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의원, 박원순 서울시장, 안철수 전 대표(왼쪽부터)
“요즘 여의도에 가보면 여기저기 깎인 뼈들이 수북이 쌓여 있다. 정치인들이 깎아 놓은 것들인데, 뼈를 깎은 뒤 뭐가 달라졌는지는 잘 모르겠다."

야당의 한 중진 의원이 7.30 재보선의 야당 참패 원인을 분석하면서 꺼낸 뼈있는 농담이다. 야당이 선거에 진 뒤 매번 ‘뼈를 깎는 쇄신’을 한다고 외쳤지만 진짜 쇄신이 이뤄진 것은 없다는 뜻이다. 맞는 얘기다. 새정치민주연합(과거엔 민주당)은 선거에 지면 지도부 사퇴-비상대책위 전환-쇄신기구 구성-새 지도부 출범 등의 똑같은 트랙을 밟아 왔다. 신장개업을 하기도 했지만 ‘도로 민주당’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김광덕 인터넷한국일보 상무 겸 뉴스본부장
야당의 재보선 패인에 대해 여러 갈래의 분석이 쏟아지고 있다. ‘시대 변화를 읽지 못했다’ '민심과 동떨어진 그들만의 새정치였다’ ‘진화를 멈춘 갈라파고스 야당이었다’ ‘전략공천에서 실패했다’ ‘계파 싸움과 운동권 패권주의가 문제였다’ ‘정권심판만 외치고 대안 제시가 없었다’

보수와 진보 성향의 신문들이 진단한 야당의 문제점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나하나 다 맞는 얘기다. 하지만 근본적인 ‘야당 병(病)’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보다 심층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2012년 총선 이후 2년 반 동안 치러진 선거에서 야권이 이긴 적이 없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로 민심 이반이 심각하게 나타난 지난 6월 지방선거에서 비겼을 뿐이다. 이길 수 있는 선거에서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수술해야 할 야당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일까. 몇 사람의 전문가들과 토론한 결과 그들의 답은 두 가지로 요약됐다. 우선 인물이 없다는 것이다.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큰 지도자가 없을 뿐 아니라 국회의원 선거 등에 내세울 만한 후보감이 적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여당의 실수에만 기대려 했지 비전 제시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새정치’ 깃발을 들었지만 포장 속 내용물은 찾아볼 수 없다는 뜻이다.

암같은 불치병이 있으니 새정치연합이 2016년 총선과 , 2017년 대선에서 승리를 기약하기 어렵다는 얘기도 당 안팎에서 나온다. “운동장이 보수 쪽으로 기울어져 야당이 어렵다”는 얘기도 보태진다. 그러나 다음 선거 승부를 단순히 예단해선 안된다. 여전히 선거의 '시계추 현상'이 적용될 수 있다. 한 번 큰 선거에서 이긴 정당이 다음 큰 선거에서 불리해진다는 현상이다. 그동안 시계추 현상이 지켜지지 않은 것은 새정치연합이 너무 무기력하게 대처해왔기 때문이다.

이번 재보선 이후에 진짜 혁신하고 낮은 자세로 준비하는 쪽이 다음 선거에서 이길 수 있다. 이번에 상대 정당의 실패로 반사이익을 얻은 여당은 진정으로 달라지는 모습을 보일 경우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번 승리에 도취해 국가와 당 개조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오히려 2016년 4월 총선에서 위기를 맞을 수 있다. 야당도 마찬가지다. 과거처럼 여전히 집안 싸움만 하고 국정운영에 뒷다리를 거는 역할만 한다면 희망이 전혀 없다. 오히려 위기 속에서 철저히 반성하고 거듭난다면 새로운 기회를 찾을 수 있다. 현재 새정치연합의 국회 의석은 총 300석 중 130석으로 적지 않은 편이므로 기본 장비는 갖추고 있는 셈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야당 총재를 하던 시절에는 야당 의석이 100석 전후에 불과했다.

그러면 야당이 수권 정당으로 거듭나기 위해 해야 할 첫째 과제는 무엇일까. 당을 이끌어갈 큰 지도자, 즉 큰바위얼굴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너새니얼 호손이 쓴 단편소설 ‘큰바위얼굴’에서 어니스트란 소년은 어머니로부터 바위 언덕에 새겨진 큰바위얼굴을 닮은 아이가 태어나 큰 인물이 될 것이란 전설을 듣는다. 큰바위얼굴은 당을 힘있게 이끌어갈 수 있는 리더십을 갖고 국민들에게 희망이 될 수 있는 인물을 뜻한다.

우리 야당사에서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은 큰바위얼굴이었다. 하지만 두 지도자가 잇따라 서거한 뒤 야권은 계파 싸움으로 바람 잘 날이 없다. 현재 야권에는 문재인 의원, 박원순 서울시장, 안철수 의원 등이 있지만 이들이 큰바위얼굴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이들 세 사람이나 다른 정치인들 중에서 큰바위얼굴이 나와야 한다. 야권의 중진, 신인들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영웅을 만들어내야 한다. 위기와 난국이 영웅을 만든다고 한다. 영국 보수당의 장기집권이 계속되던 1994년, 야당인 노동당의 존 스미스 총재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을 때 혜성처럼 등장한 젊은 지도자가 토니 블레어였다. 결국 블레어는 10년 동안 총리로 집권하면서 영국을 변화시켰다. 미국의 첫 흑인 대통령인 버락 오바마도 위기 속에서 떠오른 지도자이다.

새정치연합이 존폐 기로에 놓인 지금이야말로 새 지도자가 떠오를 수 있는 기회이다. 꿈을 가진 많은 정치인들이 감동적인 비전을 제시하면서 새로운 당 지도자가 되기 위한 경쟁을 벌였으면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큰바위얼굴을 중심으로 당이 새로운 비전과 정책 대안를 내놓아야 한다. 또 이런 분위기 속에서 국회의원선거나 지방선거에 출마할 수 있는, 좋은 인재들을 키워가야 한다. 지금과 같은 계파 싸움 구조에서는 좋은 인물들을 영입하거나 만들어낼 수 없다. 계파 싸움 구조는 큰 인물로 커가는 싹들을 밟아버리곤 했다.

결국 큰바위얼굴을 만들어내고, 그를 중심으로 새 인물들을 키우고 비전을 개발하는 방식으로 가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많은 정치인들이 용기를 갖고 도전해야 한다. 또 경쟁 방식은 철저하게 개방적이고 민주적이어야 한다. 당원들이 계파 논리에 따라 투표하는 행태를 추방해야 한다. 야권의 큰바위얼굴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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