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연합뉴스TV 방송화면 캡처
웬디 셔먼 미국 국무부 정무차관이 과거사와 관련해 일본을 두둔하는 듯한 발언을 한 것을 놓고 외교적 파장이 커지고 있다. 셔먼 차관은 지난달 27일 워싱턴DC의 카네기 국제평화연구소 세미나 기조연설에서 "정치 지도자가 과거의 적을 비난함으로써 값싼 박수를 얻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이 같은 도발은 진전이 아니라 마비를 초래한다"고 말했다.그는 또 "스스로 만든 역사의 덫에 갇히는 국가의 위험스러운 이야기를 멀리서 살펴볼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이같은 언급은 역사 문제를 놓고 일본 정부를 비판하는 박근혜 대통령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을 겨냥한 것으로 풀이된다.

일단 우리 정부는 곤혹스러운 표정 속에 과거사 문제 등과 관련한 워싱턴의 기조가 변하지는 않았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과거 교훈을 거울 삼아 상처를 치유하고 미래지향적인 협력 관계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 미국의 기본 입장으로 셔먼 차관의 발언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라는 게 우리 정부의 설명이다. 조태용 외교부 1차관은 2일 국회에서 "셔먼 차관의 발언에 대해 가볍지 않게 보고 있다. 엄중함을 갖고 이 문제를 다루도록 하겠다"면서도 "미측에서 (한일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 과거에 밝혀온 입장에서 변화가 없다는 것을 1차적으로 확인했다"고 말했다.

정부 내에서는 셔먼 차관의 발언이 특정 국가를 겨냥했다면 그 나라는 중국으로 봐야 한다는 말도 나온다. 한미일 3각 동맹을 통해 중국을 견제하는 미국의 외교 구상을 감안할 때 한중 양국을 싸잡아 비난하는 것은 미국의 이익에도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있기 때문이다. 한중이 과거사를 토대로 대(對)일본 공조를 하는 것이 미국이 우려하는 시나리오인데 한중을 동급으로 놓고 말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셔먼 차관의 발언만 놓고 보면 이전보다 더 나간 측면이 있다는 게 대체적 평가다. 존 케리 국무부 장관도 지난해 2월 방한 때 "한일이 역사를 극복하고 관계를 진전시키는 것이 좋다"고 말하는 등 미국은 그동안 한일관계와 관련해 '미래'를 강조하는 태도를 보이기는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일본에 대해 과거사 문제 해결을 촉구하고 올바른 역사의식을 요구하는 것을 사실상 '도발'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발언 강도가 다르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런 발언은 한일관계 개선을 올해 우선순위 정책으로 추진하고 있는 미국의 입장에 따른 것으로 분석된다.

이에 따라 일각에서는 이번 셔먼 발언이 과거사 문제와 관련한 한중 간 공조 조짐에 분명한 선을 긋기 위해 한국에 신호를 보낸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또 우리 정부가 그동안 미국에 과거사 문제의 중요성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으며, 이번 상황도 안이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이와 함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 배치 결정을 놓고 주저하고 있는 한국에 대한 우회적인 압박성 발언이란 해석도 있다.

셔먼 차관의 발언은 한일관계 개선에도 악재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도쿄를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힘을 가진 것으로 평가되는 미국에서 일본을 두둔하는 듯한 발언이 나오면서 과거사 문제에 대한 일본의 태도 변화를 기대하기 더 어려워졌다는 이유에서다. 미국이 앞으로 보이는 태도에 따라 과거사 핵심 현안인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논의 동력도 더 떨어질 가능성도 있다. 이에 대해 우리 정부 소식통은 "미국도 역사 문제를 풀지 않고는 한일관계가 안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면서 "역사 문제에 대한 미국의 접근 방식이 바뀐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저작권자 © 데일리한국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