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의 울음소리를 들어라"

김형오 전 국회의장
(1편에 이어)
'명량'을 통해 추가로 두 가지 점을 꼭 짚었으면 한다. 명량에서 대승을 거둔 이순신의 그 다음 행보는 어떠했는가. 영화에서 언급되진 않았지만 굉장히 이례적인, 그래서 얼핏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그는 피어린 울돌목을 뒤로 하고 기수를 돌린다. 그냥 돌리는 것이 아니라 전속력으로 쉬지 않고 노를 젓는다. 당사도·어의도법성포·위도를 경유한 그의 행선지는 전라도와 충청도의 경계인 선유도(고군산열도)다. 동력선도 아닌 당시 배로 수백 리 파도치는 길을 닷새 만에 왔으니 급속한 후퇴다. 대승을 거둔 군대로선 쉽게 상상하기 힘든 행동이었다. 자신을 못미더워하는 선조 임금을 비롯한 조신들이 쏟아 부을 비난과 질책을 아랑곳하지 않고 이런 퇴각을 하다니(그의 퇴각에 대해 조정에서 어떤 논의가 있었는지는 ‘실록’에 기록되지 않아 알 수 없다). 나는 이 점에서 탁월한 전략가로서의 그를 다시 보았다. 만약 승리에 들떠 환호하는 백성들과 함께 명량 주변에 머물렀다면 이순신 군은 대패하고 말았을 것이 틀림없다. 조선 수군 12척은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았고 일본 배 200여 척은 아직 싸움 한 번 하지 않은 채 건재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연이어 전투가 벌어졌다면 승부는 불을 보듯 뻔했다. 그래서 이순신은 퇴각한 것이다.

사즉생과 퇴각을 아는 용기의 리더십

영화 '명량' 흥행으로 이순신 열풍에 힘입어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에서는 이순신 서적 특별코너도 마련했다. 양태훈 인턴기자 multi@hankooki.com

요즘의 한국 정치 상황에 비추어보자. 전투에 이긴 사령관이 지역을 버리고 퇴각했다면? 여야 정치인, 일부 언론과 시민 단체, 심지어는 청와대까지 나서서 소환·문책하라고 야단이 났을 것이다. 전문가도 아닌 사람들이 자기 입장에서만 사건을 해석하니 진실과 거리가 먼 일방적 주장이 목소리를 키우고 사실이 왜곡되기 십상이다. 요즘 우리 사회는 전문가를 키울 틈도 없이 갈아치운다. 또 설사 전문가라 하더라도 소신껏 책임 있게 일하고 말하기가 쉽지 않은 환경이다. 임란이 일어났던 16세기는 통신도 TV도 SNS도 없던 시대여서 이순신은 살아서 다음 전쟁에 대비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상상을 하며 실소를 머금어본다.

상황은 다르지만 국민당 장제스(蔣介石) 군(軍)에 패해 중국 대륙을 도망 다녔던 마오쩌둥(毛澤東) 군이 중국인의 민심을 얻게 된 것도 바로 이 패주 길에서였다. 그들은 가고 머무는 곳에서 군율을 엄격히 지켰다. 민가에 들어가 잠자지 않고, 음식이며 물자를 빼앗지도 훔치지도 않았다. 말로만 듣던 적군(赤軍).홍군(紅軍)이 실제로 내 아들, 내 조카와 같은 중국인임을 각인시켰다. 패잔병이었지만 그들이 머무는 곳곳에서 온정이 오갔다. “일본군과 싸워야 하는데 국민당 군에게 쫓기고 있다. 하룻밤 바깥에서 머물다 갈 테니 불편하더라도 참아 달라.” 중국의 서북 변방 옌안(延安)에 올 때까지 병력·물자·무기·복색이 초라하기 짝이 없었지만 마오쩌둥 군은 중국 인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2만5000리 패주 길을 대(對) 국민 홍보 심리전의 더없이 좋은 기회로 삼았다. 마오쩌둥 군은 전투에선 졌지만 민심을 얻는 데선 장제스 군을 이긴 것이다. 중국 대륙 통일의 기반을 마련했던 것이 바로 이 ‘장정(長征)’이었다. 이순신의 퇴각로 역시 도망 길이 아니라 승전보를 생생히 온 백성에게 전하는 살아 있는 방송이고 뉴스였다. 가는 곳마다, 들르는 지역마다 이 위대한 장수와 병정에게 조선의 희망을 걸었다. 수군 지원자가 몰려오고, 부족하지만 군량과 물자 조달도 가능해졌다. 군대를 훈련시킬 시간도 벌게 되었다. 결국 전라도 중턱까지 분풀이한답시고 올라왔던 일본 수군은 언제 조선 수군의 기습이 있을지 몰라 추위를 핑계대고 퇴각하고 만다. 나는 이순신의 용전분투와 더불어 깊은 전략적 숙고, 민심까지 추스르는 혜안과 인품에 감탄을 금하지 못했다.

