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기획-국격을 높이자⑤]

의원의 입법권 강화한다면 국회 방기 가능하겠는가

유권자들 일하지 않고 싸움만 하는 의원 심판해야

국회의원 자질 높이고 대표성 보장하는 방안 찾아야

정하용 경희대 국제학과 교수
[정하용 교수 칼럼] 데일리한국이 최근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선진국 진입을 위해 필요한 개혁을 묻는 질문에 대해 가장 많은 응답은 정치 개혁으로 나타났다. '우리나라가 품격을 갖춘 선진국이 되기 위해 어떤 개혁이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합니까'라고 묻고 두 가지를 꼽아달라고 하자 응답자 중 43%가 정치 개혁을 선택했다.

5개월 지속되는 국회 파행...정치 개혁 요구 봇물

그러나 같은 여론조사에서 정치 개혁의 방향에 대해서는 뚜렷한 입장이 드러나지 않았다. 정치 개혁의 당위와는 달리 개혁의 어려움을 일반 국민들 역시 잘 인지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정치 개혁의 구체적인 대상, 내용, 방향 그리고 방법에 부딪히면 그 누구도 쉽사리 대안을 제시하기 힘들다. 정치 개혁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들은 무엇인가? 현재 우리 상황에서 정치 개혁의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개혁을 무망하게 만드는 요인은 무엇보다 개혁의 대상과 주체가 동일하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개혁의 대상이 너무나 명확하지만 어쩔 수 없이 이들이 스스로 개혁을 이루어 내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민주화 이후 가장 빈번하게 개혁 대상으로 거론되고 있는 것은 바로 국회와 정당이다. 점차 높아지고 있는 국민적인 정치 개혁의 요구는 무엇보다 지난 다섯 달 내내 공전하고 있는 국회에 대한 실망감과 정당, 특히 지리멸렬하는 야당에 대한 실망감을 넘어선 분노의 결과이다. 행정부를 견제하고 입법 기능을 수행해야 하는 원론적인 역할을 방기하고 있는 국회와 정치를 실종시키다 못해 여타 사회 분야에까지 부정적 외부 효과를 미치고 있는 정당에 대한 불신은 거의 극에 달한 상태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부 제기되고 있는 국회무용론은 심정적으로는 공감이 가지만, 우리가 지금까지 경험해 온 삼권분립에 기초한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위험한 발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 아무리 국회와 정당이 한심해도 혁명이나 쿠데타를 기대할 수도 없고 기대해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제대로 된 국회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이를 위해서 선거 제도 개편을 통한 국회의 성격과 규모의 변화, 일부 지역에서의 일당 독식을 막기 위한 대안들이 제시돼 왔다. 그러나 국회의 제도적 위상 변화만으로는 정치 개혁을 이루어 내기 힘들다. 정당 내부의 권력을 몇몇 계파의 보스들이 장악하고 있는 야당이나 대통령의 의사가 사실상 당론인 여당의 과두적 지배체제가 지속되는 한 어떠한 국회라도 지금의 모습을 답습할 수밖에 없다.

역설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국회와 정당 개혁을 주축으로 하는 정치 개혁을 이루어 내기 위해서는 오히려 국회의 권한을 대폭 강화하고 기능을 세분화시켜야 한다. 정확히 말하면 개별 국회의원들 자체가 독립적인 입법 기관이 될 수 있을 때 진정한 정치 개혁은 시작될 수 있다. 우리나라보다 의회의 권한이 훨씬 막강한 미국조차도 정당 내부의 권력 구조를 분산시키는 일련의 정치 개혁을 통하여 의회의 위상을 재정립하고 입법 기능을 강화할 수 있었다. 이 점에서 미국의 사례는 우리의 정치 개혁을 위해 의미 있는 시사점을 줄 수 있다.

