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코올 중독자 원고 "알코올 중독 피해 배상하라"

피고 측 "술의 위해성,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 치열한 법적 공방

"'100% 천연원료 참이슬' 광고의 진실 가릴 것"

■ "술이 간을 손상시키고 중독 위험이 있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회적 상식이다."

2014년 12월 22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는 다소 이색적인 재판이 열렸다. 술로 인한 피해에 대해 국가 및 주류회사가 손해 배상을 해야 한다고 알코올 중독자들이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액면 그대로 보면 원고 측 주장이 억지스럽고 무리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든다. 술은 거의 전 국민이 접하고 사는 것인데 특정 중독자들에게 국가와 주류회사가 거액을 물어줘야 한다니…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이런 사회적 통념을 바탕으로 주류업체 측 변호사는 변론을 시작했다.

사진=이규연 기자 fit@hankooki.com

"술이 간을 손상시키고 중독 위험이 있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회적 상식입니다. 원고 측이 과연 손해배상을 청구할 권한이 있는지부터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알코올 중독자 27명이 국가 및 주류회사 등을 상대로 제기한 집단 손해배상 소송의 첫 번째 재판에서 한국주류산업협회(이하 주류협회) 측 변호사는 이와 같이 변론했다. 변호인은 "술은 단순히 알코올을 전달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라면서 "이미 사회·문화적으로 널리 수용되고 있다"고 말했다. 재판장 뒤로는 술로 인해 적게는 다섯 차례, 많게는 수십 차례까지 병원을 들락거린 원고들이 앉아 변호인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피고는 대한민국, 국민건강보험공단, 주류협회, 하이트진로, 무학, 한국알코올산업 등 주류를 제조 유통하거나 그 과정을 관리하는 정부 당국 등이었다.

사진=이민형 기자

■ "손해배상을 청구할 권한이 있는지부터 의문입니다."

피고 측의 다른 변호사는 소송 자체가 성립이 되는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이미 정부는 국민건강증진법을 통해 음주 폐해에 대한 경고성 문구를 표시하도록 하고 있고, 주류 광고에도 엄격한 제한을 두고 있는데 알코올로 인한 손해를 배상하라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주장이었다. 이 변호사는 또 이미 정부는 중독관리통합지원센터를 비롯해 음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책들을 추진하고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여기에 국민건강보험공단 측 변호사는 "현행 법규상 알코올 소비나 판매를 규제해야 하는 의무나 책무가 없다"고도 했다.

이들 피고 측 변호인들은 술의 유해성에 대해 국가와 제조업체에서 제대로 알리지 않아 피해를 입었다는 원고 측 주장에 대해 마치 술을 제조하는 업체만 알코올의 유해성을 알고 있고 일반 사람들은 전혀 모른다는 취지의 주장은 옳지 않다고 반박하는 데 중점을 뒀다. 원고의 주장처럼 술이 나쁘다는 것을 알려야 일반 사람들이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잠자코 이를 지켜보던 원고 측의 한 알코올 중독자는 천천히 재판장 앞으로 나가 변호사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이어 원고 측 변호사는 증거를 제출하는 프로젝터 위로 소주 광고 하나를 띄웠다. 화면을 가득 메운 광고 글귀는 '100% 천연원료 참이슬', '식물성 천연 첨가물', '대나무 숲 자연주의 정제'였다. 소주 광고인지 모른 채 문구를 봤다면 친환경 유기농 식품을 선전하는 것으로 오해할 만한 것들이었다. 객석이 잠시 술렁였다.

