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리적 보수·진보가 함께한 '대한민국 틀 바꾸기 토론회'… ‘그 이후’를 기대

토론회 골자는 "대내외적 중대 전환기… 국가운영 시스템 대대적 정비 필요"

최근 여야의 공천 방식 개혁 논란은 '격화소양'… 선거구 제도 등 개혁해야

유성식 시대정신 이사
[데일리한국= 유성식 시대정신 이사 칼럼] 지난 6일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매우 의미 있는 행사가 열렸다. 한반도선진화재단과 좋은정책포럼, 그리고 국회의장 직속 미래전략자문위원회가 공동 주최한 ‘광복 70년 대한민국, 틀을 바꾸자’라는 주제의 대토론회였다.

한반도선진화재단(이사장 박재완 성균관대 교수)과 좋은정책포럼(공동대표 김형기 경북대 교수)은 각각 개혁적 보수와 합리적 진보를 추구하는 대표적 지식인 단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시민단체들의 좌우 반목이 만성화한 풍토에서 이런 단체가 나라의 진로를 함께 모색하는 자리를 만들었다는 게 우선 드문 일이었고, 내용에도 깊이가 있었다.

보수·진보가 함께 주최한 '대한민국 틀 바꾸자' 토론회

한반도선진화재단 설립을 주도했던 박세일 고문(서울대 명예교수)이 기조강연을 했고, 좋은정책포럼 김형기 공동대표가 토론 좌장을 맡았다. 이어 정책전문가와 여야 정치인들이 발제 및 토론에 나서 오전 9시에 시작된 토론회는 오후 6시를 넘겨서 끝났다.

일부 각론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참석자들의 문제의식과 해법은 큰 틀에서 일치했다. 대한민국이 대내외적으로 중대 전환기를 맞고 있으며, 국가운영 시스템의 대대적 정비가 이뤄지지 않으면 치명적 위기를 맞게 될 것이라는 지적이었다. 시스템 정비는 정치와 경제, 사회, 노동, 복지, 교육 등 분야에서 다발적으로 진행돼야 하는데 정치개혁이 전체를 견인해야 한다는 의견이 다수였다. 하지만 현재의 정치에서 그 희망을 찾는 사람은 보기 어려웠다.

박세일 고문은 “생산과 분배, 조세와 복지, 고령화 사회에 대한 명확한 그림이 나오지 않으면 시장자본주의의 지속가능성이 위협 받는 ‘신 위험사회'(new risk society)가 등장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박 고문은 “그런데 국회는 ‘국가 경영형 정치’가 아닌 당리당략과 계파투쟁의 ‘권력투쟁형 정치’에 압도되고 있다”며 “국가발전 전략은 안중에 없고 국가예산을 누가 잘 뜯어 가는가 하는 국가재정 약탈전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국가 대개조를 할 수 있는 정치세력, 새로운 역사의 주체 세력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두 번째 기조강연을 한 임현진 국회 미래전략자문위원장(서울대 명예교수·경실련 공동대표)도 “한국정치엔 윤회는 있어도 진화는 없다”며 “정당 불신, 선거제도에 대한 회의가 굉장히 높은 만큼 국가적 과제 해결을 위해서는 합리적 진보, 합리적 보수의 대타협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어 박형준 국회사무총장은 “정치가 풀어야 할 시대적 요구는 급증하는데, 정치는 오히려 퇴행하는 심각한 ‘시스템 상 불일치’가 나타나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이것은 ‘87년 체제’의 구조적 한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며 “적대 정치의 구조화, 다원적 요구와 이익을 담아내지 못하는 진영 대립, 중장기적 미래 전략을 무력화하는 포퓰리즘, 국회의원을 선거꾼 정치인으로 내모는 소선거구제 폐해가 정치를 무력화·희화화하는 요인”이라고 덧붙였다.

"대내외 도전 대응하려면 87년 정치체제 극복해야"

사실 토론회에서 나온 총론적 정세 인식은 크게 새로울 것은 없다. 우리나라가 안팎으로 직면하고 있는 도전이 심각하며, 정치가 비전과 리더십을 갖고 응전을 주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치가 이 역할을 감당하려면 과감한 자기 혁신이 수반돼야 한다는 이야기다. 정치권도 이 점에 공감하는 분위기다. 많은 의원들이 “지금의 정치시스템으로는 국가 어젠다에 제대로 대응하기 어렵다”고 말하고 있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토론회 환영사에서 “87년 체제는 적어도 아시아권에서는 가장 완전한 민주주의를 가져다줬지만 여전히 진영 정치와 계파 보스 정치 같은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며 “정치적으로는 87년 체제를 극복하는 것에서 새로운 도약이 시작된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러나 문제는 정치판에서 벌어지고 있는 실제 상황은 이와 거리가 멀다는 데 있다. 토론회 기조강연자들이 하나같이 ‘새로운 정치세력’을 언급한 것도 이 때문으로 보인다.

