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 분석]
전격적인 방문 제의와 북한 최고실세 대표단 모두 파격

남북관계 이슈로 국제적 공세 피하고 경제지원 얻으려는 것

남북대화의 문 열어놓되 북한의 전략 제대로 읽고 대응해야

전옥현 교수.
[전옥현 교수 칼럼] 북한 고위급 대표단의 전격적인 인천 방문은 한마디로 ‘파격’이었다. 또 '깜짝' 방문이었다. 북한 대표단이 지난 4일 인천에 머문 12시간 30분은 마치 작전을 치르듯이 숨가쁘게 진행됐다. 북측의 전격적인 방문 제안에서 평양으로의 귀환까지 채 이틀도 걸리지 않았다. 3일 오전에 아시안게임 참가 북측 임원진을 통해 방문 계획을 처음 알린 뒤 남북 양측 간 조율, 방문 성사, 환담 및 오찬 행사, 행사 참석 후 귀환까지 모든 게 짧은 시간 내에 이뤄졌다.

북측 대표단 스스로 ‘파격적 사건’이란 표현을 썼다고 한다. 류길재 통일부장관은 5일 KBS ‘일요진단’ 프로그램에 출연해 “북측 대표단은 ‘남북관계가 워낙 막혀 있어 이것을 풀기 위해 파격적 사건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표현을 많이 썼다”고 전했다. 이번 북한 대표단의 방문은 여러 측면에서 일상의 '격'을 벗어났다. 우선 남북관계가 극도로 경색된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방문을 통보하고 방문 일정을 하루 만에 마무리하고 돌아간 일정 자체가 의외였다.

대표단이 북측의 최고 실세들로 구성됐다는 점도 눈길을 끌었다. 북한 대표단은 총 11명으로 구성됐는데 그 중에 3명은 북한 정권의 핵심 실세들이었다. 황병서 군 총정치국장, 최룡해 노동당 비서,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부장 겸 대남담당 비서 등은 북한에서 최고 실세로 손꼽히는 인사들이다. 북한 정권에서 실권으로 본다면 황병서와 최룡해는 ‘넘버2’ ‘넘버3’로 불리는 인사들이다. 또 김양건은 잘 알려진 것처럼 대남정책 총책이다.

건강이상설이 제기된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은 자신의 뜻을 대신 전할 수 있는 핵심 실세들을 남한에 보낸 것이다. 특히 군과 당, 정부의 실세들을 고루 골라서 보냈다는 점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당과 군, 정부의 실세 3종 세트’가 내려온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황병서는 이번에 김 제1위원장의 특사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이번 방문을 두고 일각에서는 “김 1위원장의 건강 이상과 관련된 것 아니냐”는 얘기가 흘러 나왔지만 김 제1위원장의 건강 상태가 북한 체제를 흔들 정도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북한 대표단이 인천을 찾은 10월4일은 두 가지 점에서 의미가 있다. 우선 아시안게임 폐막일이라는 점이다. 아시안게임이란 명분을 빌어 이벤트를 만들기 위해 이날을 선택했다.또 7년 전 노무현정부 임기 말 때 남북 10.4선언이 이뤄진 날이기도 하다. 남북관계 개선과 대북 경제 지원을 골자로 하는 10.4 선언의 정신에 맞춰 한국 정부가 전향적인 자세로 나오라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이날을 택했다고할 수 있다.

이번 북한 대표단의 방문을 계기로 일단 남북 대화에 물꼬가 트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것이 남북관계의 분명한 진전으로 이어질지 아니면 일시적 유화 제스처로 끝날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한다. 일각에선 남북 정상회담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으나 벌써부터 낙관적 기대를 갖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향후 남북관계를 전망하기 위해서는 먼저 북한 대표단의 전격적인 인천 방문(*일부 언론에서 이번 방문을 '방남'이라고 쓰고 있으나 적절하지 않은 표현이다) 의도 등 몇 가지 궁금한 점들을 짚어 봐야 한다. 우선 북한은 5.24 대북 제재 조치의 장기화로 인해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고, 국제사회에서는 외교적으로 고립되고 있다. 이같은 난관을 극복하고 숨을 돌리기 위해서는 남북관계를 어느 정도 풀든지, 아니면 최소한 남북관계 진전을 위해 노력하는 모양새를 보여줘야 한다.

북한 대표단의 인천 방문 의도는 바로 이런 점에서 찾아야 한다. 이를 위해 아시안게임을 활용한 셈이다. 아시안게임을 명분으로 그동안 꽉 막힌 남북관계의 돌파구를 마련하는데 김정은 체제가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점을 국내외적으로 알리기 위해 인천을 찾은 것이다.

