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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사 속의 측근 정치 결말은 너무 비참했다"
  • 기자김영수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승인시간승인 2014.12.04 17:10
3수 끝에 왕위에 오른 공민왕 측근들, 처음부터 권력 투쟁
측근 싸움으로 개혁 퇴색… 공민왕, 결국 측근에 의해 시해
측근 정치 폐단 없애려면 권력자부터 유혹에 빠지지 말아야
  • 김영수 영남대 교수
[김영수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요즘 대통령 측근들 이야기가 연일 지상을 메우고 있다. 측근 정치는 정치의 역사만큼 오래됐다. 우리나라 역사에도 그런 사례가 많았다. 고려 말 개혁 군주로 알려진 공민왕 때도 실은 측근 정치 문제가 심각했다.

공민왕, '대권 3수' 만에 왕위에

공민왕은 3수 끝에 왕위에 올랐다. 공민왕의 형은 충혜왕이다. 왕위에 오르자 충혜왕은 온갖 비행을 저질렀다. 부왕 충숙왕의 몽고 왕비인 경화공주를 범하기조차 했다. 이런저런 난행이 알려지자 당시 고려를 지배했던 몽고는 충혜왕을 원나라에 압송하여 유배시켰다. 그가 유배 도중 죽었다는 소식이 들리자, 백성들은 오히려 “다시 살 날을 보게 되었다”고 기뻐했다.

당시 공식 후계자는 동생 공민왕이었다. 그는 일종의 인질로서 원나라 수도 연경(북경)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자애로워 백성들의 기대가 컸다. 모후인 명덕태후에 따르면 공민왕이 후계자로 지명되었을 때 백성들은 희망을 품고 오직 임금이 되지 않을까 걱정했고, 자신 또한 그러했다고 한다.

하지만 왕위는 겨우 8세에 불과한 충혜왕의 아들 충목왕에게 돌아갔다. 왕위는 몽고 조정이 결정했는데, 공민왕이 왕위 지명을 둘러싼 권력 투쟁에서 진 것이다. 충목왕은 재위 5년 뒤 죽었다. 드디어 공민왕은 왕위 지명을 받고 행차가 고려를 향해 출발하게 되었다. 하지만 황제는 갑자기 결정을 번복하고 충혜왕의 서자인 12세의 충정왕에게 왕위 계승을 명했다. 그러자 공민왕 측근들이 모두 새 임금에게 붙고, 박천부라는 사람만이 떠나지 않았다. 공민왕은 비장한 목소리로 “오직 너만 있구나. 나라고 어찌 왕이 될 날이 없겠느냐. 내가 만일 왕이 되면 잊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2년 뒤 원나라는 충정왕을 폐위시키고 공민왕을 임명했다. 1351년, 공민왕의 나이 22세 때였다. 백성들은 뛸 듯이 기뻐했고, 이제현과 이색 등 개혁파 지식인들도 큰 기대를 걸었다. 당시 연경에 있던 공민왕은 즉시 이제현을 정승에 임명하여, 그가 귀국하기 전 국정을 담당하도록 했다. 이제현은 개혁파 지식인들의 리더였다. 새 정치에 대한 기대는 높아졌다. 한편 공민왕은 자신의 최측근 조일신을 먼저 입국시켜 첫 조각 명단을 발표토록 했다. 공민왕의 첫 인사는 보은 인사였다. 거의 전원이 불우했던 시절 공민왕을 연경에서 보필한 37명의 ‘연저수종공신’들이었다. 그 중 과거 합격자는 두 명뿐이고, 대부분 이력도 확실치 않은 사람들이었다. 개혁파 지식인들은 크게 실망했다.

공민왕 측근들이 처음 한 일은 권력 투쟁

권력을 장악한 공민왕 측근들이 처음 한 일은 서로를 물어뜯는 권력 투쟁이었다. 첫 희생자는 37명 중 가장 유능하고 인품이 훌륭한 유숙이었다. 조일신이 그를 무고하여 파직시켰다. 그를 질투한 것이다. 조일신은 기세가 등등했다. 공직기강을 담당한 감찰사가 자신의 종을 가두자, 옥을 부수고 석방했다. 그런데도 왕은 조일신이 아니라 감찰사 관리들을 파직시켰다.

