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소주병을 다시 잡을 수밖에 없던 까닭


중독자 155만 명…사회복귀시설 전국 14개소뿐

제대로 된 치료 받지 못하고 죽음 이른 중독자

제도적·사회적 차원 지원 필요해

[데일리한국 이민형 기자] 2002년 당시 20대 후반이었던 천소연(가명) 씨는 대낮에 거리 한복판에서 술을 깨는 것이 일상일 정도로 취해 살았다. 취기가 덜 깬 몸으로 간신히 숙소인 고시원을 찾아 다시 잠을 청해야 했고 잠에서 깨면 그제서야 정신이 들며 자괴감에 휩싸이곤 했다. 술꾼인 아버지에게 그토록 넌더리를 쳤으면서도 본인이 술독에 빠져 살고 있다는 게 견딜 수 없었다. 그러면 다시 옆에 놓인 소주병을 집어 들었다.

사진=김진욱 인턴기자 multi@hankooki.com

천 씨는 알코올 중독 치료를 받아볼 생각조차 못했다. 치료비 때문이었다. 결국 그녀는 고시원에서 그렇게 생을 마감했다. 천 씨는 결국 돈이 없어서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렀지만 그런 천 씨 사건을 계기로 2004년 국내에 알코올 중독자들을 위한 여성 전용 무료 시설이 세워졌다. 바로 서울 강동구 천호3동에 위치한 '행복을 만드는 집'(행집)이다. 행집은 다세대 주택들 사이에 있어 밖에서 보면 일반 가정집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10명 안팎의 여성 중독자들이 같이 살며 술 없이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국내 최초의 여성 알코올 중독자 사회복귀시설이다.

이레지나 행집 시설장. 사진=이민형 기자

2004년부터 11년째 행집을 운영 중인 이레지나 시설장은 "천 씨를 처음 만나고 여성 중독자들을 위한 공간이 필요하다고 느껴 이 일을 시작했다"면서 "제2, 제3의 천 씨가 양산되는 일들을 막기 위해 시설을 유지하고 있다"고 전했다. 전국에 알코올 중독자들을 위한 사회복귀시설은 14개소뿐이다. 이 중 8곳은 24시간 이용 가능하며 거주할 수 있는 시설이지만 나머지 6곳은 시설 이용자들이 출·퇴근 하는 식으로 낮에만 운영된다.

여성 알코올 중독자들의 사회복귀시설은 행집을 포함해 전국에 딱 2곳뿐이다. 제 2의 천 씨 사건을 막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남성 거주시설도 전국 6곳에 불과하다. 그마저도 한 곳은 올 봄 이후 주간만 운영하는 식으로 변경될 예정이다. 현재 국내 알코올 중독자가 155만 명으로 추정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너무나 열악한 수준이다.

식탁에 모여 앉아 저녁 식사를 하고 있는 입소자들. 사진=이민형 기자

행집 등을 비롯한 알코올 중독자 거주시설에 입소한 이들은 한 달에 20여만 원을 내고 같이 생활한다. 청소부터 빨래, 식사까지 역할을 분담해 본인들이 직접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중독자들의 하루는 보통 아침 7시부터 시작된다. 기상 후 동네 골목부터 방까지 청소를 하고 식사 당번은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것이 첫 번째 일과다.

직접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입소자와 자원봉사자. 사진=이민형 기자

식사는 오전 9시, 오후 1시와 오후 6시로 정해져 있다. 아침 세미나와 저녁 회의를 통해 하루 일과를 나누고 명상하는 것은 매일 같이 이뤄지는 주요 프로그램이다. 낮에는 상담이나 인문학 강의, 미술, 요가와 운동을 통한 치료 프로그램이 이어지고 저녁에는 각자의 AA(Alcoholics Anonymous·익명의 알코올 중독자) 모임에 참석한다. 자신의 단주일을 기록하고 감정 일지를 쓰는 것으로 일과를 마무리하고 11시쯤 잠자리에 든다. 한 시설 당 사회복지사 2~3명이 중독자들의 재활을 돕는다.

음악 프로그램에 열중하고 있는 입소자들의 모습.