원고 측 변호사가 증거 제출 프로젝터 위로 띄운 소주 광고. 사진=이민형 기자

이에 원고 측 변호사가 일어나 발언을 이어갔다. 그는 "주류회사들은 알코올 유해성에 관한 경고보다 오히려 인체에 유해하지 않다는 취지의 광고를 하고 있다"며 "천연원료를 사용했다는 소주 광고는 마치 건강에 이로운 것처럼 오해할 수 있는 소지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주류회사들의 광고 문구처럼 정말 소주가 100% 천연원료인지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측에 성분 분석을 의뢰하고, 이를 증거로 채택할 것을 재판장에게 요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원고 측은 '지나친 음주가 간경화나 간암을 일으킨다'고 시작하는 추상적인 경고 문구에도 이의를 제기했다. '지나친'이라는 모호한 표현 대신, 마셔도 인체에 해가 없는 적정 표준 음주량 기준으로 구체적으로 표기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예를 들면 '소주 몇 잔' 식으로 객관적 수치를 제시해 소비자들이 적정 음주량을 알고 술을 마시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원고 측 변호를 맡은 남희웅 변호사. 사진=이민형 기자

이에 대해 피고 변호인 측은 "적정 음주량은 있을 수 없다. 음주량은 사람마다 달라 일반화하기 어렵기 때문에 청구 취지가 명확하지 않다"면서도 "다만 경고 문구를 일부 수정할 수는 있다"고 말했다. 원고 측이 피고를 대상으로 음주 관련 재단의 후원금 지원을 계속하고 주류와 관련한 광고를 과감히 줄이고 미화하는 문구 등을 삭제해달라고 주장한 이번 재판의 1차 공방은 이렇게 끝났다. 다음 재판은 3월 초로 예정돼 있다. 이번 알코올 중독자들이 국가 및 주류회사 등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은 세계적으로도 유래가 없다. 미국이나 일본 등 주요 국가에서 이번 재판을 주목하는 이유다. 재판 결과에 따라 자국 내에서도 유사한 소송이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 원고와 피고의 설전, 누가 무리한 주장을 하고 있을까?

물론 국내에서는 알코올 중독 피해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 2004년과 2005년에도 비슷한 내용의 소송이 진행됐다가 중간에 취하됐다. 피고 측의 알코올 중독 치료를 위한 기관에 일정 부분 지원금을 내겠다는 약속으로 원고 측이 스스로 소송을 거둬들였다. 그러나 이번은 재판장의 선고까지 이어질지 아직은 알 수 없다.

이날 재판을 지켜본 김진(58·남) 씨는 과거 소송에도 동참한 이력이 있다. 김 씨는 "당시 주류회사 관계자가 찾아와 알코올 문제 해결을 위해 일정 지원금을 주겠다는 각서를 제출했기 때문에 소송을 취하한 것"이라고 당시의 소송 취하 이유를 밝혔다. 실제 과거 몇 년 동안 주류협회는 한국음주문화연구센터(KARF·카프) 측에 매년 50억 원의 출연금을 지원했다. 카프는 알코올 중독자들을 전문적으로 치료·예방·재활까지 담당하는 국내 유일의 연구 재단이다.

원고 측 변호를 맡은 남희웅(왼쪽) 변호사와 이번 소송을 제기한 알코올 중독자 대표 김진 씨가 서울 서초동 사무실에서 소송 관련 내용을 논의하고 있다. 사진=이민형 기자

하지만 2011년 주류협회는 돌연 카프재단의 지원을 끊었다. 주류업의 사업성이 떨어졌다는 이유였다. 이에 대한 여파로 2004년 세워져 주류협회 출연금으로 운영되던 카프병원은 재정난에 시달려야 했다. 결국 병원은 환자를 줄여나갈 수밖에 없었다. 김남문 카프재단 이사장(주류협회장 겸임)은 "순수한 열정으로 카프를 세웠으나 인건비가 매년 40억 원에 이르고 적자가 해마다 8억 원이나 생기는 등 재무 구조가 좋지 않아 병원 사업을 중단해야 했다"고 밝혔다.

