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켈로가 그린 로마제국 후기 기득권층 행태, 근현대 영국 상류층 '노블리스 오블리제'와 대조적

우리 기득권층 행태 로마제국 후기 닮아가… 국가·사회 발전하려면 기득권세력이 통찰력 갖춰야

김방희 생활경제연구소장(YTN 객원 해설위원)
[데일리한국= 김방희 생활경제연구소장 칼럼] 도대체 로마의 어떤 면이 이토록 작가를 매혹시켰을까? <마스터스 오브 로마>(Masters of Rome) 연작의 1부, ‘로마의 1인자’ 첫 장을 펼쳤을 때 독자로서 제일 먼저 든 궁금증이었다. <가시나무새>라는 베스트셀러를 쓴 호주 여류 작가 콜린 매켈로가 이 책을 쓰는 데 노년을 거의 다 바치다시피 했다는 광고 문구가 마음에 걸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자료 수집과 고증에 13년을 보냈다. 7부작을 완성하는 데는 20년이 걸렸다. 그가 다루는 시기는 공화정 말기인 기원전 110년부터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의 초대 황제로 등극한 기원전 29년까지. 그 80년을 글로 완벽하게 재현해내기 위해 그 세월의 무려 4분의 1을 실제로 써야만 했다. 그 사이 시력을 잃기도 했던 그는 올해 초 타계했다.

그는 여러 모로 시오노 나나미를 연상하게 한다. 이 일본 여류 작가 역시 2000년대 중반까지 15년 이상 고대 로마사를 서술해왔다. 그의 책 <로마인 이야기>를 접할 때도 비슷한 의문이 떠올랐던 생각이 난다. 로마사는 왜 생애의 상당 부분을 할애해 집착할 정도로 매력적일까?

물론 두 저술가의 작업에는 큰 차이가 있다. 시오노 나나미의 글은 늘 역사적 고증과 시각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로마의 주역들을 지나치리만치 영웅시했다. 극단적으로 보수적 관점이라는 비난이 뒤따른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고증의 정확성을 넘어, 콜린 매켈로는 로마의 기득권층에 메스와 현미경을 들이밀었다. ‘그들은 어떻게 집단을 이루고, 힘을 공고히 했으며, 또한 변질돼 갔는가?’

로마는 기득권 형성과 진화 과정에 대한 교과서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한 국가와 사회의 흥망성쇠를 결정짓는 핵심 변수다. 처음에는 재력과 권력이 비교적 안분된 상태에서 출발하는 국가나 사회에도 머지않아 이를 독점하는 세력이 나타난다. 그 과정 자체는 어떤 의미에서든 혁신적이다. 하지만 기득권 세력은 점차 세습을 통해 재력과 권력 독점을 영구화하려 든다. 이 점은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공통적이다. 문제는 그 집단이 조금도 변화할 수 없거나 통찰력을 발휘하지 못할 때다. 그러고 보면 로마는 오늘날을 돌아보게 만드는 거의 완벽한 표본이다. 그것이 이른바 유명한 지식인 로마 ‘덕후’(오다쿠의 속칭)들을 낳은 이유가 아닐까?

콜린 매켈로가 관심을 집중한 공화정 말기야말로 로마의 신흥 기득권이 탄생하고 득세하는 시기다. 그의 시리즈 초기는 오늘날 우리가 잘 아는 카이사르(시저)의 할아버지가 몰락한 가문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자신의 장녀를 정략 결혼의 대상으로 삼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의 사위이자 카이사르의 고모부는 비록 부자였지만 천민 가문 출신이었다. 하지만 아프리카 정벌과 게르만족 침공 저지라는 공을 인정받아 로마 공화정 최고위직인 집정관에 일곱 번이나 오른다. 그는 그동안 군대의 일원조차 될 수 없었던 로마 최하층민을 징집하는 혁명적 발상으로 전쟁 영웅으로 떠올랐다. 후에는 그간 정치 무대에 참여할 수조차 없었던 평민 세력을 등에 업고 귀족들과 원로원을 견제할 수 있었다.

로마 왕정이 본격화된 후 세습직 귀족들은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진다. 그들은 비생산적 가치관과 향락적 행태로 유명했다. 권력과 명예를 독점한 황제 아래서 대부분 공직을 포기했다. 대신 누구라도 자신의 재산을 기반으로 사치스런 생활을 즐기려 들었다. 사적 군대를 키워 기회만 닿으면 황제에 도전하기도 했다. 외침의 위기에서조차 내전이 끊이지 않았던 것도 그래서였다. 귀족이 아닌 이들도 귀족의 화려한 삶을 동경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를 이루는 방법은 군대나 정부 고위직에 올라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끌어모으는 수밖에는 없었다. 이는 자연스레 평민 이하 계층의 소외나 약화를 초래했다. 로마에 단단하게 뿌리내린 기득권 세력의 가치관과 행태는 오늘날 역사학계에서 대제국 쇠퇴의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전부는 아니다