정치권은 문제의 ‘87년 체제’를 깨기 위한 실천적 노력을 보여준 게 없다. 대통령 5년 단임제를 바꾸는 개헌은 청와대의 결사반대가 있었기에 그렇다 치더라도, 소선거구제를 중대 선거구로 변경하거나 독일식 비례대표제 등을 새로 도입하는 방안을 진지하게 논의해 본 적이 없다. 내년 총선 유불리 감안한 정략적 제안을 주고받았을 뿐이고, 요즘은 지역구 현역 의원들을 살리기 위해 비례대표 수를 줄일 태세다. 철학과 원칙이 없는, 기득권 지키기라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

비례대표 논란과 관련, 박세일 고문은 이렇게 말했다. “비례대표제는 본래 정책 전문성과 직종 대표성을 높여 ‘국가경영 정치’를 할 인재를 확보하는 게 목표였는데 여야 지도부가 사적 인맥 혹은 이념으로 원칙 없이 비례대표를 공천해놓고 폐해가 많으니 이제 줄이겠다고 하면 지역에 매이지 않는 인재는 어떻게 구하나. 비례대표를 늘리고 공천을 보다 객관적, 합리적으로 하는 게 맞다.”

공천 개혁은 '격화소양'… 선거구 제도 등 개혁해야

최근 여야가 골몰하고 있는 소위 공천 개혁에 대해서도 격화소양(신을 신고 발바닥을 긁는다)이라는 폄훼가 나오고 있다. 지역구 후보를 어떤 방식으로 공천하고 현역 물갈이를 얼마나 해야 하는지의 문제가 국회의 역량과 효율성을 높이는 개혁의 기준에서 볼 때 최우선 순위가 아닌데 여야가 엉뚱한 지점에 힘을 쏟고 있다는 것이다. 물갈이와 공천과정 투명화에 대한 국민의 요구가 있는 것은 사실이나, 13대 총선 이래 큰 폭의 인적 교체와 공천제 손질이 반복됐음에도 국회가 질적으로 나아졌다는 평가는 별로 없다는 점에서 이 부분이 시스템 선진화의 급소라고 볼 수는 없다. 공천제도 논란은 엄밀히 말해 개혁 보다는 여야 내부의 권력투쟁 성격이 더 짙다.

여야가 앞으로도 진정한 의미의 87년 체제 극복 작업에 나설 가능성은 높아 보이지 않는다. 시간은 촉박한데 관심이 공천제와 농어촌 선거구 유지 같은 데 쏠려 있기 때문이다. 선거제도 개편이 기득권 포기 내지 자기 부정을 요구하는 것이기에 자발성을 기대하기란 처음부터 쉽지 않았다. “여야 의원 모두 소선거구제 및 양당제 카르텔 회원들”이라는 지적은 괜한 말이 아니다. 토론회의 기조강연자들이 ‘새로운 주체세력’을 거론한 것은 그래서 설득력이 있다.

새로운 정치질서 만들어갈 혁신 주체 만들어야

박 총장은 “기존 정당 안에서 뿐 아니라 정당 밖에서 새로운 정치질서를 만들어갈 수 있는 혁신 주체를 만드는 일이 작금의 한국 정치에서 가장 긴요하다”고 말했지만, 정당 안에서는 어려울 듯 하다. 아무래도 문은 밖에서 따주어야 할 것 같은데 필자가 불민한 탓인지 이 역시 마땅한 움직임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도 정치를 이대로 두고 또 다른 4년을 맞는 것은 암담하다. 그것은 거대한 도전이자 전혀 새로운 세상인 ‘저성장 시대’에 직면한 우리에게 재앙이 될지 모른다. 자기희생적 비전과 도덕성을 갖춘 정치주체의 등장과 분투에 대한 기대를 접을 수 없는 이유다.

■유성식 시대정신 이사 프로필
서울대 동양사학과, 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 한국일보 정치부장- 대통령실 시민사회비서관, 국무총리실 공보실장- 시대정신 이사(현), 동국대 언론정보대학원 객원교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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