자로부터 공사대금을 받고서도 하청회사에 하청대금을 주지 않을 경우에는 하도급거래공정화에관한법률에 의해 벌금에 처하도록 규정돼 있다. 하지만 공정거래위원장의 고발이 있어야 하고 처벌 수위가 벌금에 불과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 해법이 너무 느슨한데다 먼길을 더욱 돌아가는 답답함과 안타까움이 들 수 밖에 없다.

법원과 검찰은 부동산 이중매매를 배임죄로 처벌한다. 중도금까지 지급되면 매도인과 매수인 사이에 ‘신임관계’가 형성되는데 매도인이 다른 곳에 팔아치우면 매수인의 ‘신뢰를 저버리는 행위’가 되므로 처벌 받는 식이다. 대법원은 이처럼 부동산 이중매매를 처벌하는 이유를 부동산이 경제생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나 이를 목적으로 한 거래의 사회경제적 의미가 여전히 크기 때문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공사대금을 받으면 철물대금을 반드시 갚겠다고 굳게 약속해 놓고도 정작 공사대금을 받은 뒤에는 그 돈을 다른 곳에 써버리고 나몰라라 하는 경우도 ‘신임관계’와 ‘신뢰를 저버리는 행위’가 성립된다고 보는 게 옳지 않을까. 마찬가지로 하청업체가 인부와 자재를 대서 공사를 완공했는데도 원청회사가 공사대금을 받아 다른 곳에 써버리고 하청대금을 안 갚는다고 버티면 이 역시 신뢰를 무너뜨린 것으로 보고 그에 걸맞은 처분을 내리는 것이 사리에 맞지 않겠는가.

하지만 검찰은 부동산 매매대금을 보호하기 위해 배임죄를 적용하면서도 철물대금, 하청대금을 위해서는 배임죄를 적용하지 않는다. 사기죄가 성립되지 않으면 무혐의 결정을 하고, 배임죄는 검토도 하지 않는다. 철물을 댄 철물점 사장과 온 정성을 다해 공사를 마무리한 하청회사 사장이 부동산 매수인보다 덜 보호돼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유사한 사례도 적지 않다. 우리 사회의 큰 병폐 중의 하나가 '차명' 거래에 따른 사회적 문제다. 남편이 사업을 하다 빚을 지면 안 갚는지 못 갚는지 잠시 사라졌다가 부인 명의로 사업자등록을 하고 다시 사업을 한다. '간판갈이'를 통해 버젓이 불법을 자행하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그 돈이 어디서 났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그때부터 모든 재산은 부인 명의로 얼굴을 바꾸기 일쑤다. 사업장에 나와서 일하는 사람은 분명 예전의 그 사람 그대로인데 간판과 사업자명의만 바뀌었다. 여전히 부인은 집에서 살림을 하고 사업장에는 그림자도 비치지 않는다. 하지만 재산이 모두 부인 명의로 바뀐 상태여서 채권자가 호소할 법적 구제 수단도 마땅치 않다.

남편이 부인 명의로 토지를 매수하고, 건축허가를 내고, 건축업자와 공사계약을 하고, 오피스텔을 짓고, 보존등기를 하고, 임차인과 임대차계약을 하고, 부인의 계좌로 임대료를 받는다.

실제로 모든 것을 남편이 다 했지만 명의는 부인 앞으로 되어있다. 부인은 집에 있고 사업장에는 얼씬도 안한다. 문제는 명의가 부인 앞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 남편에게 돈을 빌려준 사람, 공사를 해준 사람, 자재를 대준 사람 등 그 누구도 그 재산에 전혀 손을 댈 수 없다는 것이다. 명의가 거래 당사자인 남편이 아닌 부인 앞으로 되어있다는 것이 단 하나의 이유다.

실제로 해당 재산의 소유자가 부인이 아니라 남편이라는 정황 증거가 넘쳐난다면 법원은 이를 남편 소유라고 인정하거나 적어도 부부 공동재산으로 인정해줘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우리 법원은 ‘명의’를 대단히 중시하므로 절대로 그처럼 융통성있는 결론을 내지 않는다. 법원은 부인 명의로 된 재산이 남편 소유라는 확실한 증거를 요구하기 마련이다. 차명사회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면 ‘명의’를 보지 말고 ‘실질’을 봐야 할 텐데, 법 현실은 전혀 이를 따라오지 못하고 있다. 그런 현실이 다람쥐 쳇바퀴처럼 되풀이되면 돌아가고 있을 뿐이다.

실질적 법치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철물점 사장과 하청회사 사장이 못 받은 외상값과 공사대금을 받아낼 수 있도록 법이 도와줘야 한다. 해법은 간단하다. 법원이 이런 사례에 대해 배임죄를 적용한다면 감히 공사대금을 다른 곳으로 빼돌리지는 못 할 것이다. 철물점 사장과 하청회사 사장이 외상값만 제대로 받아도 지금의 어려움을 상당부분 극복할 수 있기에 안타까움은 더욱 더 커질 수 밖에 없다.

차명(借名)은 우리 사회의 오래된 적폐다. 법원이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좀 더 관심을 가진다면 차명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쪽으로 법리를 운용할 수 있을 것이다. 차명사회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진정한 신뢰사회를 이룰 수 있다.

외상값을 못 받았는데 법적인 구제수단이 없어 막막하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차명의 벽에 막혀 피해 구제를 받지 못하는 현실을 그냥 보고만 있어야 할까. 형식적 법치에 가려져 방치되고 있는 실질적 법치를 어떻게 구현해나갈지. 술수의 덫에 걸린 민생을 어떻게 구제해야 할까.

판사와 검사는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이런 문제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해 해법을 찾아내야 한다. 판·검사가 우리 사회에서 존경받고 인정받는 이면에는 그같은 기대도 한몫하고 있다고 믿는다. 아울러 판·검사야말로 그같은 판단을 하고 구현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점에서 수많은 피해자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그들에게 기대를 걸고 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필자가 제시한 아이디어가 법리적으로는 다소 현실감이 떨어질 수도 있다. 다만 판사와 검사들이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피해자들이 처한 현실에 더욱 더 관심을 갖고 자신의 능력과 경험을 최대한 발휘해 달라는 주문이다.

판사와 검사는 과거로부터 내려온 법리에 얽매이지 말고 적극적으로 법리를 개발하고 적용해 이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 판사와 검사는 법대 위에 앉아 서민들과 피해자들에게 ‘안 된다’는 법리를 설명해 주는 법기술자가 아니라 광장에 내려와 ‘된다’는 법리로 서민들과 피해자들을 구제해 주는 호민관이 돼야 한다.

마음가짐은 이미 호민관인데 이런 저런 이유로 망설여온 판·검사가 사실 꽤 많을 것으로 확신한다. 이 분들이 이 참에 광장으로 걸어내려와 선량한 피해자들을 진심으로 위로하고 해법을 제시해줄 수 있는 진짜 '호민관'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이건태 법무법인 동민 대표 변호사 프로필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사법고시(29회)에 합격해 사법연수원(19기)을 수료했다. 1993년 부산지검 동부지청에서 초임 검사로 첫발을 내디딘후 법무부 법무심의관을 거쳐 서울중앙지검 형사제2부장검사, 인천지검 제1차장검사, 의정부지검 고양지청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는 법무법인 동민 대표변호사로 활동중이다. 강직하면서도 겸손해 인맥이 두터운 편이다. 법·제도를 통한 민생(民生) 개선이 관심사이며, 사회적 약자가 보호받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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