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정권·노무현정권은 각각 부가가치세·종합부동산세 도입으로 위기

미국의 독립도 결국 '조세 저항'… 일본에선 '세금 인상=선거 패배' 등식

조세형평성 불신 해소하면서 증세 부담 공정하게 나누는 방안 찾아야

정하용 교수
[정하용 경희대 교수 칼럼] '세금의 정치학'을 또 실감케 한다. 2014년 소득에 대한 연말정산이 일파만파의 정치사회적 파장을 가져오고 있다. 기존의 소득공제에서 세액공제 방식으로 바뀌면서 실질적으로 더 많은 세금을 내야 하는 직장인들의 불만과 비판으로 대통령 지지율은 30% 이하로 추락하기도 했다. 정부는 연말정산 파문에 놀랐는지 건강보험료 부과 체계 개선안 발표를 무기 연기했다. 당초 올해는 선거가 없는 해이므로 세제 개편을 포함하여 각종 개혁을 이뤄낼 수 있는 '골든타임'으로 알려졌었다.

하지만 2015년은 벽두부터 정권에게는 위기의 하드타임으로 바뀌고 있는 모양새이다. 왜 그렇게 됐을까. 지난 연말 이후 '비선 라인' 국정 개입 의혹 및 청와대 인사 문제·소통 부족 등이 논란이 되는 가운데 중산층과 서민들에게 민감한 세금 논란이 확산됐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세금 이슈가 가장 중요한 변수임을 부인할 수 없다. 세액공제 방식 도입은 조세 형평성을 개선하고 세수 증대 효과를 가져올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적지 않은 직장인들에게는 단지 한 가지 사실만 분명해졌다. '13월의 월급'은 없어지고 오히려 다음 달 월급으로 세금을 내게 되었다는 점이다.

부가가치세·종부세 도입으로 유신정권·노무현정권 흔들

2014년 연말정산으로 일종의 '조세 저항'이 초래됐다. 역사적으로 볼 때 정권 변동이나 혁명과 같은 중요한 정치적 변화들이 증세로 인한 조세 저항에서 비롯된 경우가 적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 1977년 도입된 부가가치세는 납세자의 상당수를 차지하던 영세 상인이나 소비에 대한 세금을 부담하게 된 일반 서민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왔다. 이듬해인 1978년 12월 실시된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야당인 신민당이 32.8%(486만 1204표)의 득표율을 기록해 공화당(31.7%,469만 5995표)보다 앞섰다. 의석 측면에서는 전국구인 유정회(77석)를 제외하면 여당인 공화당은 68석, 야당인 신민당은 61석, 민주통일당이 3석, 무소속이 22석을 차지했다. 전체 의석으로는 여권 우위 구도가 유지됐지만 지역구만 놓고 보면 '여소야대'가 됐다. 게다가 전국 득표율에서 신민당이 공화당을 눌렀기 때문에 야권의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높아지기 시작했다. 당시 공화당은 선거 패인을 부가가치세 도입과 물가상승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책임을 경제팀에 돌렸다. 야당은 높은 득표율 등을 내세우며 '유신 철폐'를 요구하는 정치 공세를 훨씬 강화할 수 있었다. 유신 정권의 몰락을 가져온 1979년 부마항쟁이 발발하게 된 데에는 장기 독재의 적폐에 덧붙여 부가가치세 도입에 따른 민심 이반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이다.

2005년 노무현정부가 시행했던 종합부동산세도 정권에 치명적 영향을 미쳤다. 상위 1% 소득계층에 대한 세금 인상으로 조세 형평성을 이루려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종부세는 야당과 보수 언론으로부터 포퓰리즘, 세금 폭탄 등으로 공격받았다. 노무현정권의 이념적 이질성의 상징처럼 치부된 종부세에 대한 공격으로 여당은 2006년 지방선거에서 참패했다. 그 뒤로 정권의 개혁 동력은 완전히 소진되었다. 종부세 파동 이후 부유층은 확고한 보수 세력으로 정치적 정체성을 자리매김하였고, 증세는 여전히 야당 내에서도 정치적 금기어로 남아 있다.