알코올 중독자 거주시설은 대체적으로 일반 가정집과 비슷한 분위기다. 행집의 경우 2층짜리 주택으로 1층에서는 직원들이 생활하고 입소자들은 2층의 방 3개를 나눠 한 방에 2~3명씩 거주한다. 지하실에서는 각종 행사나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전체 수용인원은 시설마다 다르지만 보통은 20명 안팎으로 출입은 자유롭다. 입소할 때는 의사의 알코올 의존 진단명이 있어야 하고 본인도 동의해야 한다. 보통 이미 수차례 병원을 들락거렸지만 차도가 없어 가족이나 본인조차 치료에 지친 중독자들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들어오는 경우가 많다.

일반 주택가 사이에 위치한 알코올 중독자 사회복귀시설 전경. 사진=이민형 기자

사회복귀시설의 목적은 일반 가정과 비슷한 환경에서 다른 사람과 같이 생활하며 일상의 행복을 알아가는 식으로 자연스럽게 술을 멀리하게 만드는 것이다. 남성 알코올 중독자 시설도 행집과 비슷한 방식으로 운영된다. 서울시 마포구 연남동에서 남성 알코올 중독자 거주시설 '감나무집'(감집)을 운영하는 이천근 시설장은 "알코올 중독은 신체와 정신 등 인간의 총체적 기능이 전부 부실해져 왜 사는지 모르는 지경까지 오게 되는 것"이라며 "이 같은 정신적 기능을 개선시키는데 역점을 두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천근 감집 시설장. 사진=이민형 기자

국내에서는 알코올 중독 문제가 발생하면 병원에 입원해 치료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입원비는 전문 병원의 경우 한 달에 100만 원이 넘을 정도로 비싼 편이다. 일반적으로 경제적 능력을 상실한 알코올 중독자들에게는 엄두가 나지 않는 금액이다. 실제 병원비를 걱정해 중독 치료 자체를 거부하거나 퇴원을 서두르는 일도 다반사이다.

사진=이규연 기자 fit@hankooki.com

병원에서는 약물 치료와 교육이 병행된다. 술로 인해 망가진 간과 뇌를 약물로 회복시키고 경우에 따라 우울증 약을 복용하기도 한다. 전문가들은 약물 치료보다 교육이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이무형 다사랑중앙병원 원장은 "알코올 중독 치료의 중심은 변화"라면서 "술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고, 술을 찾게 만드는 자기 연민이나 부정 등 방어기제를 깨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병원에 입원하면 보통 관리 병동에 들어가 해독 치료가 이뤄진다. 술을 접할 수 없도록 출입을 제한시키고 술로 손상된 몸과 마음을 회복시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문제를 인정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한데, 병원 측에서는 보통 1개월 정도가 소요된다고 말한다.

사진=이규연 기자 fit@hankooki.com

하지만 병원의 치료는 몸 상태를 다시 정상으로 만드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때문에 알코올 중독 환자가 스스로 술을 끊겠다는 의지가 없으면 병원을 퇴원해도 곧바로 술을 접하는 경우가 많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정신과 적정성 평가에 따르면 퇴원 후 7일 이내에 재입원한 알코올 장애 환자 비율은 29.1%에 이른다고 한다. 퇴원한 환자 10명 중에 3명이 1주일도 안 돼 다시 알코올 문제로 입원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이계성 명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진료과장은 "알코올 중독은 만성 질환이기 때문에 직업과 교육, 주거 등 사회적인 기본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으면 병원 치료를 통해 몸 상태가 좋아져 퇴원을 해도 술을 마셔야만 했던 환경이 반복되기 때문에 쉽게 재발한다"면서 "병원 입원 위주의 치료 시스템에서 벗어나 사회 속에서 중독자들이 살아갈 방법을 찾고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설명한다.

동네 골목에 쌓인 눈을 치우고 있는 입소자들.