조일신은 인사를 장악하여 자신의 측근들을 요직에 앉혔다. 무신란 이후 고려의 인사는 정방에서 이루어졌다. 공적인 인사 절차를 무시하고 무신 집권자 마음대로 한 것이다. 정방은 무신 시대 이후에도 살아남아 권신들끼리 관직을 배분했다. 이 때문에 정방은 고려 후기의 핵심적 개혁 어젠다 중 하나였다. 공민왕은 즉위교서를 발표하기도 전에 정방 페지를 선언했다. 하지만 조일신이 반대했다. 공민왕은 폐지했다가 바로 취소하면 “사람들 웃음거리가 될 것”이니,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모두 자기에게 말하라고 했다. 그러나 결국 정방은 부활되었다.

조일신의 최대 불만은 이제현이 정승이라는 점이었다. 그는 자신의 지위가 이제현보다 낮다고 불평했다. 공민왕 즉위에 공을 세우긴 했지만, 조일신은 재능과 명성에서 이제현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제현은 “신이 감히 모든 사람이 우러러보는 지위에 있지 못 하겠다”고 사직했다. 공민왕은 당황했다. 그는 공민왕의 개혁을 상징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왕은 사직서를 반려했다. 그러자 이제현은 다시 낙마하여 다쳤다는 이유로 사직을 청했다. 감찰사 관리들이 파면되자 그는 세 번이나 거듭하여 사직을 강청했다. 그것은 왕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현이 국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더 이상 없었다. 정부에 남아있는 것은 오히려 불명예와 생명의 위협만 초래했을 것이다.

측근들의 끊임없는 권력 투쟁으로 공민왕 개혁 정치 퇴색

사태가 이렇게 흘러가자 공민왕이 개혁정치는 빛이 바랬다. 이제현을 비롯한 개혁파 지식인들은 떠나기 시작했다. 측근들을 제외하고는 왕을 만나기도 힘들었다. 한비자에 따르면 군주를 가리는 다섯 가지 옹(壅)이 있다고 한다. 신하가 왕 앞을 가로막는 것, 재물과 이익을 통제하는 것, 마음대로 명령을 내리는 것, 사사로운 뜻을 행하는 것, 자기 사람을 심는 것이 그것이다. 이러면 군주는 결국 시해를 당하고 나라를 잃는다. 조일신은 난을 일으켰다가 죽음을 당했다. 또 한 명의 측근 김용도 난을 일으켜 왕을 죽이려 했다. 공민왕은 말년에 변태적 성격으로 변해 자제위를 설치해 젊고 외모가 잘생긴 청년을 뽑아 이 곳에 두고, 이들이 좌우에서 시중을 들게 했다. 공민왕은 말년의 측근 기구인 자제위에 의해 암살당했다. 그 때까지 살아남은 연저수종공신은 한 사람 뿐이었다.

측근 정치가 사라지지 않는 이유가 있다. 권력자에게 필요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크세노폰의 '참주론'에 등장하는 히에로는 "군주는 자신 앞에서뿐 아니라 사방에서 적을 보고 있다”고 고백한다. 권력자는 신뢰할 수 있는 인간을 발견하기 힘들다. “임금은 아내와 아들도 믿을 수 없다. 그러니 그 밖에 다시 믿을 만한 사람이 있겠는가?” 한비자의 말이다. 측근이란 권력자의 사인이다. 믿을만한 사람인 것이다. 하지만 충성심은 뛰어나지만 능력은 떨어진다. 파리처럼 천리마 위에 붙어서 천리를 가고 싶은 사람이 측근이 된다. 그리고 천리마에 붙어서 천리마처럼 행세한다.

측근 정치 폐단 없애려면 권력자부터 유혹에 빠지지 말아야

측근 정치의 폐단을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은 권력자가 측근 정치의 유혹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모든 일을 투명하게 하면 측근이 필요하지 않다. 측근을 써야 한다면 신상필벌을 해야 한다. 공이 있으면 아무리 멀고 비천한 사람도 상을 줘야 하고, 죄가 있으면 아무리 가깝고 사랑하는 사람도 벌을 줘야 한다. 한비자의 말이다. 이도저도 힘들면 제도적 장치를 두어 엄격히 감시해야 한다. 조선 왕조는 드물게 내시의 폐단이 없었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은 정도전이 조선 정치체제를 설계할 때 사관과 간관을 두어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고 비판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또 목숨을 걸고 왕의 실정을 비판하는 것을 명예로 여기는 사림의 기풍도 큰 역할을 했다.

■김영수 영남대 교수 프로필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서울대 정치학박사(학위 논문 '고려 말과 조선조 건국기의 정치적 위기와 극복에 관한 연구')- 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 상임연구원-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현)- 청와대 연설·기록비서관- 영남대 통일문제연구소장(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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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2014/12/04 17:10:58 수정시간 : 2020/02/07 16:3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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