기득권층의 사회적 책임과 관련해 가장 많이 회자되는 말은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이다. 이 말은 <일리어드>의 한 장면에 적용될 만큼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이 장편 서사시에서 트로이 왕자 사르페돈은 동료 장수 글라우쿠스에게 명예롭게 전투에 앞장설 것을 권한다. 현대적 의미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면 백년 전쟁 당시 칼레의 영웅들을 빼놓을 수 없다. 프랑스 항구 도시 칼레를 포위한 영국 에드워드 3세는 항복의 조건으로 시민 6명의 목을 요구했다. 당시 이 도시의 고위 관료와 부유층 인사 6명이 자원하고 나섰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말은 훗날 이들의 고결한 행동을 치하하는 데서 비롯됐다.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오랜 전통을 유지해온 근현대 영국 상류층은 로마 후기 귀족 사회와는 다른 의미에서 기득권층의 반면교사다. 그들은 국가나 사회의 지배계층으로 자신들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고자 애썼다. 사르페돈의 오랜 충고에 따라, 그들의 후손들은 언제나 전선의 최전방에 섰다. 전쟁의 양상이 완전히 바뀌기 전까지 이런 솔선수범은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총과 대포, 철조망이 대거 등장하는 현대전 양상이 시작되자 상황은 달라졌다. 죽음을 불사한 기득권층이 앞장서는 퍼레이드식 전투는 피해가 막심할 수밖에 없었다. 참호전이 등장하기 전까지 영국은 수많은 엘리트들을 전장에서 잃어야 했다. 심지어 세대 단절까지 초래할 정도였다. 귀족 계층의 이런 통찰력 부재가 영국의 쇠퇴를 부채질했다는 분석도 있다. 미래를 읽는 혜안이 없는 기득권층은 역동성이 사라진 기득권 집단만큼이나 무기력한 법이다.

2015년 말 우리 사회의 기득권층은?

외환위기 직후 우리 사회에서 유행했다는 상류층의 건배사 구호에는 ‘이대로 영원히’가 있었다. 경기가 좋을 때는 상류층 전유물인 공간이 온갖 사람들로 붐볐을 것이다. 경제 위기를 맞아 ‘유사 상류층’이 사라지면서 자신들만의 세계를 온전히 누릴 수 있게 됐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과장이야 있었겠지만, 그 구호가 당시 기득권층의 심정을 일부 대변한 것은 틀림없었다.

오늘날에는 그런 구호를 외칠 이유조차 없다. 당시 구호와 같은 기득권 체제가 더욱 공고해졌기 때문이다. 소수만 남은 상류층은 더욱 더 많이 누릴 수 있게 됐다. 이제 그 아래 계층과는 완전히 단절됐다. 그들은 자신들끼리 소통하고, 자신들끼리만 가족을 이룬다. 재력뿐만이 아니다. 로스쿨 입학 청탁이나 병역·취업 비리 논란을 보면 권력도 세습되는 모양새다. 그 점에서는 여나 야, 지역이나 세대 불문이다. 대한민국의 귀족 계급은 이제 난공불락의 성으로 변해 가고 있다. 최근 세간에 떠도는 수저론은 이전 세대의 6두품론(386 세대는 자신의 신분을 신라 골품제도에 빗대 자조하곤 했다)보다 더 견고해진 체제를 상징한다. 골품제 하에서 6두품 출신은 귀족 자리라도 넘볼 수 있었지만, 흙수저는 영원히 그 삶을 벗어날 수 없다.

건국 1백년도 채 안 된 사이 우리 기득권의 가치관과 행태는 천년 제국 로마의 후기를 닮아가고 있다. 이제 우리 사회에서는 로마 공화정 당시 ‘개천에서 난 용‘ 격인 마리우스의 탄생을 기대할 수조차 없다. 그렇다고 근현대 영국 상류층에 필적할 노블리스 오블리제 개념은 더 더욱 없다. 자신의 자녀들을 전쟁의 일선은 고사하고 군대에 보낼 마음조차 없다. 그런 상황에서 그저 민주주의의 퇴행이나 천민자본주의 단계의 시장 경제에 자족하며 마음 속으로 외칠 뿐이다. ‘이대로 영원히!’

왜 그들에게는 국가와 사회가 더 잘 돼야 현재 기득권층도 더 많이, 더 잘 누릴 수 있다는 상식 수준의 통찰력조차 찾아볼 수 없는 걸까?

■김방희 생활경제연구소장 프로필
서울대 경영학과, 서울대 대학원 경영학 석사- 대통령 직속 동아시아시대위원회 전문위원- 명지대 객원교수- MBC 라디오 <손에 잡히는 경제, 김방희입니다> 진행- KBS1 라디오 <성공예감, 김방희입니다> 진행- 생활경제연구소장(현) YTN 객원 해설위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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