분노와 복수에 칼날 앞에선 한국사회… 각자 위치에서 최선 다해야

다른 하나는 ‘명량’에 나타난 그의 사생관이다. 전투 하루 전날 난중일기에 쓴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는 이 영화의 키워드다. 이순신의 삶 자체가 ‘사즉생’이었기에 주제 선정은 잘했다고 본다. 다만 ‘죽을 각오로 싸우는 것’과 ‘죽기 위해 싸우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영화에선 이순신이 후자의 자세로 임하고 있음을 곳곳에서 느끼게 한다. 잘못 이해하면 염세적 사생관을 가진 분으로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건 결코 아니다. 선조에게 보낸 장계에도 “죽을힘을 다하여 싸우겠다(出死力拒戰)”는 비장한 결의를 담았듯이, 그는 열악한 조건에서 적의 전진을 막고 승리하기 위해 죽을 각오로 싸웠을 따름이다. 두려움을 이기고 죽음을 극복하는 이순신의 영웅적 면모를 부각시키느라 감독이 다소 오버하지 않았나 하는 인상을 받았다.

명량에서 맞붙은 적장 구루시마(來島, 조선에선 마다시(馬多時)로 알려진 인물)는 일본에서도 물살이 가장 빠르기로 소문난 시코쿠(四國) 끄트머리인 나루토(鳴門) 해협에서 활동하던 해적 출신이다. 나루토 해협은 ‘명량’에 자주 등장하는 바다 회오리를 요즘도 볼 수 있는 곳이다(그러나 명량에선 자주 볼 수 없는 현상이다). 당포 해전에서 전사한 형에 대한 복수를 벼르던 구루시마는 해협의 급류에 누구보다 익숙한 터라 울돌목 앞바다를 만만하게 보았다. 반면에 임진왜란 1년 전까지 바다를 모르고 살았던 이순신은 매순간 매장소에서 현지 전문가들의 의견을 경청했다. 그들을 대동하고 현장을 직접 살폈다. 밤잠을 설친 채 전략전술에 골몰했다. 무기든 날씨든 지형지세든 적에게 유리한 조건과 상황에선 절대로 맞붙어 싸우지 않았다. 백척간두에 서서 모든 것을 두려워하고 모든 것을 경계하는 자와 복수심에 불타 적을 가볍게 여기고 바다를 우습게 보는 자, 그 두 지휘관의 싸움은 병력 수와 관계없이 승패가 나는 법이다.

최근 한국 사회는 또 다시 분노와 복수의 칼날 앞에 서 있는 듯하다. 리더십에 대한 신뢰가 떨어져 각종 이해관계가 날카롭게 부딪힌다. 억울한 사람들을 부추기는 이들은 많아도 참으라고, 기다리라고 말리거나 달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이순신처럼 죽기를 각오하고 내 일을 하는 사람이 인정받고 대접받는 세상은 그때나 지금이나 쉽지 않은 모양이다.

박근혜 대통령과 청와대 사람들도 ‘명량’을 보았다고 한다. 이 영화에 열광하는 일반 국민들 마음을 헤아렸을까. 이순신의 애민애국을, ‘명량’의 울음소리를 들었을까. 영화를 보며 함께 울었던 우리 국민들도 조국을 위해 내가 무엇을 했는지, 내 이웃을 위해 어떤 봉사를 했는지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을 것 같다. 오늘 우리는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대한민국은 바르게 일어서야 한다.


[특별 기고] 침몰하는 리더십, 역사에서 답을 찾자 (1) - 클릭

■ 김형오 전 국회의장 프로필

1947년생(67세) 경남 고성 출생- 경남고, 서울대 외교학과, 정치학박사(경남대)- 14, 15, 16, 17, 18대 국회의원(부산 영도구)-한나라당 원내대표, 국회의장-부산대 석좌교수(현)


저작권자 © 데일리한국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