미국에서는 의원 입법권 강화로 정치 개혁

20세기 들어서 미국 정치는 두 차례에 걸쳐서 현재의 의회 정치를 가능하게 한 중대한 정치개혁을 이루어 내었다. 첫 번째는 1900년대 초반에 소장 의원들의 주도로 하원의장의 권한을 대폭 축소하고 상임위원회 기능을 강화한 것이다. '1900년대의 반란'이라고 일컬어지는 의회 개혁의 핵심은 하원의장이 독점하던 상임위원장 임명권을 빼앗고, 대신에 각 상임위원회 의원들 중 여당의 최다선 의원이 위원장을 맡게 하는 선임제(先任制· seniority rule) 를 채택한 것이다. 하원의장이 위원장 임명 권한을 통해 상임위원회를 장악해 실질적으로 의회의 독재자로 군림하던 시대를 종식시킨 것이다. 이러한 개혁이 가능했던 이유는 당시 미국을 휩쓸던 혁신주의 운동의 영향이다. 부패 정치에 대한 고발과 비판으로 시작한 혁신주의 운동은 국민적인 지지를 얻었고, 의회 개혁뿐 아니라 독점 기업 타파, 여성 참정권 허용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1970년대의 개혁'으로 일컬어지는 두 번째 정치 개혁의 핵심은 역시 상임위원장 임명 방식의 변화이다. 선임제는 폐지되고 각 상임위위원들이 상임위원장을 직접 선출하게 되었다. 여기에 덧붙여 상임위원회 내부에 소위원회들을 강화시켜서 입법 심의 권한을 대폭 이관하였다. 그 결과 개별 의원들의 입법 권한이 크게 신장되었고, 정당의 영향력은 크게 감소하였다. 1970년대 정치 개혁을 가져 온 주된 원인은 보수적인 남부 출신 민주당 다선 의원들이 선임제를 통해 상임위원장직을 장기적으로 독식하며 1960년대 반전 운동과 인권 운동으로 촉발된 사회적 개혁 입법 요구를 집요하게 방해해 온 것에 대한 반발이었다. 개별 의원들의 입법 권한이 강화되면서 정당 내부의 권력 구조 분권화가 촉진되었다. 이와 더불어 공천권이 정당 보스들의 손에서 놓여나서 지역구민들의 자발적 참여에 의한 프라이머리(국민경선)로 바뀌게 되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의회의 양극화 심화로 정당의 영향력이 다시 강화되면서 의회 자체에 대한 비판과 개혁의 요구가 높아지고 있는 것은 개별 의원들의 영향력 약화와 무관하지 않다.

개별 의원들의 입법 권한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 온 미국의 경험을 우리의 정치 현실에 곧바로 적용하는 것은 무리일 수 있다. 일부 국회의원들의 자질 문제, 여전히 지역이라는 단일 요인에 좌우되고 있는 유권자들의 투표 성향, 행정부에 비하여 현저히 떨어지는 국회의 전문성 등 장애 요인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오히려 국회의 권한 강화로 극복해야 한다. 개별 의원들이 권한 만큼이나 입법에 대한 막중한 책임을 지게 되고, 이들이 대폭 강화된 국회의 입법 보조 기능에 의해 입법 역량을 높이게 된다면 지금처럼 국회를 방기하고 입법을 포기할 수 있겠는가? 막강한 입법권과 영향력을 가진 국회의원들이 국회에서 일하지 않고 싸우기만 한다면 나라 전체가 돌아가지 않을 뿐 아니라 유권자들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임을 분명하다. 개별 의원들이 지역구 주민들에 의해 심판받게 된다면, 계파 보스들이나 청와대의 의사에 따라서 쉽사리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의무를 방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자질이 떨어지고 무책임한 국회의원들에게 더 많은 권한을 주는 게 말이 되느냐?" 이 같은 불만을 제기하는 유권자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격"이라는 비판론도 나올 것이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우회하기 보다는 정면으로 돌파해야 한다. 미국처럼 개별 국회의원과 국회의 권한을 강화함으로써 의원들이 국회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권역별 비례대표제 도입, '주민에게 공천권 돌려주기' 검토해야

다만 전제가 있다. 국회의원들의 자질을 높이고 지역 대표성을 제대로 보장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우리나라는 큰틀에서는 양당 제도이지만 현재 영남과 호남에서는 양당 제도가 아닌 일당 독식 제도이다. 사실상 영남과 호남에는 각각 새누리당, 새정치민주연합 1당만이 존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치열한 경쟁을 통해 국회의원을 뽑는 구조를 만들어 내야 한다. 지역주의 정치구도를 타파하기 위해 중대선거구제 또는 소선거구제+권역별 비례대표제를 도입하는 방안 등이 거론되고 있다. 중대선거구제 도입은 권력구조 변화 등과 맞물린 문제여서 당장 실현하기 어려우므로 현행 헌법에서는 소선거구제를 유지하면서도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도입하는 방안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이렇게 되면 영호남에서 1개 정당 독식 구조가 완화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함께 국회의원 후보 공천이 특정 지도자나 계파에 의해 좌지우지되지 않도록 공천 제도를 민주화, 투명화, 개방화해야 한다. 여러 대안이 있을 수 있으나 중장기적으로 완전경선 방식의 프라이머리로 후보자를 선출하는 쪽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런 제도가 전면 도입되면 당 밖의 좋은 후보를 영입하기 어렵고 현역의원이나 지역 토호들이 유리하게 되는 문제점이 있으므로 과도기에는 민주적 방식의 전략 공천 등 보완 방안을 혼용한 뒤 궁극적으로 프라이머리로 가야 할 것이다. 카리스마를 가진 정당 지도자가 앞으로 나오기 어려우므로 결국 공천 논란을 없애기 위해서는 국민과 지역 주민들에게 공천권을 돌려주는 방법밖에 없다. 이와함께 유권자들의 의식 개혁도 반드시 필요하다. 유권자들이 한 지역에서 특정 정당 후보만 뽑는 잘못된 습관을 뿌리뽑고, 의원들의 성적표를 보고 재선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정하용 교수 프로필

서울대 정치학과- 아이오와대학 정치학박사- 경희대 국제학과 교수(정치학,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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