북한이 진정으로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카드를 내놓기 위해 방문한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시기상조다. 오히려 일종의 '충격 효과'를 노리기 위해 전격 방문한 것으로 봐야 한다. 북한은 5.24 조치 장기화 및 유엔 제재로 돈이 매우 궁한 상태에 놓여 있다. 식량난이 심각했던 시절에 비교한다면 요즘 북한 경제가 어느 정도 돌아간다는 얘기도 있지만 경제특구에 투자할 자본을 유치하지 못하는 등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실정이다. 게다가 김 제1위원장의 건강이상설이 제기되는 등 통치권력의 불안정은 완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다.

또 강석주 노동당 국제담당 비서와 리수용 외무상 등이 최근 해외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지만 국제사회의 고립이 심하다는 것을 절감했을 것이다. 미국 하원이 지난 7월 대북 경제제재 법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키는 등 미국의 압력이 거세지는 상황인데 대중국 외교는 풀리지 않고 있다. 그래서 일본과 러시아에 접근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데, 뚜렷한 성과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북한 대표단의 이번 방문은 일본에 대한 실망도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북일 교류 활성화를 통해 엔화가 들어와야 되는데 아직까지 가시적 성과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북핵 문제와 인권 문제를 거론하는 국제사회의 대북 투트랙 공세는 더욱 강화되고 있다.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남북관계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양새를 보여 주지 않는다면 국제사회의 벽을 넘을 수 없다. 전시효과를 노리기 위한 측면이 적지 않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남북관계 진전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부각시킨다면 한반도 안팎의 공세 수위를 낮추거나 공세 초점을 바꿀 수 있다.

북한은 이번 방문을 계기로 남북관계를 어느 정도 개선해 경제적 지원을 얻어내고 국제사회의 북핵과 인권 문제 공세를 무디게 하려는 전략을 갖고 있다고 봐야 한다. 남북관계를 새로운 이슈로 꺼내 이를 지렛대로 삼아 다른 장애물들을 넘어보려는 계산을 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은 5.24 대북 제재 조치 해제와 금강산 관광 재개 등을 통해 대규모의 달러가 유입되기를 바라고 있다. 북한은 남한의 여야 정치권 내부에 5.24 제재 조치 해제 목소리가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남남갈등도 활용할 것으로 보인다. 물론 북한은 아시안게임에서 거둔 좋은 성적을 체제 내부에서 부각시키기 위해 이번 이벤트를 활용한 측면도 있다.

하지만 남북관계가 개선되고 진전되려면 북한의 진정한 자세 변화가 전제돼야 한다. 특히 핵 문제를 진지하게 해결하려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북한은 아직까지 북핵 문제에 대해 전향적 자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북한은 6자회담에서 합의한 것을 여러 번 깼다. 미국과 한국은 기존의 합의부터 이행한 뒤 6자회담을 통해 진전된 방안을 논의하자는 입장을 갖고 있다. 북한은 남북 교류를 확대하되, 북핵 문제 협의는 나중에 하자는 전략으로 나올 가능성이 높다.

미국은 이번 북한 대표단의 방문에 대해 미묘한 입장을 갖고 있을 것이다. 미국은 아직도 북한을 믿기 어렵다는 유보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를 두고 미국의 일부 전문가들은 “북한이 동맹국인 한미 간의 균열을 노리면서 대표단을 한국에 파견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북한이 진정성을 가졌다면 이번에 친서도 갖고 오고, 하루 더 체류하면서 박근혜 대통령도 만나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 일방적인 일정이었다. 김정은 제1위원장은 다목적 포석으로 이번에 황병서 등을 한국에 파견한 것이기 때문에 북한의 전략과 의도에 휘말리지 않도록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처변불경(處變不驚· 어떤 환경에 닥쳐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않는다)이란 말이 있다.지나치게 흥분하거가 놀란다면 북한의 전략과 이슈에 휘말릴 가능성이 있다. 물론 남북대화의 문을 닫아선 안된다. 대화는 반드시 해야 한다. 다만 대화의 문을 열어 놓되 원칙을 지켜야 한다. 선(先)비핵화 조치 이행. 과거 도발에 대한 사과 및 재발 방지 약속 등이 전제돼야 한다. 우리의 일관된 대북정책, 통일정책에 따라 흐트러짐 없이 대응하면 된다. 우리가 이번 일을 기회로 삼기 위해서는 북한의 의도를 읽으면서 서두르지 말고 의연하게 남북대화에 임해야 한다.

■ 전옥현 교수 프로필

대전고, 서울대 외교학과- 주 유엔대표부 공사- 국가안전보장회의 정보관리실장- 국가정보원 제1차장- 주 홍콩 총영사- 서울대 국제대학원 초빙교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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