서울 마포구 연남동에 위치한 남성 알코올 중독자 사회복귀시설 '감나무집'. 해당 시설은 카프재단의 지원금으로 운영돼 왔지만 2013년부터 재단 지원이 갑작스럽게 끊기면서 치료 프로그램 운영에 차질을 빚고 있다. 사진=이민형 기자

이렇듯 이번 소송은 카프재단 위기와 연관성이 깊다. 23세부터 알코올 중독 치료를 받아왔다는 원고 측의 한 알코올 중독자는 "카프재단이 병원 사업을 중단한 것은 알코올 중독자들이 술에서 벗어날 수 유일한 둥지를 없앤 것"이라면서 "알코올 중독자들이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도와 달라고 호소하기 위해 소송을 추진했다"고 밝혔다. 그는 "나는 알코올 중독에 빠진 뒤 치료를 반복하고 다시 재발하는 과정을 겪은 사람"이라면서 "그 과정에서 사회의 예방적 조치나 사후적 조치가 얼마나 미흡한지 절실히 깨닫게 됐다"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 알코올 중독자들이 소송을 통해 말하고 싶은 바는 예방 차원에서 구체적인 경고 문구나 광고 제한 등을 통해 술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고, 이미 알코올 중독에 빠진 사람들에 대해서는 카프 방식의 재단을 주류 제조업체와 국가가 나서 만들어 도와야 한다는 것"이라고도 했다. 원고 측은 현재 소송이 끝날 때까지라도 술을 팔면 안된다고 알코올 판매금지 가처분까지 낸 상태다. 물론 가처분 인용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것을 원고 측 변호사나 당사자들도 충분히 예상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과정을 통해서라도 알코올에 대한 폐해와 관련해 사회에 경종을 울리겠다는 생각이다.

사진=이민형 기자

이번 소송에 대해 알코올 문제 전문가나 관련 기관 종사자들은 "감정적으로는 그 심정이나 취지를 어느 정도 공감한다"고 말한다. 이해국 의정부성모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우리나라는 술에 대해서는 관대하면서도 알코올 중독에 있어 사회적 비난은 상당히 높기 때문에 알코올 중독자들이 겪는 고통은 상당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무리가 있는 소송으로 비춰질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물론 정부의 음주 정책도 미흡하고 예산도 부족하지만 이런 식의 감정적 대처가 아닌 전략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중독포럼 상임연구위원을 맡고 있는 이해국 교수. 사진=이민형 기자

주류에 표기된 경고 문구에서 적정 음주량을 구체적으로 밝히라는 원고 측 주장에 대해 전문가들은 전반적으로 동의하는 분위기다. 이무형 다사랑중앙병원 원장은 "피고 측 주장처럼 개인의 음주량은 다르기 때문에 일반화가 어려울 수 있다"면서 "그렇다면 굳이 일반화할 필요 없이 술이 가장 약한 사람들을 기준으로 사회적 주량을 정하면 된다"고 말한다. 원고 측에 따르면 실제 호주를 비롯한 일부 선진국들은 주류에 적정 음주량을 표기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세계보건기구(WHO)도 하루 알코올 섭취량이 40g(소주 4잔) 이상인 남성과 20g(소주 2잔) 이상인 여성을 위험 음주자로 간주하고 있다.

사진=장동규 인턴기자 multimedia@hankooki.com

■ "밤 10시만 넘으면 어김없이 TV에 맥주 광고가 나와요. 드라마에서는 또 얼마나 자주 술 마시는 장면이 나오는지…"

원고 측은 단순 광고 문구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TV 등 언론 매체에 쏟아지고 있는 각종 술관련 CF도 심각한 사회적 문제라는 지적이다. 실제 김진 씨는 밤 10시가 넘으면 TV를 보는 것이 두렵다고 할 정도다. 이 때 중점적으로 방영되는 주류 광고를 보면 저절로 술 생각이 난다는 것이다. 현재 주류 광고는 TV는 오후 10시 이후 라디오는 오후 8시 이후 맥주나 와인 등 17도 미만의 주류에 한해 허용하고 있다.

