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아산병원 신규 간호사 자살에 간호사 '태움' 논란

간호사 10명 중 7명 근로기준관련 인권침해 경험

노동조건·업무시스템 개선 촉구 목소리 커져

사진=유토이미지
[데일리한국 고은결 기자] 서울아산병원에 입사한 지 불과 반 년밖에 되지 않은 20대 신규 간호사가 투신자살하는 사건이 불거진 가운데, 숨진 간호사가 '태움문화'로 인해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지난 15일 오전 서울아산병원 소속 간호사 박모씨는 송파구의 한 아파트 화단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자신이 박씨의 남자친구라고 밝힌 한 남성은 간호사 온라인 익명 게시판에 글을 올려 "여자친구의 죽음이 그저 개인적인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간호사 윗선에서는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태움'이라는 것이 여자친구를 벼랑 끝으로 몰아간 요소 중 하나"라고 주장했다.

간호사 '태움'은 '영혼이 재가 될 때까지 태운다'는 뜻으로, 선배 간호사가 신임 간호사를 호되게 혼내며 가르치는 방식을 말한다. 이같은 태움문화는 교육이라는 미명 하에 이뤄지는 악질적 관행이라는게 일선 종사자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고함을 치거나 폭언하고, 험담이나 안 좋은 소문을 내고 굴욕을 느끼게 해 신체적·심리적 고통을 주는 엄연한 '괴롭힘'이라는 설명이다.

간호사 태움문화 논쟁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SNS 상에서는 '나도 태움을 겪었다'는 '미투(Me-too)' 제보가 이어지고 있다. 한 누리꾼은 자신이 모 대학병원에서 심한 태움으로 인해 결국 사직하게 됐다면서 "교육이라는 명목의 태움을 신규 간호사들이 어떻게 버티고 있는 걸까"라고 지적했다. 한 간호대학생은 "간호사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 대학을 왔는데 '태움'이라는 단어 앞에서 취업이 두렵고 괴로워진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간호사 10명 중 4명 "동료·의사로부터 괴롭힘 당해"

20일 대한간호협회가 발표한 '대한간호협회 인권침해 실태조사 1차 분석결과'에 따르면 간호사 10명 중 7명은 병원에서 근로기준관련 인권침해를 당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10명 중 4명 이상은 동료 간호사나 의사로부터 괴롭힘을 당한 경험이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대한간호협회는 보건복지부와 함께 간호사 인권침해 행위 등 유사 사례 발생에 대한 현황 파악을 위해 지난해 12월 28일부터 해당 조사를 실시했다. 이번 조사 결과는 지난 1월 23일까지 설문에 참여한 7275명의 설문 내용을 분석한 내용이다.

설문에 응답한 대부분의 간호사는 근로기준법, 남녀고용차별, 일·가정 양립 등 노동관계법과 관련해 인권침해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근로기준법 상 근로조건 관련 내용 위반에 따라 인권침해를 경험한 적이 있냐는 질문에 대해 '그렇다'고 대답한 사람은 69.5%였다.

특히, 지난 12개월 동안 직장에서 괴롭힘을 당한 적이 있냐고 물었을 때 '예'라고 응답한 이들은 40.9%에 달했다. 가장 최근에 괴롭힘을 가한 가해자가 누구냐는 질문에는 직속상관인 간호사 및 프리셉터(선배 간호사)가 30.2%로 가장 많았고, 동료간호사가 27.1%, 간호부서장이 13.3%, 의사가 8.3% 순으로 집계됐다. 괴롭힘의 구체적 사례로는 '고함을 치거나 폭언하는 경우'가 1866건으로 가장 많았고, '본인에 대한 험담이나 안 좋은 소문'이 1399건, '일과 관련해 굴욕 또는 비웃음거리가 되는 경우'가 1324건 등으로 뒤를 이었다.

대한간호협회 측은 "'간호사 인권침해 실태조사'와 함께 진행한 침해신고에 1월 7일까지 접수한 내용 가운데 노동관계법 위반가능성이 있는 내용과 직장 내 괴롭힘 내용을 113건을 정리해 지난 2월 5일 보건복지부를 거쳐 13일에는 고동노동부에 접수했다"며 "노동관계법을 위반한 신고 건에 대해서는 향후 구제절차를 진행하고 이를 통해 노동관계법과 관련한 인권침해를 근절해 나가겠다"고 전했다.

◇간호사 처우개선 호소 목소리 커져

이처럼 고질적인 태움문화의 일차적 원인으로는 인력난이 꼽힌다. 허덕이는 간호인력과 열악한 처우 등으로 신규 배치되는 간호사는 물론 선임 간호사 또한 큰 부담을 느끼며 악순환이 이어진다는 지적이다. 생명을 다루므로 한치의 실수도 용인되지 않는 분위기, 혹독한 근무환경 등으로 암암리에 묵인된 '태움'이 도리어 간호사의 병원 이탈 현상을 가속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대한간호협회에 따르면 국내 간호사의 평균 근속 연수는 5.4년에 불과하고 신규 간호사의 이직률은 33.9%에 달한다.

간호사 태움문화 개선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도 간호사들의 인력 확보, 처우 개선을 촉구하는 관련 청원이 속속 올라오고 있다. 청원 인원이 2만명을 넘어선 '문재인 대통령님 간호사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말아주세요'라는 청원글의 게시자는 "현재 국내 최고 병원에서도 충분한 간호사 인력이 확보돼 있지 않다"며 "중환자실에서 간호사 1명당 1명의 환자만 담당하게 해달라"고 호소했다.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 또한 19일 성명을 통해 간호사의 노동조건 개선 등을 강력 촉구했다. 보건의료노조는 "신규간호사를 죽음으로 내몬 직무스트레스와 긴 노동시간, 과도한 업무량, 열악한 노동조건과 조직문화는 전체 의료기관에 만연해 있다"며 "획기적인 노동조건 개선과 업무시스템 개선, 조직문화 개선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보건의료노조는 작년 12월부터 올해 1월까지 진행한 '의료기관 내 갑질문화와 인권유린 실태조사' 결과를 분석해 대책을 마련하며, 간호사 노동조건·병원 내 조직문화 개선을 위한 전조직적 운동을 선포하고 본격 추진한다는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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