전문가들은 알코올 중독 치료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사회적 기능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환자들이 사회와 정서적으로 교감하지 못하면서 술에 의존하고 술을 통해 세상과 대화하려다 보니 중독 증세가 점점 심화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와 정서적으로 교감하는 법을 배워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감집의 이천근 시설장은 "알코올 중독자들은 보통 삶에 대한 자신감을 잃었기 때문에 처음 시설에 들어와 사람을 마주하는 것부터 어려워한다"면서 "그러나 시설 안에서 청소나 요리, 빨래 등 본인에게 주어진 단순한 업무를 처리하고, 타인과 대화를 하기 시작하면서 자존감을 회복하고 변화가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실제 이 같은 시설의 교육을 통해 알코올 중독에서 헤어 나온 경우도 드물지 않다. 심각한 중증 환자였던 임수정(37·가명) 씨는 오랜 시간 행집에 거주하며 술을 완전히 끊고 이제는 어엿한 사회복지사가 됐다. 완벽한 제 2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아이들을 팽개치고 술을 마시다 이혼 위기에 놓였던 김선영(43·가명) 씨도 몇 차례 병원 치료 후에도 재발하는 자신을 보며 자포자기 심정으로 시설을 찾았다가 수개월 만에 단주에 성공했다. 그는 "나와 비슷한 사람들과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새로운 삶을 찾을 수 있게 됐다"고 전했다. 김 씨는 이제 술을 일체 입에도 대지 않고 있다. 임 씨와 김 씨처럼 사회복귀시설을 거쳐 어느 정도 중독에서 회복한 경우는 30%로 높은 편이다. 김 씨처럼 수개월 만에 '졸업'한 이도 있고 경우에 따라 수년간 머무는 이들도 있다.

사진=이민형 기자

실제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에서는 병원에 입원해 이뤄지는 치료보다 공동체 시설을 통한 알코올 중독 치료를 선호하는 편이다. 감집과 행집 같은 거주시설은 보통 '치료 공동체'라고도 불리는데, 이 개념은 미국의 유명한 중독자 치료시설 데이탑(DayTop)에서 비롯됐다. 데이탑은 공동체 생활 안에서 규칙적인 일상이 이뤄지면서 삶의 패턴과 사고방식 전반까지 바뀌어야 비로소 중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기본 철학으로 한다. 전문가들은 "미국 뉴욕 주는 2주 이상 병원에 입원하지 못하도록 법으로 규정하고 있고 이탈리아에서는 병원 자체를 없애려는 시도도 있었다"면서 "선진국들은 병원 대신 지역사회 시설을 통해 중독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고 설명한다.

미국의 경우 질병예방국(CDC)이나 주류통제국(ABC)을 통한 정부 차원의 지원이 활발하다. 모든 주마다 수십 개의 알코올 중독 치료시설을 가지고 있고, 종교 단체를 통해서도 별도의 센터가 운영된다. 구세군 단체에서 운영하는 미국 내 성인사회복귀센터(Adult Rehabilitation CenteroARC)만 112개소에 달한다. 이곳에서는 중독자들의 상담은 물론, 재활·직업훈련을 통해 사회구성원으로 복귀시키고 있다. 특히 ARC는 1,000여 개의 재활용 매장을 운영하며 중독자들이 실질적인 직업 훈련을 받을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일본도 치료부터 재활, 직업교육까지 받을 수 있도록 국가 차원에서 보조금을 지원하고 있다.

그러나 국내 알코올 중독 사회복귀시설은 운영상 어려움에 따라 점차 줄어들고 실정이다. 현재 사회복귀시설은 서울시 지원과 입소비, 후원금 위주로 운영되지만 프로그램 운영 비용마저 부족한 실정이다. 특히 감집의 경우 한국음주문화연구센터(KARF) 재단법인 하에서 재단전입금을 받아왔지만 2013년부터는 지원이 끊기며 프로그램을 줄이기도 했다. 처음 무료로 운영되던 행집도 운영비 부족으로 현재는 입소비를 받고 獵?실정이다. 이레지나 시설장은 "지난해부터 입소자의 가족을 대상으로 심리 프로그램을 진행하려고 했지만 재정이 부족해 심리전문가 섭외부터 가로막힌 상황이다"라고 전했다.

사진=이혜영 기자 lhy@hankooki.com

일반적으로 문제는 알코올 중독에 대한 사회적 후원이 활발하지 않은 데 있다. 고아원이나 양로원 등의 시설에 비해 상대적으로 후원의 손길이 극히 적다. 아직도 알코올 중독을 개인의 의지 문제로 여기고 병으로 연결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탓이다. 관계자들은 "알코올 중독 문제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높아져 개인적으로 후원이 활발하게 이뤄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제도적으로나 사회적 차원의 지원도 필요하다"고 말한다. 주류협회도 한국음주문화연구센터(KARF)에 대해 한동안 지원을 했지만 5년 전부터는 이마저도 중단한 상태다. 이러다 보니 알코올 중독에 대한 치료를 받고 싶어도 천 씨처럼 돈이 없어 계속 나락으로 떨어지는 이들이 줄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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