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세살 소년·여성도 동원…무일푼 노역 중 숨지고 생존자도 후유증

(서귀포=연합뉴스) 박지호 기자 =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알뜨르의 모습. 평화롭고 아름다워 보이기만 하는 이곳은 일본강점기 강제노역을 한 도민들의 피와 절규가 서려 있다. 일제 군비행기를 놔두는 격납고 시설도 보인다. 2017.8.14 jihopark@yna.co.kr
"강제징용돼 흙 운반 일을 하다가 도로꼬(궤도차)에 깔려 다치거나 죽은 사람도 있다."

"일을 못 하면 감태 줄거리로 구타당했어. 눈 주변을 심하게 맞아 그 충격으로 시력이 떨어졌다."

일본 제국주의 총칼이 서슬 퍼렇던 1944년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송악산 인근의 알뜨르비행장 확장 공사에 징용된 김웅길(1928년생 서귀포시 남원 출신)·김효종(〃 제주시 구좌 출신)씨의 말이다.

열여섯 어린 나이에 강제동원됐던 이들은 백발노인이 된 2007년 정부가 일제 노무·병력동원에 관한 조사를 진행하면서야 이같이 증언할 수 있었다.

정부 지원 아래 이뤄지던 강제동원 피해 역사정립 연구는 지난 10년간 끊긴 상태다.

지난달 20일 제주 사회단체들이 강제징용 노동자 상을 건립하기로 했고, 일제의 강제노역을 다룬 영화 '군함도'가 개봉해 대중의 관심을 받는 등 최근 들어 일제 강제노역 문제가 다시 제기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도 광복절 경축식에 '군함도' 생존자를 초청할 예정이다.

군함도(端島·하시마)는 일본 나가사키(長崎) 인근의 인공섬으로 1940년대 많은 조선인이 해저탄광에 끌려가 강제노동에 시달린 곳이다.

남녘 태평양을 향한 제주 섬에도 강제징용돼 굶주림 속에서 고된 노역을 한 도민들의 피와 절규가 서려 있다.

일제는 1941년 미국과의 전투에서 연패를 당하며 밀렸다. 위기감에 일본 본토 방어를 위해 제주에 방어용 군사시설물을 집중적으로 구축했다. 제주 섬을 군사 요새화하며 도민들을 대거 강제동원했다.

대정읍 알뜨르와 현재 제주국제공항인 정뜨르, 조천읍 진드르에는 군 비행장을 건립했다. 교래리 부근에도 특공대용 비행장을 세웠다.

화산체인 오름 정상에 고각포·고사기관포를 설치했고, 오름과 해안 절벽에 굴을 파 진지동굴을 구축했다.

알뜨르비행장만 60만㎡ 규모다. 땅속을 파고들어 간 기다란 진지동굴은 당시 700개가 넘게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2007년 '일제강점기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이하 진상규명위) 조사에 따르면 강제동원된 도민 중 가장 어린 나이는 열세 살이다. 남편이 아프다는 이유로 아내를 대신 끌고 간 경우도 있다.

강제동원은 마을 단위로 인원을 할당했다. 동원 인원을 채워야 했기에 나이와 성별을 가리지 않고 노역장으로 끌고 갔다.

진상규명위는 1944년 제주도 인구가 21만9천548명(가구당 평균 4.8명)으로 한 가구당 1명 이상 동원됐다면 당시 인구의 20%가량인 4만여 명이 동원 대상으로 봤다.

강제노역을 '국가 봉사작업'으로 포장, 임금도 주지 않았다. 노역은 오전 8시에 시작, 해가 떨어질 때까지 하루 10∼12시간가량 했다.

비행장에서는 군용기가 뜨고 내리는 활주로 터를 고르는 작업을 진행했다. 땅을 파거나 돌을 깨고, 흙이나 돌을 운반하는 작업 등을 했다. 암반을 발파하는 일도 맡았다.

군 막사 건축이나 격납고 조성 작업, 재목 정리, 참호파기 등도 도민 강제동원자들의 몫이다.

오름 정상에서는 건축자재를 날라 고사포대를 만드는 데 동원됐다.

해안 절벽이나 오름을 파낸 진지동굴 조성도 고된 노역이었다.

진지동굴은 크게 일(ㅡ)자형, ㄷ자형, 왕(王)자형, 격자형(ㅁ자형), 수직 미로 형태 등으로 건설됐다.

사령부나 중대본부 이상이 동굴에 숨을 정도로 큰 규모다.

도민들은 굴 파기, 통발 작업, 통나무운반, 수로 조성 작업 등 모든 작업을 일일이 손으로 수행해야만 했다. 곡괭이 한 자루를 들고 맨몸으로 투입됐다.

식사는 콩밥이나 보리밥이 전부였다. 숙소도 열악해 막사에서 생활하다 보니 질병 감염 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태정(1920년생 제주시 조천 출신)씨는 스물한 살이던 1941년에 정뜨르 비행장 건설에 동원됐다가 발을 다쳤다.

그는 "부상으로 일을 잠깐 쉬어야겠다고 하니, 아내를 대신 데리고 가 나흘 동안 일을 시켰다"고 증언했다.

해안 갱도 조성에 동원됐던 다른 지역 광부 120여 명은 해방 후인 1945년 8월 20일 귀환하다 전남 해역에서 배가 침몰해 전원이 숨지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강제동원 피해에서 벗어나 생존했더라도 상당수가 부상으로 평생 후유증을 앓고 살았다.

제주대 탐라문화연구소는 2008년 일제 강제동원 피해 신고자 2천784명 중 544명(19.5%)이 후유장해를 앓다 사망하거나 앓고 있는 것으로 조사했다.

강제동원자 가운데 조선인 징병 1기 출신인 허찬부(1924년생 서귀포 출신)씨는 1945년 초 한라산 어승생오름 진지동굴 구축에 동원됐다.

그는 갱도 천장 흙이 무너지면서 이마와 손가락을 다쳤다. 그때 깊은 상처로 인해 평생 통증을 느끼며 살아야 했다.

2007년 피해자 구술을 채록한 지영임 대구가톨릭대 다문화연구소 연구원은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마을 면장 등 같은 조선인이 시켜서 강제동원됐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 뒤에 숨은 식민지 정책을 모르는 경우가 있다"면서 "일제의 강제동원 정책에 대해 추가적이고 체계적으로 입증하는 연구가 계속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런 연구가 있어야만 희생자 선정 기준을 마련하고 유적지에 대한 보존과 콘텐츠화가 체계적으로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제주=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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