사진=이혜영 기자 lhy@hankooki.com

또 드라마를 비롯한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술 마시는 장면이 자유롭게 등장한다. 시청자들이 광고뿐 아니라 방송 프로그램을 보면서도 술의 유혹에 휩싸이게 되는 것이다. 방송 심의규정 28조에 따르면 방송이 음주를 조장하거나 미화하는 것은 금지되고 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심의 관계자는 "방송 내에서 음주를 조장하는 내용은 심의하고 있지만 위험 수위에 있지는 않다고 판단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알코올 중독 전문가들은 "드라마 속 음주 장면은 스쳐 지나는 광고보다 영향력이 훨씬 크기 때문에 결코 프로그램이 음주를 미화하거나 조정하는 문제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실제 SBS 인기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에서 천송이(전지현 분)가 '치맥'(치킨과 맥주)을 좋아한다는 설정 때문에 드라마 속 '치맥'이 단골로 등장하며 국내 시청자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중국 시청자들까지 맥주잔을 붙잡게 만들었다.

이해국 교수는 "방송 중에 담배 피는 장면이 금지되면서 술을 마척?장면들이 늘었다"면서 "최근 한 케이블 드라마에서는 소주를 큰 컵에 따라 벌컥벌컥 마시는 장면이 나오던데 광고뿐 아니라 방송 프로그램 내 음주 장면에 대한 적절한 제재가 필요해 보인다"고 전했다. '국민 여동생' 아이유나 김연아가 소주 광고 모델로 발탁된 것에 대해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어린 여자 연예인이나 운동선수가 소주 광고에 나오게 되면 청소년 음주에 심각한 문제를 끼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김용진 구로중독관리센터장은 "알코올 중독은 병원 치료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면서 "사회복귀시설에서 사회성을 갖추고 궁극적으로는 병원 외래나 센터를 방문하는 식으로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단주 생활을 이어갈 수 있어야 한다"고 거듭 강조한다. 카프병원이 위기에 놓이며 이제는 치료, 재활, 사회복귀까지 일괄 담당하는 기관도 없거니와 병원과 센터, 사회복귀시설로 이어지는 연계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주취자응급의료센터를 통해 알코올 중독 문제에 조기에 개입할 수 있는 방안을 논의 중인 알코올 중독 서울시 정신보건센터의 이승연(왼쪽) 중독관리팀장과 조태현(가운데) 서울지방경찰청 생활질서과 경사. 사진=이민형 기자

전문가들은 특정 재단을 만들어 이를 통해 치료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도 방법이지만, 여의치 않다면 이미 기능을 수행하는 기관들을 제대로 연계하는 방안부터 제대로 실시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큰 돈을 들이지 않더라도 관계 당국의 관심과 의지만 있으면 수월하게 사회적 치료 효과를 높일 수 있다는 이야기다.

종합해보면 이번 재판은 알코올 중독 피해자들이 피고 측인 국가와 주류 회사들에게 자신들이 피해를 입은 것에 대한 물적 보상을 해달라는 것이 아니다. 다만 자신들과 같은 알코올로 인한 제2, 제3의 피해자가 양산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달라는 주장이다. 이는 사회적으로 커다란 비용이 소요되는 것도 아니고, 그다지 무리한 요구도 아닐 수 있다. 이번 재판을 표면적으로만 접근해서 알코올 중독자들의 억지 주장이라고 치부할 문제가 아닌 것이다.

한편으로는 알코올 중독이 어떻게 국가나 주류회사 책임이냐고 반박할 수도 있다. 틀린 말도 아니다. 하지만 주량에도 개인차가 있듯이 알코올 중독이 될 수 있는 가능성에도 저마다 차이가 있다. 따라서 사회 통념을 크게 벗어날 정도의 비용이 드는 것이 아니라면 알코올 중독을 막기 위해 관련 기관이나 회사 측에서 조금 더 신경을 쓸 필요가 있다. 이것 역시 사회통합으로 가는 작은 부분이기도 하다.

◆ 다음 뉴스펀딩(http://m.newsfund.media.daum.net/episode/432)에서도 기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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