미국의 독립은 영국에 대한 '조세 저항'

세계적으로 볼 때 조세 정책의 변화가 가져온 정치적 영향은 부가세나 종부세 파동보다 훨씬 심대하다. 봉건제를 타파하고 근대의 시대를 열게 했던 시민혁명들의 저변에는 재정 악화에 직면한 봉건 왕정의 증세 정책에 대한 반발이 자리잡고 있었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면서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한 미국 혁명도 근본적으로는 조세 저항이었다. 영국은 7년 전쟁에서 프랑스에 승리하면서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의 패권국으로 부상했지만 영국 왕실은 전쟁을 치르느라 재정이 파탄날 지경이었다. 신흥 부르주아지가 다수를 장악하고 있던 영국 의회는 국왕의 증세 요구를 거부하였고, 영국 정부는 대신 식민지에 대한 과세로 재정을 확보하려 했다. 영국 정부가 부과한 일련의 세금들은 식민지인의 즉각적인 반발을 불러 왔고, 미국은 '대표 없는 곳에 과세 없다'는 논리로 독립을 쟁취한 것이다. 아메리카의 정치경제적 발전은 궁극적으로 영국에서 독립된 미국을 낳게 했는데, 과세 정책이 미국이라는 국가의 출현을 앞당긴 것이다.

일본에서도 '세금 인상=선거 패배'

일본에서는 여러 선거를 거치면서 '세금 인상=선거 패배'라는 등식이 자리잡게 됐다. 특히 소비세 인상은 역대 일본 정권의 ‘무덤’이었다. 다케시타 노보루 총리는 1989년 소비세를 처음 도입한 직후 실각했다. 1997년 하시모토 류타로 총리는 복지 재원 마련을 명분으로 소비세를 3%에서 5%로 인상했다. 1996년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2.6%로 5년 만에 최고를 기록하자, 자신감을 얻고 소비세 인상을 추진한 것이다. 국민들은 처음에는 소비세 인상 명분에 동의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경제성장률은 급격히 하락했고, 1998년 7월 실시된 총선에서 세금 인상이 쟁점으로 떠오르면서 집권 자민당은 참의원 선거에서 참패했다. 하시모토 총리는 취임한 지 2년 6개월 만에 물러났다. 2012년에는 민주당이 소비세 인상을 추진하려다 총선에서 참패했다. 작년 연말, 아베 신조 총리는 2015년 10월로 예정된 소비세율 재인상(8→10%)을 18개월 연기하겠다는 것을 공약으로 내걸어 총선에서 대승을 거뒀다. 아베 총리는 당초 '소비세 인상은 국가 부채를 줄이고 지속 가능한 복지를 위한 정책'이라고 외쳤지만 결국 세금 인상 연기로 선회했다.

조세형평성 불신을 해소해야

증세는 어떠한 목적에 의해 이뤄지더라도 정치적 저항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어떠한 명분으로 추진되든 세금의 증가는 납세자들에게는 소득의 감소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우리나라의 경우 조세 형평성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 있는 상황이므로 어떠한 명분을 내세워도 증세는 연말정산 파동과 유사한 정치적 저항을 가져올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치적 파국을 방지하면서 증세를 하는 방법은 그리 많지 않다. 정권의 몰락을 각오하거나 증세 대상이 되는 계층과 예상되는 적대적 관계를 극복할 수 있는 다수의 정치적 지지를 확보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자는 어떠한 정권도 감수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후자의 방법을 택할 경우에는 엄청난 정치적 갈등을 각오해야 한다. 따라서 어렵고 오래 걸리는 방안이라도 찾아야 한다. 꾸준한 제도 개혁으로 국민들이 납득할 만한 수준의 조세 형평성을 이루어낸 뒤에 증세로 인한 부담을 공정하게 나눠야 한다는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만이 실질적 해법이 될 것이다.

■정하용 교수 프로필
서울대 정치학과- 아이오와대학 정치학박사- 경희대 국제학과 교수(정치학,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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